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김시곤 녹취록’ 파문 이후 KBS가 청와대 보도개입 사태에 침묵하는 보도국을 비판한 기자를 지역 발령 내는 등 사측의 강경 대응에 기자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다. 

급기야 KBS 보도본부 국부장단 31명은 18일 ‘이정현 녹취록’과 보복성 부당인사 논란 등에 대해 사측을 대변하는 성명을 내고 “KBS 기자 스스로가 우리 뉴스를 폄훼하는 것은 자신이 마시는 우물에 침을 뱉고 돌을 던지는 행위”라며 자사 기자들의 비판적 목소리마저 옥죄는 모양새다. 

이들은 “‘이정현 녹취록’ 논란을 두고 말들이 많지만 그 본질은 KBS 9시 뉴스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당시 이정현 홍보수석의 협조 요청에도 해경 관련 뉴스는 9시 뉴스 큐시트에서 빠지지 않았고 그대로 방송됐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은 지난 2014년 6월 부당한 보도·편성개입 등으로 해임됐던 길환영 전 KBS 사장이 늘어놨던 변명과 비슷한 논리다. 

KBS 기자협회가 세월호 참사 이후 2014년 5월 작성한 ‘청와대·길환영 사장 보도개입 의혹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길 전 사장은 청와대의 세월호 사건 해경 비판 자제 지시 의혹과 관련해 “5월5일 보도본부장실에서 (해경 비판 자제) 지시를 한 것은 맞다”면서도 “그러나 유족들과 여러 곳에서 나온 의견을 단순히 전달한 것이고 해경 비판 보도는 정상적으로 잘 나갔다”고 해명했다. 

길환영 전 KBS 사장이 2014년 5월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세월호 발언 논란과 관련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사과한 뒤 굳은 표정으로 현장을 떠나고 있다. ⓒ 연합뉴스
당시에도 김시곤 전 보도국장은 ‘이정현 녹취록’에서 드러난 것처럼 “청와대에서 해경을 비난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며 “사장이 본부장실을 방문해 해경에 대한 비판은 하지 말아 달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 결과 해경 비판 보도가 상당히 완화돼서 나갔다”고 말했다.

보고서를 보면 세월호 참사 이후 5월5일 길 전 사장은 직접 보도본부장실로 찾아와 보도본부장과 보도국장, 취재·편집주간 등을 배석시킨 후 해경 비판을 자제할 것을 지시했다. 

김 전 국장은 “이미 청와대에서 한 차례 같은 요청의 전화가 걸려왔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사장을 통해 재차 지시가 내려왔다”며 “사장의 지시 결과 해경을 비판하는 리포트 내용이 대폭 수정됐다”고 밝혔다. 

실제로 5일 예정돼 있던 KBS 뉴스9 ‘이슈&뉴스’ ‘해상 구조 시스템 재정비 시급’ 리포트 가운데 해경이 구조 과정에서 저지른 잘못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내용이 삭제됐다. 

당초 원고에는 세월호 사고 초기 해경의 실책과 구조작업의 난맥상을 지적하는 부분의 비중이 매우 컸으나 이후 수정된 원고에서는 해경의 해난 구조 기능이 취약하다는 식의 내용으로 대폭 편집됐다. 

‘4월16일 8시52분, 첫 신고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해경은 허둥댔다’, ‘배가 침몰할 것 같다는 학생에게 위도와 경도를 묻느라 골든타임을 허비했다’, ‘세월호와 교신했던 해경 관할 선박관제센터 역시 도망치던 선장에게 판단을 떠넘겼다’, ‘1분 1초가 절박한 수색 초기, 관할권을 이유로 UDT 등 해군 정예요원의 투입을 막았다’는 등의 리포트 내용이 모두 삭제됐다.

아울러 길 전 사장은 김 전 국장의 사퇴 과정에서 청와대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고 “이건 대통령의 뜻”이라며 사직을 종용했다는 주장에 대해 처음에 전화 받지 않았다고 했다가 다시 박준우 당시 정무수석과 전화통화를 했다고 말을 바꿨다. 

길 사장은 “정무수석이 유족 대표들을 만난 뒤에 격앙된 정서를 전하면서 ‘KBS 문제로 여기까지 왔으니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면서 “누구를 사임하라는 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길 전 사장은 또 김 전 국장에게 ‘사태가 심각하다. 여기서 잘못하면 KBS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다. 자네뿐만 아니라 나도 죽는다’며 자진 사퇴를 제안하고 ‘자넨 나하고 같이 간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창건 전 보도본부장은 5월9일 길 사장이 유족에게 사과하러 가기 전 자신에게 전화해 ‘내가 김 국장에게 다 얘기해 놨으니 김 국장의 사표를 받아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김 전 사장이 김 전 국장에게 ‘자진사퇴’를 권유한 것이 아니라 청와대의 지시로 회사를 관두라고 말했다는 김 국장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이다.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이 2014년 5월9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에서 열린 긴급 기자회견에서 청와대와 길환영 전 사장의 보도개입을 처음으로 폭로했다. ⓒ 연합뉴스
KBS 기자협회는 KBS가 국가정보원에 대한 수사 관련 보도를 축소되는 과정에서 국정원이 개입했다는 의혹도 폭로했다. 길 전 사장이 국정원의 방송 담당 팀장인 이아무개씨와 고등학교(천안고) 선후배로서 국정원 수사 보도를 축소하는 데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당시 KBS 법조팀이었던 한 기자는 “국정원 댓글이라는 것만 들어가면 모든 걸 막았고 단신도 이상하게 고쳐놓았다”며 “국정원 요원들이 노무현 서거와 관련해서 댓글 공작을 한 내용에 대한 단신을 썼는데 사인(승인)을 안 낸 적도 있다. 국정원에서 사장-보도국장-팀장으로 이어지는 통제가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길 사장은 2014년 5월19일 기자총회에 참석해 “내가 (5월9일) 오전 중에 굉장히 여러 군데서 전화를 받았다. 정보 관련 그런 데도 있고…”라고 말했다. 여기서 ‘정보 관련’이라는 표현이 지칭하는 기관이 국정원일 것이라는 게 기자협회의 추측이다.

기자협회 분석에 의하면 2013년 국정원 댓글개입 사건 수사에 여론의 관심이 집중됐을 때 관련 뉴스가 KBS 9시 뉴스 큐시트에서 차지하던 위치는 대부분 주목도가 떨어지는 뒤쪽이었다. 

예를 들어 국정원의 심리전단 파트가 모두 12개에 이른다는 2013년 8월21일 단독 보도는 그 내용의 중대성에도 9시20분이 넘어서 방송됐다. KBS 보도국 안에서 ‘박근혜 대통령 관련 뉴스는 무조건 러닝타임 20분 안에 소화하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 리포트의 배치 순서는 사안의 중요성을 뜻한다. 그런데도 국정원 청사 안에서도 댓글 작업이 이뤄졌다는 2013년 8월13일 단독 리포트 역시 9시30분이 넘은 시간에 방송됐다. 

기자협회는 “길 전 사장은 2014년 5월3일에는 대통령 사과를 요구하는 안철수 대표의 기자회견 소식을 전한 ‘뉴스9’ 하단 자막 스크롤(안철수 대표 “대통령 통렬한 사과 요구” VS 새누리 “사고 수습이 먼저”)을 보고 보도국장에게 전화해 삭제 지시를 내렸다”며 “5월6일엔 9시 뉴스 시작 21분 전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세월호 참사를 사과하는 대통령 보도가 예고에 나가지 않았음을 문제 삼으면서 헤드라인의 노출 순서를 3번째에서 2번째로 올리라고 했고, 실제 요구대로 뉴스가 방송됐다”고 밝혔다.  

‘이정현 녹취록’ 폭로 주인공인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은 길환영 전 KBS 사장(왼쪽)과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오른쪽)이 KBS 보도와 인사에 개입해왔다고 폭로했다. (사진=미디어오늘, 연합뉴스)
김 전 국장이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로부터 보도통제 전화를 받았다는 2014년 4월21일과 30일 사이에 공영방송 MBC에서도 해경 비판 기사가 누락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 이후 해경의 부실 대응이나 정부에 대한 비판 아이템은 MBC ‘뉴스데스크’에서 누락되거나 축소됐다. (관련기사 : “‘대통령 모욕 장면 빼라’ MBC도 세월호 방송 통제했다”)

2014년 4월23일 “80명 구했으면 대단한 것 아니냐”는 해경 간부 막말 파문을 현장 기자들이 발제했지만 박상후 당시 MBC 보도국 전국부장은 “80명이면 많이 구했고, 대단한 것 맞다”며 묵살했다. 그러나 SBS는 이날 해당 해경 간부의 직위해제 소식을 리포트로 보도했다.

MBC는 이날 아침 진도 현장 취재팀이 ‘해경의 엇박자 구조작업’을 뉴스데스크 아이템으로 발제했지만 아침 편집회의 직후 아이템을 보류했다. 당시 민간 잠수사와 해경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시점이었다. 다음날 취재팀은 이 아이템을 다시 발제했지만 또 묵살됐다. 그러다 민간 잠수사 관련 해경의 반박 기자회견이 나오자 ‘논란성 공방 아이템’으로 다루라는 제작 지시가 떨어졌다. 

당시 기자들은 “이 기사를 포함해 해경이나 정부를 비판하는 민감한 기사다 싶으면 묵살하기 일쑤였다”며 “보통 편집 회의 직후 박상후 부장이 특별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이건 하고, 이건 하지 마라’는 식으로 지시했다”고 밝혔다.

현장 취재팀에 있었던 또 다른 기자는 “매일 아이템이 모자라 편집부가 아이템을 많이 요구하는 상황이었는데 해경 비판 등의 기사를 발제하면 박상후 부장은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고 빼라고 한 적도 많다”고 말했다. 

심지어 MBC는 4월21일 오전 당시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이 세월호 사고 현장을 방문한 대통령 등에게 보인 유가족들의 반응을 두고 ‘국민 정서가 미개하다’고 표현한 아들 발언을 사죄한 사실도 뉴스데스크에서 다루지 않았다. 이날 KBS와 SBS 모두 이 소식을 메인뉴스 리포트로 전했다. 

언론노조 MBC본부 조사 결과 이날 편집회의에서 김장겸 보도국장과 박승진 정치부장 등은 ‘19살짜리가 한 말이고 단신 기사 처리까지 한 만큼, 메인 뉴스로 다루지 않아도 되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확인됐다. 정 전 의원은 그때 유력한 서울시장 예비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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