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과 성폭력에 찌든 문화예술계가 이를 스스로 자정할 능력이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을 줄여나갈 구조적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취재하겠다.”

PD수첩 1105회 ‘문화예술계 성추행 파문, 폭로는 시작됐다’ 진행자의 마지막 멘트다. 하지만 진행자의 멘트와 달리 PD수첩 1105회는 문화계 성추행 파문을 다루며 구조적 해결책 보다는 상황 재현과 피/가해자 당사자 인터뷰에 집중했다. 이러한 전개방식은 자극적일뿐더러, 성폭력 사건에 기계적 중립을 유지하면서 결국 가해자로 지목된 이를 위한 ‘변호의 장’이 돼버렸다는 비판을 부른다.

PD수첩은 이 사건을 다루며 모든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주목된 이의 인터뷰를 대칭하듯 1:1로 삽입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은 공통적으로 “피해자가 나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면 미안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사실관계에 대한 인정은 아니다”, “합의된 관계였다”고 말했다.

▲ PD수첩 1105화 화면 갈무리.
▲ PD수첩 1105화 화면 갈무리.
PD수첩은 성폭행 사건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주장을 반복해 보도한다. 가해자들의 “사실이 아니다”라는 말을 피해자의 인터뷰 뒤에 바로 붙이면서 시청자들에게 피해자들의 진술이 거짓인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는 피해자 진술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런 전개는 피해자들의 증언에 힘을 떨어뜨리기만 할 뿐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박범신 작가의 집에 찾아가 취재를 했으나 “사실이 아니다”라는 작가의 말에 어떤 부분이 사실이 아닌지 묻는 대신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하다”는 사과를 하고 돌아선다.

성추행‧성폭력 사건은 수사기관에서도 피해자 중심으로 접근하는 사건이다. 성폭력의 정의 자체가 ‘성을 매개로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이뤄지는 모든 가해행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문화예술계 내 성폭행 사건들은 권력을 가진 한 사람에 의해 여러 사람이 비슷한 피해를 당했고 다수의 피해자 증언이 확보된 상태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의 증언은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반대되는 주장에 의해, 가해자와 가깝게 지낸 전문가에 의해, 가해자 측 변호사에 의해 계속해서 힘을 잃는다.

▲ PD수첩 1105화 화면 갈무리.
조재연 한국여성의전화 인권정책국장은 “성폭력을 당한 당사자는 이 사실을 외부로 알리기 굉장히 어려우며 특히 이번 여러 업계 내 벌어진 성폭력 사건은 앞으로 자신의 일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더 폭로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라며 “어렵게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는 진실성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조재연 국장은 “성폭행 사건을 보도하며 당사자들 인터뷰와 재현을 주요 요소로 전개하는 접근법은 개별적 사건에 대한 선정적 소비에서 그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PD수첩이 마치 ‘중립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기획한 것처럼 보이는 1105화의 전개방식은 처음이 아니다. PD수첩은 ‘박유천 성폭행 의혹 논란’(1089회), ‘데이트 폭력, 괴물이 된 남자들’(1067회), ‘2030남성보고서 그 남자, 왜 그녀에게 등을 돌렸는가’(1049회), ‘죽음을 부르는 데이트 폭력’(1042) 등 꾸준히 여성문제를 다뤄왔으나 그 전개방식은 남성과 여성의 이야기를 반반씩 듣고 피/가해자의 이야기를 고루 넣는 중립적 방식으로 펼쳤다.

특히 ‘2030 남성보고서: 그 남자, 왜 그녀에게 등을 돌렸는가’편은 ‘김치녀 페이지’ 운영자의 인터뷰를 길게 삽입해 ‘여혐’(여성혐오)과 ‘남혐’(남성혐오)를 대칭하는 방식으로 다뤘다. 여성혐오에 대한 방송분에서 남성들의 개인적 감상을 듣는 데만 방송의 반을 할애하고 여성혐오 가사로 논란을 일으켰던 남성을 인터뷰이로 선택하기도 했다.

이번 1105화 역시 PD수첩이 지금까지 여성문제를 보도해왔던 관행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PD수첩이 여성문제를 보도하면서 보여주는 중립에 대한 강박은 결국 사건에 대한 사실을 더욱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어버렸다. 기울어진 권력의 장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에 대해 중립이라는 관점이 가진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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