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2015년 한 해 동안 반대에 부딪힌 정부 사업을 홍보하거나 일회성 행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예비비 약 271억원을 마음대로 꺼내 쓴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예비비가 배정되기도 전에 신문 방송 등에 먼저 광고를 집행(원인지출행위)하는 등 법 규정에 위배되는 행위도 문제로 지적됐다. 

지난 1일 정의당 정책위원회와 추혜선 의원실이 집계한 결과 정부가 지난해 역사 교과서 국정화·노동법 개정·서비스 산업 발전 기본법 등 홍보와 광복 70주년 기념 사업 행사 등에 총 271억원 가량의 예비비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예비비는 쌈짓돈? 황교안 전세기 대여 3억도 예비비로)

예비비는 국가재정법 제22조1항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예산 외 지출 또는 예산 초과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사용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국회는 예비비 편성 기준으로 △예산 편성 당시의 예측 불가능성 △다음연도 예산편성을 기다리기 어려울 정도의 시급성 △확정된 예산 규모를 벗어나 지출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 등을 모두 만족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기준을 제시한다. 

▲ 박근혜 정부가 2015 회계연도 예비비에서 꺼내다 쓴 홍보 및 일회성 행사 관련 지출 현황.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이례적으로 예비비에서 홍보·행사 비용으로 300억원을 책정하고 이 중 271억원을 사용했다. 고용노동부는 ‘노동악법’ 비판을 받았던 노동법 개정 홍보 예산을 예비비에서 집행했다. 이 금액은 총 53억8700만원으로 노동부는 지난해 2300만원을 불용처리하고 홍보비로 모두 사용했다.

특히 노동부는 예비비 배정이 확정되기도 전에 신문·방송에 광고 홍보 먼저 내보내 법을 위반했다는 지적도 받는다. 국가재정법 제51조에 따르면 예비비는 각 부처 장관이 편성한 후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 승인을 받아 배정하는 절차를 거치게 돼있으나 노동부는 세 차례 예비비를 배정 받는 과정에서 이를 모두 위반했다. 

실제 경향신문 등 신문 25개 매체(5억216만원)와 KBS 등 10개 방송사(6억7760만원)가 ‘노동개혁은 우리 아들과 딸의 일자리입니다’라는 광고를 각각 3월19~23일과 3월23~31일에 나눠 내보냈다. 해당 홍보를 위해 노동부에 예비비가 배정된 것은 광고 홍보가 집행된 지 10여일이 지난 4월2일이었다.

2차 예비비 사용 역시 노동부에 30억이 배정된 8월22일이 전에 집행됐다. ‘노동개혁은 우리 아들과 딸의 일자리입니다’ 편의 광고는 중앙일보 등 일간지와 경제지 22개 매체에 8월11~13일, 조선닷컴 등 주요 온라인 매체 40개 사에 8월13일부터 광고가 시작된 것이다.

KBS·MBC·SBS 등 지상파 3사나 서울메트로 2호선, 아파트 엘리베이터 모니터 등에 광고가 시작된 날은 모두 2차 예비비가 배정(8월22일)되기 전인 8월19~21일이었다. 9억9000만원 마지막 예비비가 배정된 12월28일 이후 나온 광고는 서울·경기권 버스에 추가된 옥외광고 ‘노동개혁 입법을 응원합니다’편 딱 나흘치였다. 이 마저도 시작은 12월15일부터 시작된 사업이었다. 

노동법 개정과 함께 박근혜 대통령의 관심 사업이던 서비스산업 발전 기본법 홍보에도 예비비가 투입됐다. 기획재정부는 11억2000만원을 예비비에서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11억1930만원을 거의 꽉 채워 사용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산업구조 고도화 정책 홍보를 위해 11억2000만원을 꺼내 기재부와 마찬가지로 11억1930만원을 집행했다. 기재부와 산자부는 각각 69만원 가량을 불용처리하는 데 그쳤다.

산자부는 또 한중FTA 비준안 홍보를 위해 두 차례 걸쳐 총 51억5400만원을 예비비에서 꺼내 썼다. 한중FTA는 지난해 중국의 요구에 밀려 체결됐다는 의혹이 제기됐으며 실효성을 의심 받았다.

▲ 지난해 3월15일부터 22일까지 전국 단위 종합 일간지와 경제지 등에 선집행된 역사 교과서 국정화 광고.

교육부는 지난해 추진된 역사 교과서 국정화 국면에서 개발 및 홍보 사업에 43억8780만원을 예비비에서 꺼내 집행했다. 이중 26억9606만원을 지난해 지출했고 16억8761만원을 이월했다. 

정부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행사에도 예비비를 지출했다. 국무조정실과 미래창조과학부, 문화재청, 국가보훈처,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자치부는 지난해 광복70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면서 추진기획단 운영이나 관련 행사에 총 120억3327만원을 책정해 예비비를 사용했다.

통일부 산하 통일준비위원회는 광복 70주년을 계기로 한 ‘세계평화회의’ 개최 경비 9억9000만원을 편성해 7억1600만원을 집행했다. 통일부는 행사 자체에 대한 대통령 보고가 늦게 이뤄져 예비비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광복 70주년 기념 행사’ 사업비는 다른 부처는 일반회계에 포함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일반회계에 반영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무조정실과 통일부 등이 예비비에서 손쉽게 사용했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결산특위 곳곳 “예비비 사용 감사해야”

예비비 사용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심사에서 단골로 지적됐다. 헌법과 국가재정법에 따라 사용 내용을 엄격하게 정하고 있음에도 정부가 이를 무시하고 예비비를 자의적으로 집행했다는 지적이다. 특히 논란이 됐던 법안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홍보에 예비비를 사용함으로써 국회의 심의권 자체를 훼손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김광수 국민의당 의원은 지난 12일 예결특위 전체 회의에 참석해 “예비비에서 국정 홍보를 위한 홍보비를 집행하는 것이 (법에) 맞느냐”고 질타했다. 

▲ 지난해 10월17~18일 미디어오늘과 에스티아이가 한 여론조사 결과(맨 왼쪽 그래프 그룹). 정부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여론을 전환하기 위해 수차례 광고를 집행했으나 여론은 국정 교과서 반대 쪽으로 기울었다. 

김종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역사 교과서 개발 및 홍보, 서비스 발전기본법 정책 홍보, 노동관계법 정책 홍보, 기업 활력제고 특별법 정책 홍보 등 101억원 정도가 예비비에서 책정됐다”며 “장관이 불가피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대통령 관심 사항에 대한 홍보비였다”고 비판했다.

김성식 국민의당 정책위의장은 “예비비에 대해 상임위에서부터 말이 좀 많았다”며 “시급성·예측 불가능성을 중심으로 집행돼야 할 예비비를 몇 년 전부터 계속 논란이 된 법안 홍보비로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위성곤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3일 예결특위에서 노동법 개정 홍보에 예비비를 집행한 것과 관련해 “본예산 31억700만원보다 예비비 배정액이 22억원 더 많다”며 “국회 입법권을 넘어서는 행위이며 국회의 예산심의권, 예산의결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고 지적하며 감사원에 감사를 촉구했다.

김경협 더민주 의원은 “정당하지 않은 사업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또는 문제가 있는 법안을 인위적으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과다한 홍보비를 지출하게 된 것”이라며 “허풍과 과장광고를 하기 위해 국민 세금을 그것도 국가재정법상 취지에 어긋나게 예비비를 끌어들여 과다하게 홍보를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예비비에서 300억 가까운 예산을 홍보에 집행한 사례는 최근 5년 내 박근혜 정부에서도 이례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정의당 정책위원회와 추혜선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2013년 15억원 사용을 제외하면 예비비에서 홍보·행사성 사업에 사용한 사례는 전무했다.

추혜선 의원은 2일 “예비비는 사용해야 할 용도가 법으로 명확히 규정돼 있어 국민적 합의도 안된 노동악법 홍보비로 예비비를 쓰는 것은 명백한 법률위반”이라며 “세금을 주머니 쌈짓돈처럼 쓰는 정부가 이번엔 추경을 편성하고 추경은 타이밍이라며 조속한 심사를 압박하고 있다. 정부는 우선 예산집행의 엄정성부터 입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정부 예비비를 총괄하는 유일호 기획재정부 장관은 예결특위 전체회의에 참석해 국회의원들의 예비비 사용 비판에 “예비비는 사전에 예측하지 못한 경우에도 쓰는 것인데 홍보도 그런 경우다 있을 수 있다”, “각각의 겨우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해 신속히 처리한다고 그렇게(예비비를 집행)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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