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정치 생명을 끝장낼만한 스캔들이 터졌다.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은 단 하나. 미디어와 국민의 눈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다. 안보에 대한 불안감을 부추기고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의제를 만들어 낸다. 예상대로 미디어는 던져주는 정보를 쫓아다니기 바쁘다. 이제 어느 누구도 대통령의 스캔들 따위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됐다. 대통령은 위기를 멋지게 돌파한다.

영화 ‘왝 더 독(Wag The Dog)’ 이야기다. 더스틴 호프만과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만으로도 볼만한 가치가 충분한 이 영화는 1997년 제작됐다. 거의 이십년 전 작품이지만 여전히 여론조작과 미디어 정치의 부작용을 다룰 때 언급된다. 제목 ‘왝 더 독’은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주객전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주식시장에서 선물(先物) 거래가 현물(現物) 거래를 뒤흔드는 현상을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는 가짜 현실이 진짜 현실을 압도하는 모습을 빗댄다.

▲ 영화 ‘왝 더 독(Wag The Dog)’
영화를 보고 나면 이런 의문이 든다. 대중은 이토록 무기력한 존재인가, 여론조작은 도대체 어디까지 가능한가? ‘왝 더 독’은 전쟁조차 가짜로 만들어 내는 극단적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대통령의 성추행 사건을 덮기 위해 백악관은 여론조작 전문가와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를 고용한다. 단지 잘 알려지지 않은 국가라는 이유로 알바니아가 ‘적국’으로 선택되고, 배우 지망생이 고통받는 알바니아 소녀로, 복역 중인 범죄자가 전쟁 영웅으로 ‘캐스팅’된다. 테러의 참상은 스튜디오에서 촬영돼 컴퓨터그래픽을 거쳐 TV로 전달된다. 국민들은 테러리스트와 알바니아를 규탄하고, 전쟁 영웅에 열광한다. 미디어는 대통령의 성추행을 은폐하는 도구로 쓰이고, 대중은 기만당한다.

‘최순실’을 숨겨라! 새누리당 버전의 ‘왝 더 독’

2016년 한국사회에서도 ‘왝 더 독’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오장육부’라고까지 불리는 최순실 씨를 숨기기 위해서다. 물론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영화만큼 치밀한 작전을 구사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래도 의지와 간절함만큼은 뒤지지 않는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의혹이 불거지고 여기에 최 씨가 연관된 정황이 일부 드러나자 새누리당은 그를 엄폐(掩蔽)하기 위한 온갖 무리수를 동원했다. 국회의장이 의회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며 국정감사 보이콧에 나서는가 하면, 이정현 당대표는 헌정사상 최초로 여당 대표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명분 없는 단식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비장함은 국민의 비난과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일주일 단식은 최순실로 향하던 대중의 관심을 자신에게 묶어두는 성과를 거두었다.

▲ 방송인 김제동씨가 10월6일 오후 국회 국정감사에서 자신의 영창행 진위 여부를 따진 새누리당에 대해 “날 부른다면 언제든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며 맞불을 놓았다. 사진=고발뉴스 캡쳐
파행 끝에 국정감사가 시작되자 이번에는 방송인 김제동 씨가 애꿎게 걸려들었다. 새누리당 백승주 의원이 김 씨의 과거 토크쇼 발언을 문제 삼아 “군 명예 훼손” 운운하며 억지 논란을 부추기자 김제동 씨는 국정감사의 최대 쟁점 인물로 떠올랐다. 반면 미르와 K스포츠재단 의혹의 핵심 인물인 최순실, 차은택 씨 등은 증인채택에서 빠져나갔다.

앞서 8월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이 물러나게 된 것도 ‘최순실 지키기’였다는 주장이 나온다. 당시에는 우병우 민정수석의 비위 행위를 조사하던 것으로만 알려졌던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미르와 K스포츠재단 의혹을 내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청와대는 그가 조선일보 기자와 통화한 것을 두고 “감찰 내용 유출”, “국기문란”으로 규정해 끝내 물러나게 했다.

시민의 저항, ‘#그런데최순실은?’

이처럼 최근 몇 달간 정부 여당의 납득할 수 없는 무리수 뒤에는 ‘최순실’이라는 인물이 연루돼 있다. 언론이 최 씨의 존재나 그를 둘러싼 온갖 의혹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 권력형 비리 의혹이라는 핵심을 뚫고 들어가려는 언론은 극소수다. 여야 간 공방으로라도 최순실 씨를 언급하면 다행일 정도다. 영화 ‘왝 더 독’ 속 언론이 권력의 여론조작에 속아 넘어갔다면, 현실의 한국 언론은 여론조작 의도를 알면서도 공범 역할을 하는 꼴이다.

결국 권력과 언론의 ‘최순실 숨기기’에 맞서 시민들이 나섰다. SNS에서 벌어지는 ‘그런데 최순실은?’ 해시태그 붙이기 운동. 지난 7일 한 방송사 PD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모든 포스팅 끝에 ‘#그런데최순실은?’을 붙이는 것이다. 네티즌들은 즉각 반응했고, 해시태그는 순식간에 SNS에서 퍼져나갔다.

해시태그 붙이기는 최순실 씨 의혹을 이대로 덮고 가서 안 된다는 진상규명 촉구이자, 여론조작에 속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영화 속의 대중은 무기력했지만, 현실의 시민들은 권력과 언론의 ‘최순실 숨기기’를 꿰뚫어보고 저항에 나섰다. 전통적인 시민운동 조직이 생각하지 못했던 창조적인 방식으로.

새누리당은 다시 ‘문재인 종북몰이’ 카드를 꺼냈다. 진짜 대결은 이제부터다. 잊지 말자 ‘#그런데최순실은?’

※ 이 칼럼은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발행하는 웹진 ‘e-시민과언론’과 공동으로 게재됩니다. -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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