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명이 평화집회를 했다. 놀라운 사실이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일이다. 그러나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은 이번 집회를 ‘모범집회’로 틀짓기 하면서 동시에 이전 집회를 문제적 집회로 낙인찍었다. 강력한 저항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만들면서 집회 참여자들의 운신의 폭을 제한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13일 “시민들, 환자 발생하자 길 터주고... 집회 뒤엔 쓰레기 수거”에서 시민들의 의식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면서 조선일보는 “지난해 11월 14일 민중총궐기는 시위대의 쇠파이프와 경찰의 물대포가 맞서는 무법천지였다. 청와대로 행진을 시도한 일부 시위대가 차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경찰 버스를 밧줄로 묶어 당겼고, 복면을 쓴 채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보도블럭을 깨서 집어던졌다”면서 지난해 민중총궐기를 비판했다.

▲ 14일 조선일보 보도.
조선일보는 “이 과정에서 농민 백남기씨가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진 지 317일 만에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날 촛불 집회에서는 차벽을 넘어뜨리려는 시도도 없었고, 쇠파이프도 등장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다른 언론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MBN 뉴스8은 13일 “밧줄을 이용해 경찰 버스를 부수고 횃불이 난무했던 지난해와는 확연히 바뀐 것”이라고 보도했다. KBS 뉴스9는 12일 “질서를 지키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는 성숙한 집회 문화가 자리 잡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물론 이 같은 보도에는 새겨들을 대목이 있다. 물리력을 강력하게 행사하는 게 최선이라는 방식에 더 이상 대중이 공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12일 집회 참가자 중에서도 적지 않은 이들이 청와대 돌격식 집회방식에 대한 비판을 했다. 버스에 올라탄 시민을 다른 시민들이 저지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단순히 표면적인 현상만 보고 평화집회를 ‘좋은 집회’로 규정하고, 이전의 집회를 ‘나쁜 집회’로 여기기는 힘들다. 집회 방식에는 딜레마가 있고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임을 고려해야 한다.

김제동씨가 지난 12일 페이스북에 “누구도 다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정당한 분노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이라고 말한 것처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치는 데 굳이 폭력을 써 상대방에게 빌미를 줄 이유는 없다. 100만 명이나 모인 대중적인 집회이기 때문에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대중적인 방식이 필요하다는 견해 역시 일리 있다.

▲ 지난 13일 MBN 8뉴스 보도화면 갈무리.
반면 김규항 고래가그랬어 발행인은 페이스북에 “시위는 많은 사람이 함께 만들어내는 위협”이라며 “경찰이 권고하는 시위 태도를 벗어나면 프락치라는 비난이 오가는 순치된 시위는 과연 백만명의 위협을 만들어냈을까. 오히려 백만명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작은 위협을 구현해낸 게 아닐까”라고 지적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해산하는 것만으로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어느 쪽이 맞다고 판단하기 힘든 문제지만 오랫동안 싸운 이들이 강력한 방식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운동권’이어서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날 청와대 행진을 끝까지 주장한 쪽에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도 있었다. 단식, 삼보일배, 삭발, 농성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싸워왔으나 실패한 유가족에겐 더욱 적극적인 방법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해 민중총궐기도 그랬다. 생존권이 걸려있는 사안임에도 당사자와 소통 없는 일방적인 노동정책, 쌀값공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정부의 문제가 더 컸다. 여기에 지속적인 집회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점점 더 저항의 규모와 방식이 거세진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역시 비슷했다. 초반에는 지금과 같은 평화집회 기조가 유지됐지만 지속된 집회에도 정부가 변화가 없자 청와대 행진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 2008년 촛불집회 당시 조중동 보도. 이들은 집회가 과격해질수록 '변질됐다'고 주장하며 집회 참가자를 시민들과 고립시켰다.
이번 집회 역시 2008년 집회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입장에 변화가 없으면 언제든 강경해질 수 있다. 이때 조선일보 등 언론의 ‘좋은 집회’ 프레임은 광장의 행동에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 조선일보의 프레임에 따르면 행진을 시도하거나 차벽을 넘으면 ‘불법’ ‘폭력’ 딱지가 붙고 “변질됐다”는 지적이 나오게 된다. 실제 2008년 조중동은 집회 초반에는 목적이 순수했으나 이후 정치적으로 ‘변질’됐다는 프레임을 써 집회 참가자들을 여론으로부터 고립시키려 했고, 이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언론의 ‘좋은 집회 나쁜 집회’ 구분짓기는 공권력 오남용 문제를 희석시킨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지난해 민중총궐기 때 살인적인 물대포는 두말할 것도 없고 신고한 행진을 불허하고 시위를 불법으로 낙인찍고 차벽을 세우며 집회시위의 자유를 막은 건 경찰이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무분별한 차벽이 위헌 결정이 나기도 했다.

과거엔 양쪽 다 폭력을 저질렀는데 이번에는 둘 다 모범적이라는 언론의 지적도 많은데, 두 가지 폭력을 같은 층위에서 놓고 보는 건 공권력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공권력은 일반 권력과 다르고, 이들의 폭력은 최소한이 돼야 한다. 2005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농민시위 살인진압에 대한 사과를 하면서 “정도를 넘어서 행사되거나 남용될 경우 국민들에게 미치는 피해가 크기 때문에 공권력의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폭력집회가 무조건 정당하다는 건 아니다. 어떤 방식이 나오든 광장의 주체들이 함께 고민하고 결정할 문제다. 언론이 해야 하는 건 좋은 집회와 나쁜 집회를 구분짓는 게 아니다. 왜 국민이 저항하는지, 일각에서는 강경한 목소리까지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원인을 살펴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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