1. 함께 살 수 없는 자들

3년 동안 거의 매주 정신병원을 방문했다. 알코올 의존증, 만성 조현병, 급성 조울증 환자들을 만났다. 입원한지 얼마 되지 않은 급성기 환자들은 목소리 높여 자신이 이곳에 갇혀있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입원한지 오래된 사람들은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중얼거렸다. 가족들은 연락하면 악을 썼다. “퇴원하면, 인권위에서 책임집니까!” 온 가족이 위원회로 찾아와 통사정도 했다. “그 양반 나오면 우리는 죽어요” 우리나라의 정신병원에는 특정한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정신병원의 상당수는 환자들의 이용시설이 아니라 ‘함께 살 수 없는 자들’의 수용소가 됐다.

가정폭력법제는 가족들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했다. 경찰력과 사법자원은 개입을 꺼렸고 가족들도 그 절차이용의 시간적, 경제적 부담을 감수하지 못했다. 가족들이 기댈 수 있는 신속한 길은 정신병원에 이들을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전화 한통이면 갑자기 출동한 누군가가 그들을 신속히 잡아 병원에 집어넣었다. 체포, 감금죄에 해당할 사안이지만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다. 사법체계가 적법절차에 따라 규율해야할 '나쁜 인격'을 가진 존재들이 정신병원으로 들어가 ‘인격장애인’이 됐다. 정신질환으로서의 인격장애와 우리가 법적, 윤리적 책임을 물어야할 ‘나쁜 인격’들이 구분되지 않은 채 의료의 영역에 포섭됐다.

▲ 정신병원 강제입원 문제를 다룬 영화 '날 보러와요' 한 장면

그러는 동안 ‘아픈 사람들’이 모든 사회적 비용을 떠안았다. 약간의 사회적 지원만 있으면 충분히 지역에서 살 수 있는 사람들도 갈 곳이 없어 병원에 머물렀다. 일하면서 이러한 몇몇 환자들을 퇴원시켜 지역사회로 자립하도록 도왔지만 아무런 재산도, 집도, 가족도 없는 가난한 이들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치료가 아니라 ‘수용’만 지속되는 동안 이들의 질병은 만성화돼, 병원에 있는 동안 ‘함께 살 수 없는 자’가 되어갔다. 기초생활수급자들은 정신병원으로 들어가면 의료급여가 책정한 하루 2770원 내에서(정액수가제) 약물을 처방받고, 질 낮은 급식을 먹는다. 그동안 환자의 기초생활수급비는 수급권자 본인이 아니라 그 형제의 생활비가 되거나, 환자의 동의도 없이 ‘간병비’ 명목으로 병원의 수입이 된다(의료급여환자들은 별도의 병원비 지불이 필요 없다).

개인의 행위와 질병, 법적 책임사이의 정교한 구별에 비용을 아낀 사법제도와 지역사회에 구축해야할 보건, 복지 서비스에 인색한 정부권력이 발생시킨 사회적 부담을 ‘가난하고 아픈’ 정신장애인들이 모두 감당했다. 열악한 정신병원들을 중심으로 사실상 게토화된 수용소가 출현했고, 과거 한센인수용소, 형제복지원, 삼청교육대의 기능을 대체했다. 가족들은 가족들대로 죄책감에 시달린다.

2. 갇힌 동물들

한국 정신병원에는 8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 가운데 약 75%는 강제입원제도로 입원한다. 이들은 평균 190일 이상을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생활한다. 하지만 한 병원에서 퇴원하면 곧바로 다른 병원으로, 또 다른 병원으로 떠돌기 때문에 실제 입원기간은 훨씬 더 길다. 정신보건법은 6개월을 초과하여 강제입원시키고자 할 때 ‘계속입원심사’를 받도록 하지만, 계속입원심사에서 설령 퇴원결정이 나오더라도 곧바로 병원에 재입원시켜도 무방하다(이럴 것을 계속입원심사 제도는 왜 운영하는 걸까?). 정신요양원에 있는 사람들의 입소기간은 수천 일에 달한다. 일하면서 십년 이상 입원이나 입소생활을 한 환자들을 만나는 일은 빈번하다. 정신병원의 병상수는 2000년 5만8010개에서 2013년에는 9만6965개로 늘었다. 병상이 늘어나자 환자도 동일하게 늘어 그 자리를 채웠다. 반면 사회적 자립을 돕는 사회복귀시설(정신재활시설)은 전국 총 333개, 입소가능 정원은 2541명에 불과하다(2015 기준). 지역 정신보건센터와 사회복귀시설 노동자들은 불안정하고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린다.

정신병원은 몇몇 사건들로 그 실상이 대중에게 알려진다. 그럴 때 기자나 연구자들은 종종 내게 연락해, 정신병원에서의 인권침해 사례 가운데 심각한 것을 들려 달라 요청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들은 불만족하면서, 재차 묻는다. ‘정신질환이 없음에도’ 가족들과 의사가 합심하여 재산 등을 빼앗기 위해 강제입원을 시키는 경우가 자주 있는가?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리고, 밥을 굶기는 행위가 만연한가? 그런 경우가 물론 있지만, 우리 사회가 정신병원의 ‘문제점’으로 인지하는 이 두 가지 유형의 사례는 역설적으로 ‘정신장애인의 인권’과 관련이 없다. 정신장애인이 아닌 사람의 강제입원과 강제치료가 가장 심각한 인권침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환자가 “정신장애인이 아니”라는 전제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정신장애인은 강제치료가 당연시되는 이유를 묻지 못한다.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리고 밥을 굶기는 행위는 인간이 아닌 존재, ‘동물’에 대해서도 가혹한 학대행위에 해당하므로 정신장애인의 인권을 전제할 필요가 없다. 정신병원이라는 수용시설의 문제는 정신장애인이 인권을 침해당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침해당할 인권 자체가 없는 ‘헌법의 진공’ 상태라는 점에 있다.

정신장애인을 탈원화해야한다는 주장은 규범의 진공 속에서 동물처럼 사육되는 사람들을 헌법이 관할하는 ‘인간의 세계’로 끌고 오자는 주장이다. 물론 정신장애인의 가족들 중 일부는 ‘인권팔이’나 하는 사람들이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한다고 비판할 것이다. 정신의학 종사자들은 일부 의료기관의 잘못을 정신의료계 일반으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고 반발할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끌려가기 싫다고 울부짖는 가족 구성원을 응급이송차량에 태워 병원으로 보내는 일을 계속할 것인가? 현행 시스템은 정신장애인의 가족들에게 정신장애를 감당하거나, 죄책감을 느끼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 요구한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더라도, 탈원화를 외치고 탈원화가 진행되어야 비로소 지역사회에서 가족과 정신장애인을 돕는 시스템 구축이 탄력을 받는다. 정신장애인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국가와 의료시스템은 결코 유효한 지역사회 기반 정신보건정책을 수립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정신의료기관이 환자들을 동물처럼 사육하지 않지만, 현대 한국사회에서 정신병원만큼 인간을 ‘동물’에 가깝게 만드는 예가 있는가? 장애인거주시설이었다면 당장 시설이 폐쇄될 행위를 하고도 정신병원들은 아무렇지 않게 영업한다. 훌륭한 의사들과 병원들도 있음을 잘 알지만, 우리나라 정신의료시스템 일반의 현실에 대한 비판에 과도한 면이 정말 있는가?

▲ 사진=pixabay

정신장애는 누구에게나 발병할 수 있지만, 특히 가난한 사람이 발병하면 만성질환자로서 장기간 감금생활 끝에 생을 마감하기 쉽다. 좋은 약을 사용하고, 개인별 치료계획 하에 치료받고, 안전하고 위생적인 시설에서 서비스를 받으려면 부유해야 한다. 정신장애의 탈원화는 지역사회 기반 치료임과 동시에, 정신장애 발병에 따른 삶의 격차를 줄이는 평등운동이기도 하다. 한편, 당신이 설령 부유층에 속하더라도, 정신장애가 곧 ‘나쁜 인격’을 가진 존재와 동일시되는 사회에서 산다면, 역시 당신도 적절한 치료와 관심을 받기보다 “조금 더 값비싼” 시설에서 격리되어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탈원화가 두려운 대상이라는 점을 이해한다. 비현실적으로 들린다는 점도 일견 납득된다. 다만 장애인들이 처음 거리로 나설 때 어떤 목소리가 있었는지 찾아보라. 중증장애인들이 시설 밖으로 나가면, 얼어죽고, 굶어죽고, 학대당하고, 주변에 폐를 끼치고, 위험을 일으킨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걱정했다. 하지만 현실은 (초반 가혹했으나) 예상과 달랐다. 숨기고, 감추고, 격리된 상태로는 아무리 좋은 의료시술과 최고의 음식으로 신체와 정신을 조형하려 애써도 ‘동물적’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우리 최고 권력자가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강제로 끌려가 동물처럼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 그렇게 살기를 선택하지 않는 것. 이것이 탈원화의 목표이고, 탈원화의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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