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의 방송 개입 정황을 드러낸 이정현 녹취록 공개 이후 2주가 다 돼 가는데 정작 당사자인 지상파 방송사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일부 기자들이 성명을 내는 등 저항의 움직임이 없는 건 아니지만 관련 보도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KBS A 기자는 이정현 녹취록 기사가 나오지 않는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정현 녹취 보도를 제대로 다룬다는 건 ‘우리는 이제 청와대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일과 같다.”

A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KBS에서 민감한 정치‧사회 이슈는 위에서 틀어쥐고 있고 기자들의 보도‧제작 자율성은 자취를 감췄다. 

“KBS 뉴스는 이미 기자들의 손을 떠나있는 상태다.” 보수 정권 8년 동안 이어져온 통제에 자기 검열이 일상화됐다는 고백이다.

▲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왼쪽)과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 사진=미디어오늘, 연합뉴스
KBS의 경우 보도 아이템은 ‘편집회의’에서 수렴되고 분배된다. 이명박 정부 시절 편집회의 위의 또 다른 편집회의인 ‘축조회의’가 생겨났는데 이는 보도본부장 방에서 본부장과 국장, 부국장급들만 참여해 열리는 최종 편집회의다. 

이에 대해 유원중 KBS 기자(전 KBS 기자협회장)는 방송기자연합회지 ‘방송기자’에서 “이 회의에서 발제된 아이템이 갑자기 빠지거나 별도의 다른 아이템이 갑자기 잡혀 일선 기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일선 기자가 아닌 간부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옥상옥’이라는 지적이다.

이정현 녹취록 보도의 경우 공식 회의 주제로도 채택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KBS의 B 기자는 “지금 발제 자체가 안 되고 있는 것 같다”며 “편집회의에 올라오지 않으니 축조회의에 관련 아이템이 들어갈 리 없다”고 말했다.

KBS에서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이정현 녹취록’ 파문을 비판하는 성명을 내고 있지만 ‘최소한의 저항’이라는 성격이 짙다. 

몇 년 전 KBS에 입사한 C 기자는 “실명으로 성명서를 내고 있는 기수들은 큰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이라면서도 “성명서를 낸다고 해서 크게 바뀔 거라고 생각은 안 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KBS는 안정화를 추구하는 굳어있는 조직이면서 정치적으로는 굉장히 민감하다”며 “언론사 입사를 준비할 때 정권에 따라 공영방송이 좌지우지되는 현실을 비판했는데, 안에 와서 보니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C 기자는 “보도국 내 힘있는 사람들은 정권에 유난히 신경을 많이 쓰고 바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한직으로 쫓겨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성재호)는 지난 12일 KBS 신관로비에서 청와대의 보도개입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측을 규탄하는 피케팅 시위를 열었다. (사진=언론노조 KBS본부)
SBS의 경우 지난 1일 보도국 노조원들이 개정된 보도준칙에 따라 긴급 발제권을 가동해 ‘이정현 녹취록’ 리포트를 내보냈지만, 일상화한 자기검열을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다. 

SBS의 D기자는 “사실 긴급 발제권 한 번으로 그렇게 큰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다”며 “다시 긴급 발제권을 발동할 만큼 내부 동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긴급 발제권에 대한 외부의 관심을 너무 많이 받다보니 다들 눈치보고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MBC는 지상파 3사 가운데 가장 암담한 상황이다. MBC의 E 기자는 “청와대의 보도 개입 의혹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사실로 드러났는데도 다루지 않는 것은 결국 청와대의 보도 개입을 수긍하겠다는 자세로밖에 볼 수 없다”고 비판한 뒤 “지금의 MBC는 보도국 수뇌부의 판단과 다른 발제를 하면 보도국에 남아있기 어려운 상태”라고 말했다. 

기자들 사이에선 청와대와 그 보이지 않는 힘이 방송사 간부들을 통제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자정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자조 섞인 견해가 지배적이다. 정권 말 청와대의 레임덕이 가시화되고 있지만 실제로 정권이 바뀌기 전에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이야기다.

KBS의 A 기자는 “공영방송의 핵심 임원들은 정권과 운명 공동체”라며 “그들에게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다. 다만 현 정부의 레임덕으로 중간 간부들에 대한 핵심 간부들의 지배력이 떨어질 수 있고, 중간 간부들은 정권이 바뀌면 자신들이 위태로워진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B 기자는 “KBS는 정부 부처와 달리 모든 것이 오픈돼 있다”며 “설사 새로운 동아줄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내부에 있더라도 이런 변화를 시청자와 국민이 피부로 느끼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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