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옥님의 기고 '메갈리안 해고 논란? 이건 여성혐오의 문제가 아닙니다'와 관련, 독자 이선영님이 '남성혐오라고요? 남 탓할 때가 아닙니다'라는 반박 기고를 보내주셨습니다. 여기에 다시 박성호님이 의견을 보내주셨습니다. 미디어오늘은 논의의 확산과 발전을 위해 반론 기고를 환영합니다. - 편집자주.


과연 2016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한국을 포함한 인류가 어떤 식으로 사회 유기적인 존재로써 진화해왔는지를 살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부 유의미할 수 있다고 치더라고 그렇게나 오래 지난 과거의 예를 끌어 모아 2016년의 현실의 잣대로 들이 대는 게 과연 어느 정도나 맞는 것일까.

인류는 여태껏 진화해왔던 수 천 년의 역사보다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훨씬 많은 진보를 이뤄왔고 그 시간들은 갈수록 단축 되고 있다. 기술 정보 발달에 따라서 20세기의 1년보다 21세기의 1년은 더 많은 것들로 채워지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나 오래된 예들을 끌고 와서 2016년 한국 사회를 설명하겠다고? 그것이 가능키나 한가?

2016년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과거의 가치관들 끌어와 현재에 끼워 맞추려는 억지 주장들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비단 나 개인의 선입견이 아니며 미디어오늘의 메갈리아 관련 기사와 이선영 투고 글 곳곳에서 발견 된다.

당신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약자다. 그리고 남성은 강자다. 그러므로 메갈리아로 뭉친 여성 일부가 내뱉는 파괴적인 언어는 혐오의 언어가 될 수 없다. 혐오란 강자가 약자에게 내 뱉는말에 가깝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아래 예들을 보자. 

첫째, 미디어 오늘을 포함한 진보 언론 여성 기자 3명이 자신들의 주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신문사의 지면과 공식 계정 그리고 연계하고 있는 타 신문사 기자들과 정보와 기사를 공유하고 관련 기사를 싣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에 비해서 몇몇 진보 카페에서 댓글이나 달고 SNS에서 저항하는 진보 남성들의 목소리는 약자일 수 밖에 없다.

비록 숫자가 다수를 점할 지라도 어쨌거나 그들은 진보언론 기자들보다 더 전문적이지도 그렇다고 기사를 쓰고 정보를 분석함에 있어서 능숙하지도 않다.

진보언론 여성기자들과 연계된 소위 말하는 식자층, 사회 전반의 전문가 집단이 진보 남성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배제하거나 왜곡함으로써 그들의 말과 주장은 한층 커질 것이다.

이 경우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일까? 강자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진보 언론 여성 기자 3명이다.

두 번째 예. 한국처럼 주택비용으로 생활비의 비중이 높은 나라에서 임대인은 세입자를 압도할 권력을 갖고 있다.

4050대 여성 임대인이 있다고 치자.이럴 경우 세입자 2030대 남성은 약자이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건 말건 상관없이 말이다.자영업자와 원룸 수요가 많은 서울 수도권의 경우 위와 같은 상황은 더더욱 심각할 것이다.

세 번째 예.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에서 남성인 항공사 사무장인 여성 부사장에게 반말과 폭언 등을 당하고 출발하는 항공기에서 내려야 했던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건이다. 이 경우 금수저로 태어난 조현아 부사장은 흙수저로 태어난 박창진 사무장보다 강자이다. 사회적으로 남성 지위가 높다고 해도 개인으로써는 남성 부기장이 여성인 조현아에게 지는 것이다.

위 예들에서 보듯이 태어날 때부터 흙수저를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거나, 게이 같은 성소수자 이거나, 장애인으로 태어났다거나 지능이 일반인에 미치지 못한 다거나 등등. 사회적인 강자로써의 남성일지라도 개개인의 경우에 약자인 남성은 나이와 지역 단체를 떠나서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따라서 사회적인 약자인 여성이 현실에서의 갈등 상황에서도 언제나 약자일 것이라는 전제. 그 전제하에서 개인들끼리의 분쟁에서 여성이 항상 약자일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가 어렵다.

위와 같은 이유로 미디어오늘에 실린 이선영의 글은 그런 면에서 차라리 궤변에 가깝다.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한국 사회는 전통적인 가치관이나, 사회 전체의 이익이나 목적을 향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대신에 개별적인 주체로써의 개인주의 형태로 빠르게 진화해 가고 있다. 개인 간 갈등도 경제력. 학력. 직업에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고, 혼밥. 원룸 수요폭등. 그 외에 이 사회가 개인 분화의 형태로 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할 단어는 많다.

결론. 그래서 나는 이선영의 투고 글이나 메갈리즘에 동의하는 그 어떤 진보언론 기자의 글에도 동의 할 수 없다. 개인주의 형태로 빠르게 분화되고 있는 2016년의 한국 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권위주의 시대의 남성상을 끌어와 ‘한국 남성은 다 그렇다’라는 편파 왜곡된 주장들. 사회적인 남성의 지위와 각각 개별적인 상황 속에서의 남성의 지위를 혼동하는 글에서는 메갈리안 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진보언론 기자들의 수준이 과연 이 정도 밖에는 안 되는가. 편파왜곡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건 보수언론뿐 아니라 진보언론 기자들도 마찬가지이지 않는가 하는 진보언론 자체에 대한 회의마저 든다.

"의심하지 않는 기자"라는 기사를 미디어오늘에서 본 기억이 있다.

저 기사에 미디어오늘과 미디어오늘에 투고한 이선영은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전제부터가 잘못된 글로 남을 비판하는 게 가능이나 한지 말이다. 이선옥 작가는 최초 기고 글에서 공론의 장이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두 번째 기고문을 작성한 이선영은 그걸 비관적으로 본 것이고 나는 적어도 이 부분에서 만큼은 이선영과 의견을 같이 한다. 적어도 공론의 장이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 말이다. 전제가 오류투성이인 글들에서 어떤 유의미한 걸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오류를 전제로 같은 주장만 반복하는 메갈리안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진보언론 기자들과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이나 하겠느냐 말이다.

두 번째 기고문 작성자인 이선영과는 다른 지점에서, 그래서 나는 이번 논쟁이 서로 대화 가능한 공론의 장이 마련될지에 대해서 아주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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