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보도국 국‧부장급 간부들이 청와대의 KBS 보도개입 녹취록에 대해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문제”라면서 사안을 축소하고, “특정 정파에 치우친 세력의 주도 하에 녹취록이 공개됐다”며 언론시민단체를 비난했다.

간부들이 대거 소속된 ‘KBS기자협회의 정상화를 추진하는 모임’(이하 정상화모임)은 14일 성명을 내어 “대선을 1년여 앞두고 20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2년 전의 일이 또다시 사내 특정 세력의 주도 하에 수면 위로 끌어올려졌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이들은 KBS의 ‘보도개입’ 무보도에 반발했던 젊은 기자들과 언론노조 KBS본부 등을 겨냥해 “이 문제를 2년이 지나 이슈화시키면서 이런 움직임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통세력’이고, 이를 보도하지 않으면 ‘청와대의 KBS 보도 개입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공격한다면 과연 진정 KBS를 위하는 순수한 움직임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주언론시민연합, 자유언론실천재단 등 언론시민단체들은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년 4월 이정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 KBS 보도 책임자인 김시곤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해경 비판 보도에 대해 “뉴스 편집에서 빼달라”, “다시 녹음해서 만들어 달라”고 압박하는 등 KBS의 보도 편집·편성에 개입한 정황을 담은 녹취록을 공개했다.

▲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왼쪽)과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 (사진=미디어오늘, 연합뉴스)
그러나 KBS는 녹취록 공개 직후 단신조차 내보내지 않았고 지난 11일에야 메인뉴스 18번째 리포트에서 ‘사드 논란’ 등과 묶어 여‧야 공방 리포트로 처리했다. KBS의 무보도에 사내 기자들은 기수별 기명성명을 통해 “특정 보도 누락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라며 보도·제작을 촉구했다. 

지난 3월 결성된 정상화모임에는 정지환 KBS 보도국장, 최재현 정치외교부장 등 핵심 국‧부장급 이상 인사들이 이름을 올렸고 규모도 130명 수준이다. 이들은 ‘KBS기자협회’에 대해 ““민주노총 산하 특정노조의 2중대”, “레토릭도 과격하고 정치적이고 편향적”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정상화모임은 지난 14일 성명을 통해 “일부 편향된 매체를 동원해 (‘이정현 녹취록’을) 폭로하고 이슈화시킨 뒤 내부에 잇따라 비판 성명을 내고 그것이 또 외부에 알려졌는데 과거의 패턴과 달라진 게 없다”며 “이에 동조하도록 동료들을 압박하고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을 집단으로 따돌림하거나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행태도, 선거 등 정치적 상황을 봐가며 완급을 조절하는 행태도 달라진 게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우리는 이런 움직임을 주도하는 자들에겐 결코 ‘KBS의 독립’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고 단언한다. 그들은 지극히 정치적이기 때문”이라며 “더 이상 변죽만 울리듯 선동하지 말라. 당신들에게 동조해야만 정의의 편이라는 식의 프레임도 이젠 지겹다. 이렇게 말하면 또 청와대의 보도개입에 침묵하는 세력이라고 비판할 건가”라고 반문했다.

결국, ‘권력에 의한 보도통제’라는 녹취록의 함의를 비판하고 지적하는 대신에 폭로 기자회견을 연 언론시민단체들의 정치적 성향을 문제 삼고 관련 보도를 요구하는 내부의 목소리를 불순한 것으로 치부한 것이다.

▲ 정지환 KBS 보도국장(왼쪽)과 최재현 정치외교부장. (사진=KBS)
간부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정상화모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지난 3월 KBS 야당 추천 이사들은 “이들의 이러한 집단적 행동이 일선 취재기자들에 어떤 압박으로 작용할지 심히 우려스럽다”며 고대영 KBS 사장에게 ‘보직자들의 사퇴’ 등을 요구했지만, 고 사장은 “친목단체의 활동”이라며 개입을 거부했다.

KBS 출신인 뉴스타파 심인보 기자는 지난 3월 페이스북을 통해 “공영방송이 최고 권력자의 이해관계에 복무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한줌의 극우 탈레반들, 회사의 혼란을 틈타 그릇에 과분한 보직을 탐하는 자아도취적 기회주의자들, KBS 저널리즘이야 어찌됐든 알 바 없이 연수나 특파원이나 앵커 보직 같은 당근에만 기웃거리는 회사원 기자들의 이름”이라며 ‘정상화모임’을 강하게 비판했다.

정연욱 KBS 기자는 지난 13일 기자협회보를 통해 “이 목적을 알 수 없는 (정상화모임의) 실명 공개 결성문이 게시된 뒤로 보도국 내부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 뚜렷하고 명백한 경계선이 그어졌다”며 “정상화와 정상화가 아닌 기자, 혹은 정상과 비정상 기자. 전례 없이 피아를 갈라놓은 경계선이 생긴 뒤로 살가운 소통은 아예 사라졌다”고 밝혔다.

정 기자는 “KBS 특유의 가족적인 유대감으로 얽혀있던 조직이 순식간에 불신으로 얼어붙었다”며 “간부들이 포함된 ‘정상화’가 비가시적이고도 일상적인 감시를 하고 있다는 공포,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이 통제되는 일종의 ‘판옵티콘’이 공영방송의 심장부에서 구현됐다”고 말했다.

아울러 “김시곤 전 국장과 이정현 전 수석의 통화에 관한 내용을 보도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이 ‘정상화’에 대한 반대선언으로 해석되는 부당한 맥락이 성립됐다”며 “저널리즘의 상식에 입각한 문제제기 조차 정치적인 진영 논리에 희생되고 있는 현실. 이 모든 것을 초래한 장본인은 바로 지금 KBS 보도국을 이끌고 있는 간부들, 최초로 경계선을 그은 기자들”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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