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는 현재 임시정부기념관이 없습니다. 상해, 충칭 등 중국에는 있습니다. 미디어오늘이 인터뷰한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아들 김정육씨는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부회장으로 일하면서 임시정부기념관을 세우고자 합니다. 부지는 서대문형무소 근처로 잡혀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후원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통해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에 사용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후원하기]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겠죠. 너무 많이 죽었어요.” 영화 ‘암살’(최동훈, 2015)에서 약산 김원봉(조승우 분)이 해방을 맞이하자 백범 김구(김홍파 분)와 술잔을 기울이며 내뱉은 말이다. 둘 사이에는 술잔들이 놓여있었다. 그것들은 독립운동을 하다 세상을 떠난 자들 몫이다.

김원봉은 해방 이후에도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잡혀가야 하는 현실에 괴로워 북으로 갔다. 북에서 고위직을 받았지만 ‘한반도 중립국화’를 주장해 숙청됐다. 남북에서 모두 외면당한 김원봉의 이복동생들은 한국전쟁 중 보도연맹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동료들을 기억하려 했던 김원봉조차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 영화 '암살' 한장면

우리가 잊은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가 있다. 김상덕. 1881년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3·1 운동의 발단이 된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다.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 등의 활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중요한 인물이다. 반민특위 실패와 함께 그의 자취도 잊혔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납북돼 사망했다.

70여년이 지난 지금 더 이상 반민특위 조사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최대한 그들에게 가까운 사람 중 생존자는 김상덕 위원장 아들 김정육씨다. 그의 나이도 올해로 여든 하나다. “광화문 조선일보사 뒤쪽 ○○건물 3층에서 뵙죠” 미디어오늘은 병원 신세에서 잠시 벗어난 그를 지난 3일 만났다.

김씨를 만난 곳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사무실이었다. 도심 한복판이지만 발길이 잘 닿지 않았던 한 골목이었다. 임시정부의 뜻을 기억하는 이들이 그곳에 세 들어 있었다. 존재는 익숙하지만 실체는 낯선, 독립지사와 비슷한 처지였다. 김씨는 이곳에서 뒤틀린 역사의 직립(直立)을 꿈꿨다. 그의 기억과 몇몇 자료를 통해 김상덕의 흔적을 복원해보자.

▲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

도쿄에서 상하이로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1919년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는 한 달 전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2·8 독립선언’이었다. 1917년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던 김상덕은 생활고 탓에 돈을 벌다가 ‘2·8 독립선언’에 유학생 대표로 참여했다.

김상덕·김도연·서춘·이종근·최근우 등 11명이 대표로 참여했다. 이중에는 선언서를 작성한 작가 이광수(와세다대, 훗날 변절)도 있었다. 김씨는 “이 사건으로 아버지가 1년 간 옥살이를 마치고 1920년 2월4일에 출소해 2월5일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임정)에 참여하는데 이 내용이 독립신문에 나온다”고 말했다.

김상덕은 상해임정 시기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활동을 했다. 1922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각국 공산당 연합) 집행위원회가 주최한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혁명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김상덕은 한국 대표로 참여했다. 당시 대부분 참가자들이 코민테른 단체였지만 김상덕은 자신을 무당파라고 표시했다. 특정 이데올로기에 치우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923년 6월2일 김상덕은 김규식·여운형·이청천 등과 조선공화국을 선포하기도 했다. 이는 임정과는 별도의 조직으로 그의 생각을 실현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는 외교론과 실력양성론(지금은 힘이 부족하니 실력을 먼저 키운 뒤 일제와 싸우자)을 중심으로 한 임정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아쉽게도 조선공화국의 활동에 대한 자료는 찾기 어렵다.

밀양사람 약산 김원봉과 투쟁조직 의열단에서 일제와 싸우기도 했다. 만주로 건너간 그는 무력을 통한 독립을 꿈꿨다. 김씨는 “임정이 세가 너무 약했다”며 “만주는 일본과 피를 튀기는 독립운동 혈전장이어서 임정생활을 청산하고 만주로 갔다”고 말했다.

수많은 단체로 찢어진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기 위해 민족유일당 운동의 산파역할도 맡았다. 그의 후덕한 인품이 한몫했다. 그 결과 1935년 7월5일 민족혁명당·신한독립당 등 5개 정당과 의열단 등을 통합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임정 국무위원 7명 중 양기탁·조소앙·김규식 등 5명이 참여한 최대 통합이었다. 같은해 아들 김정육씨가 태어났다.

▲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아들 김정육씨. 사진=장슬기 기자

임시정부의 피난, 서글픈 해방

김씨의 기억은 5살(1939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가 상해를 장악하자 임정은 장개석 정부의 수도였던 남경으로 옮겼다. “호가화원이란 곳에 들어가 살았어요. 화원이라고 해서 꽃집인 건 아니고, 큰 농장입니다. 어머니가 1933년에 누나를 낳고, 35년에 저를 낳았죠. 37년에 막내 영이를 낳고 피난길에 올랐고요.”

일제는 자작으로 벌인 발포사건인 노구교 사건(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국군을 공격했다. 김씨 가족은 남경까지 피난을 떠난다. 임정도 남경으로 옮겼다. “남안(양자강 남쪽) 손가화원에 민혁당(민족혁명당) 간부들이 거처했어요. 아버지, 김규식, 윤기석 이런 분들이 같이 살았어요. 어머니는 도착하자마자 쓰러지셨는데 그 길로 회복을 못하셨죠.”

1945년 8월15일 일제가 물러갔지만 임정은 환영받지 못했다. “이 박사(이승만)가 귀국하기 전에 임정보다 먼저 들어와야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동경에 맥아더 사령부를 찾았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유추할 수 있죠. 이승만은 특별기를 타고 귀국했는데 미군 비행기로 한국에 가기로 한 임정에는 비행기가 안 오는 거예요.”

임정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문화부장 김상덕 등은 45년 11월23일에야 1진으로 귀국했다. 나머지 요원들은 더 늦게 귀국했다. “(시간) 질질 끌어서 보낸 거 김 뺀 거죠. 김포공항에 입국하자마자 장갑차에 태워서 아무도 모르게 경교장으로 바로 들어왔어요.” 미 군정은 이승만과 더 가까웠다.

임정 요인들은 귀국 후 각 지역 대표를 선발했다. “아버지는 경상도 쪽을 맡았어요” 미 군정은 1946년 5월8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김규식(우)·여운형(좌) 등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조선 인민이 요구하는 법을 그들 손으로 제정한다’는 원칙하에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을 설치했다.

입법의원은 1946년 12월12일 개원해 1948년 5월10일 총선거 후 제헌국회가 성립될 때까지 33건의 법률을 심의했다. 김규식이 의장으로 있던 입법의원에 김상덕은 관선의원으로 선출돼 정치를 시작했다. 둘은 임정시절부터 가까웠다. “한 번씩 (임정에) 가면 (아버지가) 김규식 박사에 제일 먼저 인사드렸고, 두 분 관계가 상당히 돈독했던 걸로 알고 있어요.”

▲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5·10 총선거에서 김상덕은 고향인 경북 고령에 출마해 당선됐다. 제헌국회는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했고, 현역 국회의원을 조사위원으로 선출했다. 이 때 김상덕이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민중을 볼모로 일제에 부역해 개인의 영달을 꿈꿨던 이들은 전방위에서 김상덕 위원장을 압박했다.

“이 박사가 아버지를 경무대에 불러요. ‘살살하자’는 거죠. 아버지가 ‘그렇게 할 수 없는 거 아니냐’고 답하면 이 박사는 ‘반민특위 안에도 친일파 있는 거 아니냐, 그거 놔두고 정부만 괴롭히느냐’고 해요. 김상돈 부위원장 말하는 거예요. 일제 때 통대(반장, 하급관리)를 했거든요. 반민법 대상자도 아닌데 고집피우는 거죠.”

김씨에 따르면 김상돈 부위원장은 상대적으로 원칙주의자였고, 아버지 김상덕 위원장은 성품이 온건하고 원만했기 때문에 이승만이 아버지를 회유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이승만의 ‘6월 공세’(국회프락치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김구 암살) 직전 분위기를 기억했다. 1949년 5월말 이승만이 김씨의 집에 직접 방문했기 때문이다.

“반민특위 위원장 관사가 (중구) 필동3가에 있었는데 집으로 전화가 한 통 왔어요. 이 박사(이승만)가 ‘밤에 조용히 찾아갈 테니 (아버지에게) 집에 있어라’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어요. 아버지가 우릴 급히 불러다 ‘지금 볼일 빨리 보고 각자 방에 들어가서 내가 부를 때까지 꼼짝 말고 있어라’ 했어요.”

김상덕 위원장을 경무대로 부르던 이승만이 위원장의 집을 찾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박사가 오기 전에 경무대 경호팀이 우리집(위원장 관사)에 쫙 깔렸어요. 건물 안팎으로. 아버지 경호원 4명 있었어요. 경위 1명은 권총, 경사하고 순경 둘은 카빈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다 쫓아내더라고요.”

이승만과 김상덕 간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아버지의 비서 송지홍을 통해 들었다. “아버지 표정이 기억이 나요. 화가 상당히 많이 나있었죠. 나중에 들은 얘긴데 이 박사가 최후 담판하러 온 거였어요. 아버지한테 감투를 놓고 흥정을 한 거죠. (반민 피의자) 대충 (조사)해서 내보내고 정부로 들어와라, 어떤 장관 할래. 이거였죠.”

김씨에 따르면 김상덕 위원장은 당시 “임정 초기 대통령까지 했던 이승만은 ‘악질경찰’들이 독립운동가에게 전기고문, 고춧가루 고문 등 갖은 악행을 해서 죽였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분노했다. 김 위원장은 친일경찰 노덕술 등이 고용한 테러리스트 백민태의 암살음모 사건 등에서 이미 암살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반민특위에 수배된 친일경찰 노덕술을 내무부장관 윤치영이 집에 숨겨줄 정도로 분위기는 스산했다.

▲ 반민특위 재판모습

이승만이 김 위원장을 회유하는데 실패하자 ‘6월 공세’가 시작됐다. “제헌국회 소장파 의원들은 무소속 구락부라는 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농지개혁 소작권 보장, 국가보안법 개정 등 높은 수준의 정책들을 내놨어요. 이 박사보다 한걸음 앞서니 이 박사 눈에는 전부 괘씸죄에 걸린 거죠. 이 박사가 ‘이 사람 안 되겠네’하면 밑에서 알아서 다 제거하는 거죠. 이 박사가 시킨 것이면서 이 박사가 시킨 게 아니죠.”

이승만은 1949년 6월6일 반민특위 습격사건에 대해 자신이 “직접 지시했다”고 밝히는 등 속내를 과감하게 드러냈다. 김상덕 위원장을 포함해 조사위원들은 일괄 사표를 내면서 반민특위는 허울만 남았다. 후임 위원장으로 들어온 이인은 반민특위를 마무리하고 법무부장관에 임명됐다.

김씨는 이승만과 친일관료가 결탁한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 박사는 국방의 기술, 반공의 기술, 치안의 기술자로서 친일파가 필요하다고 명분을 세웠는데 거짓말입니다. 그런 인재가 필요했다면 당연히 이들보다 고도의 기술 경력이 있는 고위 장성급 경력자도 중용해야 하지만 관록 있어 다루기 어렵고, 거추장스러운 고위급은 등용하지 않거나 한직으로 치워버렸죠.

반공의 기술? 일제는 이미 공산세력을 완전 제거하고 씨를 말려서 반공기술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어요. 치안기술도 그렇죠. 독립운동 각 단체에서 조국에 해악을 끼치는 일제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지하에서 암약했고, 일제 최고 정략가 이토 히로부미도 저격했어요. 일제에 이용당한 주구(走狗)는 해방 후 죽은 목숨이었으니 이승만에게 한 몸 다 바쳐 충성하는 것은 쉽게 나오는 계산이죠.”

선명하지 않은 죽음

위원장 사퇴 1년이 채 안 돼 한국전쟁이 터졌다. 김상덕은 전쟁 통에 납북됐다. “인민군 치하 때입니다. 당시 조사관을 지낸 심륜씨가 우리 집에서 기거했는데 심씨가 전쟁 직전에 권총 오발로 관통상을 입었어요. 헌병 장교인데 총상까지 입었으니 전투장교라고 해서 (인민군에게) 잡히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심씨가 권총을 집에 숨겨놨나 봐요.”

권총과 김상덕의 납북이 무슨 관계일까? “심씨가 피신할 때 우리가 총을 달라고 했죠.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심씨는 ‘잘 감췄으니 걱정말라’고만 했는데 어느날 인민군들이 와서 수색하다 응접실 밑에서 권총을 발견했어요. 일본도도 하나 나왔고요.” 김상덕은 인민군에게 오해를 샀고, 내무서에서 사람들이 지프 차에 김상덕을 태워갔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다.

신동아 1990년 8월호에 따르면 김상덕은 납북된 이후 조소앙이 1958년 간첩혐의와 반당·반정부 혐의로 처형당했는데 김상덕과 엄항섭, 국회 프락치 사건의 김약수·이문원 등도 연루돼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당국은 김상덕, 김약수 등 63명의 유해를 평양시 룡성구역 룡궁1동 재북인사 묘역에 안치했다. 묘비에 따르면 김상덕은 1956년 4월28일 사망했다.

패자에게는 추모와 기억마저 관대하지 않다. 김상덕은 이름조차 낯선 사람이 됐다. 일생을 조국에 헌신한 김상덕을 기억할 공간도, 시간도 조국엔 존재하지 않는다. 1990년이 돼서야 김상덕은 ‘건국훈장독립장’을 받았다. 이는 ‘대한민국장’-‘대통령장’에 이어 3등급에 불과하다. 반전 없는 시간이 반복되고 있다.

“친일파 잡겠다는데 빨갱이로 몰아”

반민특위 조사관 김철호의 의문의 죽음

반민특위 경남조사관으로 활약한 김철호(1901~1950) 선생. 그의 죽음도 선명하지 않다. 반민특위가 와해된 뒤 김철호가 머물던 그의 고향 통영에는 한국전쟁 당시 끔찍한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아들 김용민씨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기억했다. “건장한 사내 7~8명이 들이닥쳐서 아버지를 끌어갔습니다. ‘이승만 앞잡이’라며” 동네 이곳저곳에선 아버지가 통영 앞바다에 수장됐다는 소문이 들렸다.

한국일보 전 논설위원 이승호의 회고록 ‘대지에 비가 내린다’에 따르면 반민특위 경남 부위원장이었던 김철호는 어느날 권총을 차고 부산에 숨어사는 친일파 서병두를 찾았다. 서병두는 책상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친구야(둘은 통영초등학교 동창) 처자식을 생각해 한번만 살려줘’라고 했다. 서병두를 살려준 김철호는 전쟁 때 지방의 친일출신들이 빨갱이로 몰아 비명에 갔다고 전해진다.

친일파를 잡던 김철호는 친일파에게 당한 걸까? 좌익이라기 보단 우익에 가까웠던 김철호를 빨갱이로 몰아 처형한 것은 친일파가 애국자로 거듭나는 전략이었다. 아들 김용민씨는 “전쟁 당시 통영과 거제 일대에 1600여명이 살았는데 보도연맹에 연루됐다는 명목으로 인구의 절반인 800여명이 살해됐다”며 “아버지도 이런 흐름에서 희생됐다”고 말했다.

김철호는 1925년 중국으로 떠나 광둥 중산대학에서 장지락(님 웨일즈 ‘아리랑’에 기록된 김산) 등과 함께 공부했고 1929년 ‘의열단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의열단 선전출판부 책임자, 해방 후 반민특위 조사관으로 일한 뒤 경찰서장 자리까지 제안받았지만 “해방이 됐는데 왜 조선 사람을 가둬야 하느냐”며 고사했던 인물이다.

※ 참고문헌

김삼웅, 김상덕 평전
‘민족21’ 2003년 7월호


<반민특위 재구성> 연재목차

1. 세월호 특조위와 반민특위

2. 국부 이승만의 반민특위 방해공작

3.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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