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어느 땐데… 이적표현물 문제삼아 압수수색
때가 어느 땐데… 이적표현물 문제삼아 압수수색
'노동자의 책' 사이트 운영자에 국가보안법 적용… 막심 고리키 책에 철도노조 내부 문건까지 압수

불온서적을 빌미로 한 ‘공안탄압 수사’가 또다시 도마에 올랐다. 사회주의 사상, 북한 관련 서적을 소장·공유하는 한 온라인 사이트 운영자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면서다. 노동조합 내부 문서까지 이적표현물로 압수돼 오는 9월 양대노총 총파업을 앞두고 노동운동 위축효과를 노린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서울경찰청 보안수사4대 소속 보안수사팀은 지난달 28일 진보적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사이트 ‘노동자의 책’ 운영자 이진영씨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경찰은 이씨가 소장한 책 107권, 컴퓨터 하드디스크 4개, USB, 스마트폰 등에 소장된 전자파일 3400여 개와 스캐너를 임의 압수했다.

노동자의 책은 사회주의 사상, 노동운동 등 사회변혁 담론을 다룬 서적을 소장하고 이를 회원들과 공유하는 사이트다. 회원은 1300여 명이며 현재 3767권의 서적과 2914권의 PDF 도서를 보유하고 있다. 노동자의 책은 “비판적·변혁적 사상을 고민하는 이들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필요한 자료나 정보를 손쉽게 얻고 교환할 수 있는 베이스캠프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고 취지를 밝히고 있다.

경찰은 국가보안법 제7조 1항과 5항을 위반한 찬양·고무 및 이적표현물 소지·배포 혐의를 적용했다. 국보법 제7조 1항은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자를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5항은 반국가단체를 찬양·고무할 목적의 표현물에 대한 제작·수입·소지·운반·배포를 금지한다.

▲ 2002년부터 운영돼 온 노동자의 책 홈페이지. 운영자는 남북관계, 노동운동, 사회주의 사상 등 사회변혁적 담론을 다루는 서적을 모아 회원들과 공유한다. 사진=노동자의 책 홈페이지 캡쳐.
이씨에 따르면 경찰이 압수하려는 물품 목록에는 ‘노동자의 책’이 보유한 북한 소설 대부분과 북한에서 저술된 서적, 김일성·주체사상·통일운동 등 서적 59권이 포함됐다. 구체성의 변증법 등 사회주의 사상이나 노동운동을 다룬 서적도 포함돼있다.

압수수색 당시 영장이 발부된 서적을 찾지 못한 경찰은 임의로 107권의 서적 및 문건을 압수해갔다. 여기엔 ‘제국주의론’, ‘무엇을 할 것인가’, ‘러시아혁명사’, ‘막심고리키의 어머니’ 등 공공도서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서적이 다수 포함됐다.

경찰은 ‘현대중공업 노개투평가 97년 4월초’, ‘노조결성에서 승리까지’ 등 현대중공업 노동조합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작성한 문건도 ‘이적표현물’로 간주해 압수했다. ‘2016년 전국철도노동조합 대의원대회’, ‘2016년 임시대의원대회 보고자료’, ‘조합비 인상 기만이다’ 등 전국철도노동조합 내부 문건도 같은 이유로 임의 압수됐다.

경찰은 이씨가 해당 도서를 온라인 중고거래 사이트를 통해 매매한 점에 대해서도 이적표현물 배포로 간주해 조사했다.

압수된 물품을 볼 때 경찰의 국보법 위반 적용은 논란에 휩싸일 것으로 보인다. 북한 작가의 저작이라거나 사회주의, 공산주의, 주체사상 등의 이념을 다뤘다는 이유로 이적표현물로 간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해당 자료가 법적으로 ‘이적표현물’로 규정된다 하더라도 소지·배포가 이적행위, 국가전복행위 등으로 간주될 지도 논란이다. 지난해 11월10일 대법원은 한국전쟁 시 북침을 주장하는 북한의 주장과 북한의 주체사상을 옹호하고 로동신문 기사 내용을 게시한 한 블로그 운영자에 대해 “국가의 존립·안전 등을 위태롭게 할 목적으로 한 것이거나 그럴 가능성이 없었다면 국가보안법 위반이 아니”라고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이씨는 “주체사상을 비판한 도서까지 압수 대상에 올랐다. 같은 도서를 가지고 있는 학생, 교수, 도서관도 다 국가보안법 위반이냐”면서 “사상, 학문, 양심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다. (노동자의 책에) 올린 책 대부분이 사회주의 운동, 사회변혁과 관련됐다는 점에서 노동운동을 탄압하려는 의도도 느껴진다”고 반발했다.

압수수색 시점과 철도노조 등 노동조합의 내부 문건이 압수된 사실에 대해 이씨는 “9월 총파업을 염두에 두고 위축 효과를 내기 위해 공안탄압하는 게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 경찰의 압수수색 물품 목록에는 북한 소설이 다수 포함돼있다. 위는 노동자의 책이 소장한 북한 소설의 일부. 사진=노동자의 책 홈페이지 캡쳐
지난 2002년 개설된 노동자의 책은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정기관으로부터 국가보안법 혐의를 적용받은 적이 없다. 이씨가 운영권을 넘겨받은 지도 6년이 넘은 시점이다.

경찰이 이씨에게 제시한 압수수색영장에는 이씨가 과거 국보법 위반으로 두 차례 실형을 받은 과거 전력이 강조돼 있다. 이씨는 1990년대 당시 ‘혁명적 국제사회주의 노동자 동맹’ 구성원으로서 이적단체 결성 및 활동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씨의 노동자의 책 운영과 이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 간에 인과관계는 입증된 바 없다.

철도노조 문건이 이적표현물로 압수된 데 대해 이씨는 “해당 문건은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퇴출연봉제(성과연봉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논의한 것이었다”면서 “도서 사이트에 국한된 탄압이 아니라 9월 퇴출연봉제를 앞둔 시기를 골라 노동운동 탄압에 나선 것”이라 비판했다.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서울경찰청 보안수사대 보안수사4팀 관계자는 "과거 법원에서 이적표현물로 판결받은 서적들이 노동자의 책 사이트에 있어 수사가 진행되는 것"이라며 "(철도노조 문건 압수는) 이씨가 철도노조에서 죽 활동해왔기 때문에 무슨 생각으로 (위반 혐의를) 했는지 등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이씨의 기소 여부는 보안수사대의 수사가 끝나면 결정될 예정이다.

이 기사를 후원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