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은 젊은 시절 방갑중이라는 이름의 성실한 외신부 기자였고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고도 들었습니다. 사장님이 당당할 때 권력도 감히 조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겁니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에게 이와 같은 고언을 전한 주인공은 조선일보 기자가 아니다. 현장기자로서 “환갑 진갑 다 지난 나이”에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측근 최순실을 대중 앞으로 끄집어낸 김의겸 한겨레 선임기자다.

김 기자는 지난달 20일 “K스포츠 이사장은 최순실 단골 마사지 센터장”이라는 특종을 통해 입소문으로 떠돌던 박 대통령의 ‘거의 유일한 친구’ 최순실을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내렸다. K스포츠 재단 설립에 최씨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최초 제기하며 ‘최순실 게이트’가 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특종 이후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님께”라는 칼럼을 통해 “20년 이상 차이 나는 후배들과 함께 취재 일선에 나선 건 TV조선이 안겨준 부끄러움 때문”이라며 “한겨레가 한발짝 더 내디딜 수 있었던 건 조선의 선행 보도가 거대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고 밝혀 언론계에 화제를 모았다.

TV조선은 지난 7월 미르·K스포츠 재단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최초 보도했다. 현재 언론 다수가 주목하고 있는 ‘문화계 황태자’ 차은택과 관련해서도 “대통령에게 심야 독대 보고를 한다”는 증언을 보도하며 괄목할 만한 취재력을 보였다.

그러나 TV조선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 송희영 조선일보 주필이 대우조선해양의 호화 접대를 받았다는 주장이 여권에서 제기된 뒤 회사를 나간 이후 청와대와 그 배후를 추적하는 동력을 사실상 상실했다. 청와대와 맞섰다는 이유로 내년 종편 재승인 통과에 ‘먹구름’이 끼었다는 평가가 업계에서 나올 정도로 코너로 몰렸다.

미디어오늘은 특별취재팀을 이끌며 최순실 행적을 추척하고 있는 김 기자를 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김 기자는 “TV조선은 우리가 확보하지 못한 물증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며 TV조선의 후속 보도를 기대했다.

▲ 최순실 보도 특종을 한 김의겸 한겨레 선임기자가 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님께”라는 칼럼이 인상적이었다. 얼마만큼 TV조선 보도의 덕을 본 것인가?

“TV조선이 보도하지 않았다면 미르재단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취재를 해보니 TV조선도 재단 배후에 ‘최순실’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를 보도하지 않았던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TV조선과 의도하지 않게 협업을 한 셈이다.(웃음)”

- TV조선이 (최순실 등과 관련한) 핵심 단서를 갖고 있을 것이라 보는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퍼즐에 비유하면, 전체 그림을 완성하는 데 퍼즐 두세 개가 빠져 있는 상황이다. TV조선이 이미 취재 현장을 다녀갔던 터라 우리가 취재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TV조선에 직접 물어보진 않았으니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확보하지 못한 물증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 조선일보나 TV조선 기자 혹은 관계자로부터 받은 피드백은 없었나?

“전해 들은 이야기는 일부 있지만 직접 들은 건 없었다.”

김 기자가 최순실에 주목하게 된 건 사정당국 고위관계자의 조언 때문이었다. 이 관계자는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에 관심을 보였던 김 기자에게 “그게 본질이 아니”라며 “미르재단을 캐보라”고 했고 이에 김 기자가 관련 취재를 하던 중 ‘몸통이 최순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김 기자는 백기철 한겨레 편집국장에게 “사안이 생각보다 큰 것 같다”며 취재팀 구성을 건의했다. 건의가 받아들여져 지난달부터 취재팀이 가동됐으며 최근 한 명이 합류해 현재는 김 기자를 포함해 기자 4명이 후속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 한겨레 9월29일자 보도.
- 미르·K스포츠 재단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최순실 게이트’로 명명되며 논란이 확산되고 있지만 정작 최순실 입장은 없다. 접촉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인가?

“연락처를 구하는 것도 어렵고 어디에 사는지조차 모른다. 우리가 접촉해보려고 얼마나 노력했겠나?(웃음) 그의 친인척들까지 찾아보고 그랬지만 접촉이 힘들었다. 국내에 있는지도 불투명하다.”

- 최순실은 어떤 사람인가? 취재하면서 알게 된 사실도 있을 텐데?

“자기 능력에 비해 과도하게 일을 벌이는 느낌이다. 차은택은 얼굴을 내밀고 활동하는 반면, 최순실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승마를 포함해 이화여대 학점 및 학칙 개정 등의 문제는 딸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포착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최씨 행적 가운데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미르·K스포츠 재단 역시 마찬가지로 볼 수 있는데, 최근 최순실 보도가 재단 문제로만 쏠리는 측면이 있다. 취재에 비춰보면, 최씨가 여러 국정 현안에 개입하고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과 윤전추 행정관의 청와대 입성에 최순실이 개입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최순실씨가 인사에 개입한 정황은 있지만 이를 물증으로 드러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인사 문제는 몇 사람만 안다. 관련 취재 중이다.”

-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씨와 관련한 의혹에 대해 “비상 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이라고 비난했다. 어떻게 생각했나?

“처음엔 반가웠다.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해명한다면 어디까지 진실인지 분명해지고 후속 취재도 탄력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후 국정감사에서 의혹 제기가 이어지며 국민 관심이 집중됐지만 대통령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언론과 야당으로부터 뺨 한 대 맞았음에도 안 맞은 체하고 있달까. 언제까지나 아닌 척하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 최순실 보도 이후 한겨레나 기자에게 가해지는 압력이나 외압은 없나?

“피부로 느끼는 건 전혀 없다. 다만 법조인들이 그런 조언을 하더라. ‘철저히 확인해서 써라.’, ‘함정을 팔 수도 있다.’ 잘못된 정보를 흘리고 한겨레가 오보를 낸다면 되치기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다 신중히 보도하고자 한다.”

- 언론이 취재하고 싶어도 소스나 제보가 부족해 나아가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우리에게 최순실 개인과 관련한 여러 제보들이 들어오고 있는 건 사실이다. 다소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인데, 본질이 아니라 생각한다. 구중궁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보니 ‘카더라’ 식의 이야기가 많다. 그런 쪽으로 흘러가면 본질을 놓칠 수 있다. 구조적인 문제인데 개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 폐단이 생길 수 있다. 언젠가 취재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조심하려고 한다.”

- 여당은 차은택 등 국정감사 증인 채택을 막으며 의혹을 막는데 주력하고 있다.

“내년 대선 후보 경선이 본격화하고 분화된 여권 세력이 경쟁 체제로 재편되면 다양한 정보와 의견이 자유롭게 표출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설사 이번에 전모가 밝혀지지 않더라도 이 이슈가 다시 점화될 것으로 본다. 다만, 여당에서 새 정보를 폭로한다기보다 이슈를 대하는 자세에 차이를 보이지 않을까? 오늘(10일) 벌써 정병국 의원이 전경련의 미르재단 모금 주도에 문제를 제기했더라.”

새누리당 정병국 의원은 10일 오전 라디오에 출연해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미르·K스포츠 재단’의 모금을 주도한 것에 대해 “비정상적이고 부자연스럽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의심받고 있는 당사자들이 나와서 해명하면 된다”며 청와대를 압박했다.

▲ 지난달 29일자 뉴스타파 보도. 오른쪽 사진은 시사인이 2014년 9월 인천 드림파크 승마경기장에서 열린 제17회 아시아경기대회 승마 마장마술 경기에 참가한 딸을 응원하러 온 최순실씨를 포착해 보도한 사진이다.
-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이 이번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 거라고 보나?

“국정감사를 보면 미르·K스포츠 재단뿐 아니라 우병우 민정수석과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을 둘러싼 논란도 쟁점이다. 한 덩어리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데, 우 수석이 총괄 컨트롤 역할을 하고 있을 거라고 본다.”

- 언론 다수가 미르·K스포츠 재단 의혹 보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걸 보면 집권 세력의 강고함이 임기 말에도 여전한 것 아닌가?

“실제 집권 세력 내부의 균열과 이반의 정도가 크다. 이를 테면, 한겨레가 친기업 언론이 아닌데도 이 문제를 알고 있는 기업 관계자들이 한 마디라도 한겨레에 전하려고 한다. 권력 내부도 마찬가지다. 이 정부를 지탱하는 것으로 보이는 주요 인물들도 그랬다. 청와대 3인방과 최순실씨를 중심으로 한 박 대통령 사적 관계, 이를 통한 국정 운영이 한계점에 봉착한 것이다. 이에 대한 이반 현상이 강하다. 그렇다고 폐단을 깨기 위해 모든 걸 한겨레에 이야기해주는 상황은 아니다.(웃음)”

- 2014년 세계일보가 ‘정윤회 문건’을 보도하며 십상시의 존재를 알렸을 때, 최순실은 언급만 되는 수준이었다. 정윤회 문건과 관련해 다시 주목할 부분이 있나?

“정윤회 문건을 재점검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때는 정윤회씨만 부각됐을 뿐 최순실씨를 간과한 측면이 있다. 정윤회 관점에서 사건을 보다보니 해석되지 못한 영역이 있었던 것이다. 최씨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새롭게 보이는 것이 있을 텐데 아직 여력이 없어서 거기까지 들여다보진 못하고 있다.”

- 전경련은 지난달 30일 미르와 K스포츠 재단을 10월 중 해산하고 문화·체육사업을 아우르는 신규 통합재단 설립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두 재단이 서류를 일제히 파기했다며 ‘증거인멸’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는데?

“당당하지 못한 태도다. 전경련은 한겨레 보도가 오보라며 자료를 내기도 했는데, 우리 보도가 오보면 정정보도를 할 테니 통화 한 번 하자고 문자를 남기기도 했다. 전화는 오지 않았고 문자에 대한 회신도 없었다. 우리가 들은 기업체 관계자들의 증언과 미르재단에서 발견한 파쇄된 문서 등을 봤을 때 증거인멸을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의혹을 틀어막는 데 전경련이 총대를 멘 것 아닌가 싶다.”

방 사장에게 쓴 칼럼에서 언급된 대로 김 기자는 1990년 한겨레에 입사한 “환갑 진갑 다 지난” ‘현장’ 기자다. 사회부, 정치부, 국제부, 정치에디터, 논설위원 등 편집국 곳곳을 거친 베테랑이다. ‘올드보이’가 특종을 터뜨린 사실도 흥미로웠다.

- 연식있는 기자의 특종이라 매체 비평지 입장에선 더욱 흥미로웠다.

“논설위원까지 하고 선임기자에 임명됐다. ‘현장으로 다시 가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충좌돌’이라는 정치칼럼을 써왔는데, 마치 정치판을 다 아는 것처럼 준엄하게 꾸짖는 게 내심 불편했다. ‘너무 거들먹거린다’는 비판을 듣지 않을까 싶었고. 기자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사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게 주 업무 아닌가. 현장에서 취재하고 보도하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때마침 그런 취재거리를 찾은 것이다.(웃음)”

- 취재팀에서도 최고령 아닌가?

“취재팀 막내 방준호 기자와는 23살 차이다. 주로 내가 고공을 취재하고 현장에서 고생하고 부딪히는 역할은 방 기자가 맡는다. 내가 고공취재로 맥을 짚고 스폿을 찾으면 방 기자가 곡괭이로 쳐서 석탄을 캐는 방식이랄까. 실제 석탄이 나왔을 때 느끼는 희열이 있다.”

▲ 최순실 보도 특종을 한 김의겸 한겨레 선임기자가 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후배들이 고생할 것 같은데?

“처음에 팀을 꾸렸을 때 내가 50대였고, 류이근 기자가 40대, 방준호 기자가 30대였다. 류 기자가 ‘최악의 조합’이라며 20년 이상 차이가 나기 때문에 소통이 안 될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최근 하어영 기자도 합류했는데, 팀이 꾸려진 지 벌써 40일째다. 발에 땀나게 돌아다니고 매일 밤 자장면 먹으며 고생하고 있다. 고맙고 미안하고 그렇다. 그런데 앞으로 계속 같이 가야 한다.(웃음)”

- 특종 이후 사내 반응은 어떤가?

“한겨레가 최근 미래팀 등을 신설하며 지면에서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이에 힘 있는 기사가 얹혀야 실험이 더 빛을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는데, 이번 기사가 동반 상승 효과를 낸 것 같다는 의견도 있다.”

- 최순실 보도를 읽는 독자에게 한 말씀 전한다면?

“1987년 민주화를 겪으며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성장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봉건적인 권력 사유화는 만연하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1970년대 사고방식에 갇혀있다. 이 때문에 한국사회는 지난 3년 반 동안 크게 후퇴했다. 미르·K스포츠재단은 폐단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봉건의 정치를 타파하는 데 분수령이 될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정치가 한 발짝 나아가는 데 독자들이 큰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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