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시작되는 날이라 그런지 몹시 쌀쌀했던 12월 1일 하루 내내, 지난 주 토요일 촛불을 들었던 190만명은 물론이고 많은 주권자들이 분노와 허탈함을 느꼈을 것이다. 첫 번째 불길은 민주당 대표 추미애가 댕겼다. 그는 아침 8시 30분쯤 새누리당 ‘비박의 좌장’이라는 김무성을 만나 담판을 벌였다. 지난 29일 박근혜가 발표한 ‘3차 담화문’에 현혹되어 ‘탄핵 찬성’을 갑자기 내팽개친 비박을 다시 ‘탄핵열차’에 태우겠다는 선의였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바로 전날 국민의당 비대위원장 박지원, 정의당 대표 심상정과 탄핵 추진 방향에 대한 합의를 해놓고 그 두 사람에게 연락도 하지 않은 채 새누리당에서 아무런 당직도 갖고 있지 않은 김무성에게 덜컥 회합 요청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추미애는 2일의 탄핵안 의결에 협조해 달라고 김무성에게 요청했지만 그는 ‘탄핵 철회, 박근혜 4월 말 퇴진’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추미애는 “내년 1월 말까지 박근혜를 퇴진시키자”(본인은 언론의 오보라고 해명)는 제안을 김무성에게 했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언론매체들에서 ‘실현 불가능한 독단적 발상’이라는 뭇매를 맞았다.

추미애와 김무성의 만남이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에 새누리당 의원총회가 열렸다. 원내대표 정진석은 의총에서 ‘만장일치’로 결정된 사항을 기자들에게 전했다. “내년 4월에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하고 6월에 조기 대선을 치르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는 것이 ‘당론’으로 채택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한 달이 넘도록 ‘박근혜 탄핵’을 줄기차게 외치며 의원 40명 이상이 탄핵소추안 의결에 참여할 것이라고 선전하던 비박계도 모두 ‘만장일치’로 박수를 보냈다니 주권자들이 황당해 했을 것은 물론이다. 설령 박근혜가 ‘4월 말 퇴진’을 약속한다 하더라도 나중에 어떤 핑계를 대면서 특기인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 12월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야3당 대표가 회동에 앞서 모두발언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 사진=포커스뉴스
새누리당이 모처럼 ‘친박 비박 화합’을 일구어낸 지 몇 시간 뒤인 오후 2시 반쯤 야 3당 대표들이 국회에서 공개 회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손을 맞잡기는 했지만 모두 표정이 굳어 있었다. 추미애가 강권하다시피 건네준 마이크를 잡은 박지원은 “탄핵은 발의가 목표가 돼선 안되고 가결이 목표가 돼야 한다”며 “그러나 지금 현재 비박의 태도를 보면 가결에 상당한 안개가 꼈다”고 말했다. 그는 새누리당 의원총회의 만장일치 결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박을 설득하면서 야 3당이 철저한 공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추미애와 심상정이 “전날 합의한 대로 오늘 탄핵안을 발의해야 한다”고 강조하자 박지원은 다시 한 번 마이크를 잡고 “어제 저는 분명히 비박이 협력하지 않으면 지금 탄핵안을 발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면서 “야 3당이 2일 탄핵안을 의결하자는 약속은 없었다”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세 대표의 발언은 여러 방송매체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도대체 그렇게 중요한 안건에 관한 합의사항을 서면으로 작성하지도 않았다는 말인가? 박지원의 ‘탄핵 시간표’는 국민의당 ‘창업주’인 안철수의 ‘탄핵안 12월 2일 발의 의결’ 주장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야 3당 대표들이 국회에서 만나기 한 시간 전인 오후 1시 30분쯤 박근혜가 전날의 대화재로 엄청난 피해를 본 대구 서문시장에 나타났다. 최근 한 달이 넘도록 청와대에서 정무도 포기한 채 두문불출하던 그가 ‘정치적 고향’의 명소인 그 저자거리에 얼굴을 비친 것이다. 박근혜 방문 소식을 미리 들은 시민들은 서문시장 들머리에서 ‘박근혜 퇴진’ ‘박근혜 하야’ 등의 손팻말과 펼침막을 들고 그를 맞이했다. 큰길가에는 대형 소방차들로 ‘방벽’이 처져 있었다. 박근혜는 웃음 띤 얼굴로 단 10여분 동안 화재현장을 돌아보았다. 최소 수백억원에서 최대 1천억원에 이르는 화재 피해를 본 상인들 가운데 어떤 이는 “불난 집에 그렇게 잠깐 다녀가면서 생색을 내지 말고 차라리 재난지역 선포를 하겠다고 약속했으면 분통이 터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말 매출에 대비해 1억원어치 물건들을 보험도 없이 들여놓았다가 몽땅 불길에 날렸다는 여성 상인의 울부짖음이 박근혜의 귀에 들렸을까? 그는 마음속으로 ‘이틀 전 내가 발표한 담화 때문에 완전히 평정된 비박과 갈팡질팡하는 야권’을 떠올리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박근혜 대통령이 12월1일 큰 화재가 발생한 대구 서문시장을 방문해 피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최순실 게이트’로 밝혀진 국정농단의 ‘주범’은 박근혜라고 검찰이 발표한 뒤 ‘2백만 촛불’은 ‘박근혜 퇴진과 구속’을 한결같이 외쳤다. 민주당과 국민의 당이 합의한 ‘탄핵소추안’에는 박근혜의 끔찍한 범죄혐의가 적나라하게 예시되어 있다. 가장 중대한 탄핵사유는 ‘헌법 위반’이다. 국민주권주의(헌법 1조), 대의민주주의(67조 1항), 국무회의에 관한 규정(88조, 89조), 헌법수호의무(66조 2항, 69조)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박근혜는 ‘내란죄’로 기소될 수 있다. 그런 ‘국사범’이 ‘3차 담화문’에서 자신은 ‘사심’ 없이 국정을 운영했다면서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고 제안하자 새누리당 비박은 마치 최면술에 걸린 듯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박근혜의 폭주를 비판하던 비박마저 꼬리를 내려버린 새누리당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할 이유를 잃어버렸다. 오는 토요일(3일) 주권자들은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를 에워싸고 “새누리당은 해체하라”고 외쳐야 할 것이다. 민주당과 국민의당도 ‘촛불 민심’의 비판을 면할 수 없다. 파렴치하게 퇴진을 거부하는 박근혜를 청와대에서 물러나게 하려면 현재로는 탄핵이 최선이라고 믿는 70% 이상의 주권자들은 야 3당의 분열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단일전선’ 결성이 최우선 과제인데 탄핵 발의와 의결 시기를 두고 야 3당이 등을 진다면, 앞으로 박근혜가 퇴진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단합해서 민주평화체제를 세울 수 있겠는가?

▲ 참여연대 회원 20여명은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국민의 명령인 박근혜 즉각 퇴진 거부하는 새누리당 각오하라'는 기자회견을 열고 새누리당 규탄 피켓에 날계란을 던지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외신이 전하는 기사들을 보면 일본의 아베 정권은 박근혜가 독단적으로 합의한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 10억엔에 해결’과 단기간에 밀어붙인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조인이 새 정권이 들어서면 백지가 되지나 않을까 좌불안석이라고 한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최근 한국인들의 시위가 정당하다고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중국의 관영매체도 비슷한 논평을 냈다. 박근혜는 더 이상 국제 외교무대에 나설 수 없고 국정 운영도 불가능하다. ‘식물 대통령’을 넘어 ‘죽은 오리(데드 덕)’가 되어버린 그를 하루라도 빨리 청와대에서 추방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야 3당만의 힘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1600여 시민단체들이 결성한 ‘박근혜 퇴진 비상국민행동’을 ‘민주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주권자운동본부(가칭)’로 확대 개편한 뒤 1987년 6월항쟁을 주도한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그랬듯이 야당들이 그 조직에 참여하는 방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렇게 강력한 조직은 박근혜 퇴진 이후에 치러질 대통령선거에 대비해 명실상부한 ‘국민주권후보’를 선정하는 작업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뉴스타파>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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