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 침해 논란 속에서도 빅데이터 산업 활성화가 빠르게 추진되는 배경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요구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일각에선 최순실 게이트와 빅데이터 산업 활성화를 연관 짓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새누리당은 논의 자체를 봉쇄했다.

김성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미래창조과학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가 2013년 8월 미래부에 제출한 ‘창조경제 실현을 위한 제언’에는 빅데이터 활용 가이드라인에 대한 요구사항이 있다.

전경련은 “빅데이터 사업자가 현행법 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실무 가이드라인 작성”을 요구했다. 전경련은 △주민번호, 이름, 나이 등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개인정보의 처리 방법 △빅데이터 사업자가 법에 저촉되지 않고 활용할 수 있는 개인정보 예시 △데이터 간 결합으로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 생성 시 처리 방법 등의 가이드라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비식별화는 예를 들어 ‘A카드사의 고객정보’파일이 있다면 개인정보가 노출될 수 있는 이름, 주소, 주민등록번호 같은 정보는 가공을 통해 모자이크처리를 하듯 지우고, 결제 내역 리스트만 보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정보와 대조하고 결합하면 개개인이 특정될 가능성이 커진다. A라는 이용자에 대한 통신정보, 카드결제정보, 의료정보 등을 하나로 묶게 되면 당사자가 누구인지 쉽게 알게 된다는 이야기다. 

▲ 방송통신위원회가 2014년 발표한 '빅데이터 개인정보 보호 가이드라인'. 방통위는 비식별화를 통해 개인정보가 안전하게 관리된다고 강조했지만, 해당 조항을 보면 비식별화가 완전하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현재 기업은 빅데이터를 통한 마케팅을 연구하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의 빅데이터 시범사업 사례집을 보면 △GS홈쇼핑(고객 추천 서비스 정교화) △롯데백화점(고객 세분화를 통한 타겟 마케팅) △신한카드(고객맞춤형 타겟마케팅) △SK플래닛(스마트추천 알고리즘 시스템) △KT올레TV(실시간 시청정보, 타겟 콘텐츠 제공)에 대한 내용이 있다. 비식별화 정보가 이들 기업에 제공되면 관련 사업이 활성화 될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전경련의 요구 이후 비식별화 가이드라인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2013년 12월18일 방송통신위원회가 빅데이터 가이드라인 초안을 발표했고, 2014년 12월 방송통신위원회가 ‘빅데이터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을 확정했다. 2016년 5월18일 박근혜 대통령이  규제개혁장관회의를 개최한 직후인 6월30일 ‘범정부 비식별조치 가이드라인’이 발표됐다. 현재는 이 가이드라인을 근거로 빅데이터 관련 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비식별화를 해도 데이터를 가공하고 취합하는 과정에서 개인이 특정되게 된다는 점에 대한 지적이 쏟아졌지만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2014년 8월5일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비식별화 가이드라인에 재검토 권고의견을 냈고, 지난 7일 국가인권위원회는 비식별화 조치에 대해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가 지난 14일 전국경제인연합회 건물 앞에서 미르, K스포츠재단 모금 의혹 관련 전경련 회원사들을 뇌물죄로 수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 연합뉴스
정부의 창조경제 핵심사업에서도 비식별화 관련 법령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위해 ‘규제프리존특별법’을 추진해왔는데 여기에는 비식별화와 관련한 개인정보 보호완화가 포함돼 있다. 

이 외에도 △국가공인 빅데이터 분석가 자격증 도입 추진 △창조경제 추진기획단 설립 △국가주도 가상현실(VR)산업 육성 시스템 마련 등 ‘창조경제 실현을 위한 제언’에 포함된 전경련의 요구들이 대거 추진됐다. 

전경련 입장에서 당연히 이 같은 규제완화 추진을 요구했다고 할 수 있지만, 최순실게이트 이후 ‘노동시장 규제완화’와 마찬가지로 대기업이 미르·K스포츠재단을 통해 거금을 준 대가로 받은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진보네트워크센터 등 시민사회단체는 10일 성명을 내고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커져 가는 이때, 국회가 비리 의혹이 걷히지 않은 기업 이익에 편중된 창조경제 예산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다”면서 “창조경제 관련 예산 가운데 비식별화 등 박근혜 정부가 규제완화를 추진했던 사업에 대한 원점 재검토를 요구하며, 관련 예산의 편성을 즉각 중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회는 관련 논의는커녕 발언 자체를 막고 있다. 15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는 ‘빅데이터 이용 및 산업진흥 등에 관한 법률안’ 공청회를 열 계획이었지만 새누리당은 진술인의 자료를 문제 삼아 파행시켰다.

야당 추천 진술인 이은우 변호사가 사전에 제출한 의견서에 “창조경제혁신센터 설립에 참여한 대기업들을 위해 개인정보 규제를 완화해 준 것”이라고 지적한 내용과 미르·K스포츠재단의 대기업 출연금 현황을 언급한 게 문제가 됐다. 배덕광 새누리당 의원은 “이은우 진술인은 지속적으로 정쟁을 유발하는 내용을 담았다”면서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것으로 공청회 목적에 맞지 않다. 진술을 철회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방위는 공청회 일정을 추후 다시 잡고 진술인 채택에 대해 여야가 다시 논의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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