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와 유료방송의 해묵은 갈등인 재송신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방송통신위원회와 미래창조과학부가 1년2개월 동안 논의한 결과물이 나왔다. 그러나 ‘재송신 대가산정 기준’이 없어 실효성을 가질지 미지수다. 시청패턴 변화에 따라 실시간에서 VOD로 재송신 갈등의 축이 옮겨가는 상황에서 실시간 재송신 협상만 다루는 이번 가이드라인이 뒷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방송통신위원회와 미래창조과학부는 20일 오후 ‘지상파 재송신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고 이날부터 시행했다. 가이드라인은 재송신 협상의 원칙과 절차를 규정하고 지상파와 유료방송 사업자에 협상을 성실하게 할 의무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지상파는 유료방송 플랫폼에 자사 방송을 내보내는 대신 가입자당 ‘재송신수수료(CPS)’를 받고 있는데, 지상파가 가격인상을 요구하면서 유료방송 업계가 반발해왔다. 민간 사업자들의 자율협상이지만 극단적인 경우 방송 송출이 끊기는 블랙아웃이 벌어지는 등 시청자 피해가 이어지면서 방통위가 나서게 됐다. 

▲ 2012년 1월, 지상파가 케이블에 재송신수수료를 요구하자, 케이블측은 과도한 비용을 요구하고 있다며 지상파를 끊는 초유의 블랙아웃 사태가 발생했다. ⓒ연합뉴스
가이드라인에 따라 20일부터 재송신 협상 때 ‘정당한 사유 없는 협상 또는 계약체결 거부’와 ‘정당한 사유없이 현저하게 불리한 지상파방송 재송신 대가 요구’ 등이 금지된다. 정당한 사유 없는 협상 또는 계약체결에는 △3회 이상 협상을 요청했어도 협상을 거부 △다른 경쟁사와 계약을 거부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거는 경우 △계약을 문서화하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 등이 해당된다. 금지행위가 벌어지면 방통위와 미래부는 IPTV법과 방송법에 근거해서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

그러나 재송신 가이드라인에서 ‘재송신 대가 산정’이 빠지면서 가이드라인 자체에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송신 협상의 핵심적인 문제는 “재송신 가격이 지나치게 헐값”이라는 지상파와 “무리한 가격인상 요구”라는 유료방송의 입장차다. 정부가 직접 가격을 책정하는 게 무리일 수 있다면 가격 책정에 어떤 요소가 반영돼야 하는지 언급할 필요성은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가이드라인이 명시한 금지행위를 비롯해 “대가협상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검증이 가능한 자료를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가이드라인의 5조) 등 내용 전반이 추상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검증 가능한 자료를 제시하는 게 가이드라인의 역할이지만 그 내용이 빠진 것이다.

최성준 위원장은 20일 전체회의에서 “수학공식처럼 답이 나올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대가산정 기준을 제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업계의 반발을 우려해 입장을 밝히지 못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방통위와 미래부는 가이드라인 제정 과정에서 대가산정 방안을 검토하고 관련 논의를 진행했으나 해당 논의 내용을 일절 발표하지 않았다. 신영규 방송지원정책과장은 “해외를 비롯해 다양한 대가산정 모델을 스터디하면서 검토했는데, 결과 도출이 어려워 결국 제외한 것”이라고 밝혔다.

▲ 일러스트= 권범철 만평작가.
대신 지상파나 유료방송의 요청이 있을 경우 재송신대가검증협의체를 구성하게 했으나 이 역시 제 역할을 할지 미지수다. 신영균 과장은 “구체적으로 협의체를 어떻게 구성할지 결정된 건 없다. 업계 전문가들로 구성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업계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지상파나 유료방송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위원들이 선임되면 논의가 공전할 확률이 크고 협의체의 역할이 자문에 그쳐 강제성있는 방안을 내놓을 수 없다.

가이드라인 제정 논의 초기부터 재송신 대가산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드러낸 지상파는 일단 안도하는 분위기다. 지상파 방송사가 주축인 방송협회는 20일 입장을 내고 “가이드라인이 도를 지나쳐 대가 산정 자체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려 한다면 오히려 자율적인 협상을 저해할 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길 바란다”고 밝혔다. 반면 케이블TV비상대책위원회는 20일 논평에서 “이번 가이드라인으로 협상에서 합리적인 대가 산정을 강제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이번 가이드라인이 뒷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미 IPTV와 다수 케이블업체의 재송신 협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2018년까지 극단적인 재송신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시청패턴이 실시간 방송에서 VOD로 옮겨가면서 추후 갈등은 ‘실시간 방송’보다는 ‘VOD’를 두고 벌어지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번 가이드라인은 VOD 협상에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

방송통신위원회 역시 현재와 같은 권한으로는 재송신 분쟁 개입에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방통위는 재송신 분쟁이 벌어질 경우 방통위가 ‘직권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방송법 개정을 다시 추진할 계획이다. 지난해 방통위의 ‘직권조정 권한’과 ‘방송유지재개명령권’이 담긴 방송법 개정안이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법안소위에 상정됐으나 여야 의원들은 지상파 관계자 비공개 면담 이후 ‘직권조정’권한을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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