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 의혹을 받는 최순실(60)씨를 쫓는 기자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주요 언론사들은 특별취재팀(TF)을 꾸리거나 특파원을 통해 최씨 모녀 행방을 뒤쫓고 나섰다.

지난달 20일 한겨레가 K스포츠재단 배후로 최씨를 지목하며 ‘최순실’ 석 자를 꺼낸 후 한동안 잠잠하던 보도는 최씨가 국‧내외에서 ‘비밀회사’를 설립했다는 의혹과 함께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언론사간 취재 경쟁에 불이 붙은 것이다.

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 보도에 줄곧 침묵을 지켰던 지상파 3사도 이례적으로 최순실 모녀를 뒤쫓고 있다. 특파원들이 독일에 상주하며 관련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방송 언론은 신문보다 주목도가 높고, 전파를 통해 현장 상황이 고스란히 안방에 전해진다는 데서 이들 영향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그 가운데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방송사는 SBS다. 

SBS메인뉴스 ‘뉴스8’은 지난 19일 “‘비덱’ 자리엔 호텔… ‘최순실씨 봤다’”(4번째 보도)를 통해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 ‘비덱 타우누스’를 취재했다. 프랑스 파리특파원 배재학 기자가 현지를 방문한 것이다. 

지난 21일자 보도에서 배 특파원은 최씨와 그의 딸 정유라(20)씨가 독일에서 살고 있던 집을 처음으로 확인했고, 이어 하현종 기자는 최씨가 사들인 비덱 타우누스 호텔의 매매계약서를 단독으로 입수해 보도했다.

▲ SBS 8뉴스 23일자 보도.
다음날인 22일에는 최씨가 만든 ‘더블루K’ 독일법인이 비덱과 거래한 정황을 보도하며 “한 사람(최씨)이 같은 건물에 회사를 두 개 등록해 놓고 임대료를 주고받은 것”이라고 ‘돈세탁’ 의혹을 제기했다. 

특히 지난 23일자 보도는 이들 회사의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확인해주는 중요한 보도였다. 

이날 SBS 뉴스8은 회사의 자금이 정씨의 승마 훈련을 포함해 각종 식당, 마트, 주유소에서 쓰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최씨의 비밀회사들이 딸에 대한 지원을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다.

지난 한 달 가까이 ‘최순실 게이트’에 침묵하던 SBS가 주요한 보도를 쏟아낸 까닭은 무엇일까.

SBS의 한 기자는 24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최순실 보도가 되지 않고 있다는 내부 지적은 일상적이었지만 이번의 경우 일선 기자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면서도 “기자들의 발제와 보도 요구를 (보도 책임자들이) 무시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권영인 SBS 기자협회장은 “타사에 비해 시기적으로 많이 늦었기 때문에 ‘우리가 잘했다’고 말하기 참 민망하다”면서도 “최순실 건을 정확히 확인하고 가야 한다는 내부 논의는 많았다. 최근 리포트는 논의와 고민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앞서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는 19일 성명을 내어 “박 대통령과 40년 지기라는 최순실 관련 의혹이 터져 나오고 있지만 어떤 관련 질문도 없이 VR 전시장을 찾고 아프리카에서 온 새마을 운동 지도자들 앞에서 철 지난 ‘근면, 자조, 협동’을 외쳐대는 권력자(박근혜 대통령)의 미소만 화면을 장식할 뿐”이라며 ‘“신시절 ‘대한늬우스’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킨다”고 자사 보도를 비판했다.

실제 지난달 20일부터 지난 17일까지 ‘최순실’이 언급된 지상파 3사 메인뉴스 보도를 집계한 결과, SBS 8뉴스는 8건(MBC ‘뉴스데스크’ 5건, KBS ‘뉴스9’ 6건) 보도하는 데 그쳤다. 독자적인 취재를 통한 의혹 검증은 전무했고 여‧야 공방 안에서의 면피성 보도가 전부였다는 것이 내부 평가였다.

특히 KBS가 지난 20일 오전 편집회의에서 “(최순실 보도를) 적극적으로 해보자”며 침묵에서 기존 보도 방향을 전환시킨 것과 관련해 청와대와 지상파 3사가 ‘최순실 자르기’로 사전에 조율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기도 했다.

권 기자는 “우리는 그런 것과는 무관하다”고 말한 뒤 “(보도 이후 SBS 내부) 분위기는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다. 이슈를 먼저 제기한 언론에 공이 있는 것이고 우리는 뒤따라가는 입장이었다. 앞으로 검찰 수사에서  나올 새 사실이 보도를 통해 드러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오전 국회에서 2017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KBS·MBC 공영방송 기자들은 지난 20일 최씨와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이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면 엄정히 처벌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과 맞물려 자사 보도 방향이 180도 바뀐 것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

KBS ‘뉴스9’은 지난 23일 최씨 모녀가 최근까지 거주하던 시가 5억의 주택이 정씨 소유라는 사실을 밝히고 증여세 및 외국환거래 위반 가능성까지 제기했다.  

KBS의 한 기자는 “(청와대와의 사전 교감과 관련해)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나 박 대통령이 던지는 의제와 KBS 보도 방향 전환이 딱 떨어지는 것에 의구심을 갖는 기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KBS는 몇 걸음 뒤쳐진 채 보도를 시작해 취재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며 “SBS도 보도가 빠르진 않았으나 일주일여 전부터 보도에 들어가 의미 있는 단독 기사가 나오고 있는데 KBS는 뒷북을 친다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KBS의 또 다른 기자는 “너무나 늦게 뛰어들어서 특파원은 물론, 검찰 기자나 편집 기자 모두 고생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특파원의 경우 최씨 행적을 쫓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방송에 필요한 그림도 없어서 구성원들이 고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최순실 보도를 한다고 해도 대통령과의 연관 의혹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박 대통령이 24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개헌 가능성을 언급해 더 이상 최씨가 아닌 개헌 이슈에 뉴스가 집중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MBC의 한 기자는 “MBC에서도 지난 20일 오전 최씨 수사 등 관련 아이템이 길게 잡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KBS와 비슷한 상황으로 볼 수 있는데 이날(20일)을 기점으로 논조가 바뀐 건 맞다고 본다. 늦었지만 특파원도 보낼 정도로 의지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MBC 뉴스데스크는 지난 20일 ‘집중취재’라는 코너로 미르·K스포츠재단과 관련한 논란과 쟁점, 검찰 수사 소식을 3번째 리포트로 2분30초가량 보도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쟁점 정리’ 보도가 등장한 것이다.

그는 “사견을 전제로 말하자면, 단순히 청와대에서 어쩔 수 없이, 여론에 밀려 최순실을 마지못해 포기하듯 ‘시그널’을 내린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기자는 “최씨가 머물렀던 곳에 남자도, 개도 들락날락했다는 얘기가 보도될 정도”라며 “청와대가 되레 ‘적극적으로 취재하라’는 지침을 방송들에 내리지 않았을까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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