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이오. 우리는 300년 전에 이런 배를 만들었던 민족이란 말이오. 믿고 돈을 빌려주시오.”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조선소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들고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을 설득했다는 유명한 일화다. 

거북선은 당시 지폐에서 철갑선으로 묘사됐고 사람들도 그렇게 인식했다. 해군사관학교를 비롯해 거북선 복원모형을 보면 하나 같이 등판이 철로 뒤덮여있기도 하다. 그러나 국내 최초 팩츄얼 사극이라는 KBS ‘임진왜란 1592’에 등장하는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니다. 상판이 철갑에 뒤덮이고 뾰족한 송곳이 붙어 있는 모습이 아닌 나무 판 위에 칼을 꽂은 형태로 등장한다. 어느 쪽이 맞는 걸까. 거북선을 비롯해 ‘임진왜란 1592’속 고증이 사실인지 확인해봤다.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니라고?

거북선은 원형이 남아있지 않아 철갑선인지 아닌지 명확히 판단하기 힘들다. 그러나 다양한 자료를 종합해보면 철갑선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게 오늘날 학계의 중론이다. 우리 기록 어디를 봐도 거북선이 철갑으로 만들어졌다는 설명이 없다.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이분이 쓴 ‘행록’에는 거북선에 대해 “위는 판자로 덮였다. 판상에는 칼과 송곳을 꽂아 사방에 발붙일 곳 없도록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난중일기에서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등에는 쇠못을 꽂았다”고만 표현했다. 즉, ‘임진왜란 1592’의 고증이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왜 철갑선으로 전해져 온 것일까. 선교사 헐버트가 1906년 쓴 ‘대한제국멸망사’를 비롯해 근대 서양인들이 “거북모양의 철갑선”이라고 묘사한 이후 철갑선설이 기정사실화 된 것이다. 그러나 당대가 아닌 후대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봐야 한다.

배를 철갑으로 덮게 되면 전투수행에 차질을 빚게 된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임진왜란1592’와 마찬가지로 거북선은 홀로 돌격해 적을 교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철갑을 두르게 되면 배의 무게가 많이 나가 돌격선 역할을 수행하기 힘들다. 물론, “철갑이 아니라면 일본측의 화공에 쉽게 당하기 때문에 나무 위에 얇은 철판을 둘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선조실록 1596년 12월21일 기록에 따르면 일본 수군이 불화살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고 나와 있어 이 또한 설득력이 떨어진다.

▲ KBS 드라마 '임진왜란 1592'에 등장하는 거북선. 상판을 철갑으로 덮은 거북선이 아니라 나무판에 칼을 꽂은 형태로 나온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있었다

‘임진왜란 1592’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지휘 아래 군관 나대용이 거북선(당시 명칭은 귀선)을 만들었다고 나온다. 영화 ‘명량’이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비밀병기로 묘사된다. 

그러나 거북선은 이전부터 존재했다. 임진왜란 보다 180여년 전인 1413년 태종실록에 따르면 “임금이 임진강을 지나면서 귀선과 왜선이 서로 싸우는 형상을 구경했다”는 기록이 있다. 2년 후인 1415년 태종실록에는 “귀선은 많은 적과 충돌하여도 적이 능히 해치지 못한다”면서 “거북선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무적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난중일기에는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인 1592년 4월12일 “귀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했다”, “귀선의 지현자포(포의 종류)를 쏴보았다”면서 거북선에 대한 첫 기록이 나온다. 이 같은 사실을 종합해보면 이순신 장군은 기존에 있던 거북선의 기능을 발전시켜 전쟁에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장군의 갑옷, 어느 게 맞나

이순신 장군은 볼 때 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광화문의 동상,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영화 ‘명량’, 드라마 ‘임진왜란1592’ 모두 복장이 다르다. 

가장 고증이 잘된 작품은 ‘임진왜란1592’다. 당시 조선군 상급 무관은 주로 천이나 가죽으로 옷을 만들고 그 안에 철판을 고정시킨 갑옷인 두정갑을 입었다. 이순신 장군 역시 두정갑을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 왼쪽부터 영화 '명량'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임진왜란 1592'속 이순신. 모두 갑옷이 다르다.
흔히 이순신 장군의 갑옷으로 많이 알려진 ‘불멸의 이순신’에 나오는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덮인  갑옷 ‘두석린’은 조선 후기 만들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화려한 갑옷이기 때문에 사극에 자주 등장하지면  의장용 갑옷으로 실전에서 착용하지 않기도 했다.

두정갑이나 두석린과 달리 두루마기 옷 모양의 갑옷이 아닌 미늘로 전신을 덮은 영화 명량의 갑옷의 고증은 반만 맞다. 당시 고위 군관들은 찰갑(미늘갑옷)을 입기도 했고, 류성룡의 유물로 전해오는 갑옷도 찰갑이다. 그러나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의 투구와 어깨장식은 조선후기 두석린 갑옷의 모양이고, 허리 장식은 중국풍이다. 즉, 당대의 갑옷에 기반을 두되 상상력을 가미한 게 영화 ‘명량’의 갑옷이다.

▲ 임진왜란 당시 고급 무관의 갑옷. 왼쪽은 찰갑, 중간과 오른쪽은 두정갑.  21세기 이순신연구소 자료.
최악의 갑옷은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입고 있다. 박정희 정권 때 만들어진 이 동상은 제대로 고증이 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옷은 중국풍이고 칼은 일본풍, 투구는 국적불명이기 때문이다. 광화문 동상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던 국회의 이순신 동상은 지난해 철거 후 고증에 맞게 두정갑으로 새로 제작하기도 했다.

▲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왼쪽)과 국회에서 지난해 철거된 이순신 동상(오른쪽)은 중국식 갑옷을 입고 있다. 왼족 사진 출처=포커스뉴스. 오른쪽 사진 출처=SBS 보도화면 갈무리.
다른 수군 지원없이 이순신의 단독출정?

‘임진왜란1592’에서 이순신 장군과 그의 부대인 전라좌수영은 혈혈단신으로 전투에 임한다. 사천해전, 한산도대첩 모두 다른 부대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 1화에서 나대용은 “이 작은 전라좌수영의 수사께서 어찌하여 모든 걸 다 짊어지시려 하십니까? 경상우수사(원균)께선 적의 군세에 눌려 백척의 배에 불을 지르고 1만의 병사를 해산시키셨습니다”라며 이 같은 상황을 부각한다.

그러나 실제 이순신 장군은 사천해전과 한산도대첩에서 아군과 함께 연합함대로 전투에 임한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드라마 1화에 나오는 사천해전에서 원균의 경상우수영 등과 합세해 전투를 치렀고, 2화에 나오는 한산도대첩에서는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함대도 합류해 전라우수영, 전라좌수영, 경상우수영 3군 연합으로 전투를 치렀다.

물론, 이들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과 전라좌수영이 가장 전력이 우수했고,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극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처한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단독출정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자료
<난중일기(민음사)> <이순신의 두얼굴(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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