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만 도와주시오. 국장님 나 한 번만 도와줘” 

지난달 30일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KBS 보도국장에 대한 세월호 보도통제 녹취록이 폭로됐다. 청와대가 KBS 등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보도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끊임없이 압박했다는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이 의원의 세월호 보도통제는 1986년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 사건과 비견될 정도로 큰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고 있음에도 이번 사건과 직접 관련된 KBS를 비롯해 MBC와 민영방송 SBS마저도 쉬쉬하는 모양새다. 정권의 입김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SBS는 기자들이 긴급발제권을 발동해야만 어렵게 저녁 메인뉴스에서 이정현 녹취록 파문을 다룰 수 있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지난달 30일 녹취록이 공개된 후 7일까지 KBS는 뉴스9에서 청와대의 공영방송 보도 통제 논란에 대해 단 한 건의 기사도 내보내지 않고 있다. 

MBC는 녹취록 공개 당일 ‘뉴스데스크’에서 “전국언론노조 등은 오늘 세월호 사고 직후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과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의 통화 녹음파일을 공개하면서 ‘청와대가 세월호 보도를 통제했다’고 주장했다”고 단신 처리한 것 외에 뉴스데스크에서 한 건의 리포트도 내보내지 않고 있다.

1일 SBS 8뉴스 리포트 갈무리
SBS는 30일 ‘8뉴스’ 뉴스에서 “언론노조, 이정현-김시곤 통화녹음 공개” 기사를 단신으로 처리한 후 다음날 SBS 보도국 기자들의 긴급발제권 발동으로 이정현 의원의 KBS 보도 개입 논란 이후 야당의 청문회를 추진 소식을 리포트로 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4일 임시국회 대정부질문이 시작된 후에도 여야 공방을 다룬 리포트에서 야당 의원의 보도개입 지적을 전달하는 수준에 그쳤다. 

KBS는 보도국장 선임에까지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정황이 불거진 상황이며, MBC는 지난해 10월 정연국 시사제작국장이 청와대 대변인으로 직행해 청와대와 밀접한 관계다. 김성우 청와대 현 홍보수석은 SBS 보도국장 출신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윤창현 본부장)는 지난 5일 노보를 통해 “보도국 11기 이하 기자 조합원 전원이 긴급발제권을 통해서라도 이 사안을 중대하게 다뤄야 한다고 동의할 정도로 상식적인 뉴스가 왜 당일 보도국 편집회의에서는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고 도대체 이 당연한 기사가 왜 이리 어렵게 방송돼야 하느냐”며 “혹시 방송개입이 본연의 업무라고 주장하는 청와대의 입김이 우리에게도 미치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SBS 보도국장 출신이 현직 홍보수석이라서 알아서 눈치를 보는 것이냐”며 지적했다. 

SBS본부는 “특히 지난해 상반기부터 청와대발 뉴스의 일방적 전달과 보수 우경화 경향이 짙어졌고, 지난해 말 한·일 위안부 합의와 개성공단 폐쇄 등 각종 현안에 있어 정부 입장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며 스스로 공정성을 포기하는 행태를 반복해 시민사회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며 “이번 이정현 녹취록 파문도 사안의 중대성을 과소평가했다면 보도 책임자들의 뉴스 가치 판단력에 심각한 하자가 있는 셈이고,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그렇게 했다면 정치권력에 대한 명백한 눈치 보기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5일 KBS 뉴스9 리포트 갈무리
KBS는 보도본부의 녹취록 미보도에 항의하는 기자들의 기수별 성명이 이어지고 있다. KBS 보도본부 27기 기자 18명은 5일 “일개 임명직 공무원이 KBS 보도국장에게 마음대로 전화한 뒤 답변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욕설까지 섞어가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그러면서 ‘대통령도 봤다’며 간교한 협박을 서슴지 않는 상황이 KBS 위상을 보여준다”며 “정작 KBS는 우리 얼굴에 튄 더러운 침을 닦아내는 시늉조차도 하지 않고 있다. 법적 대응은 고사하고 작성된 단신 기사도 무시됐다”고 밝혔다. 

7일엔 33기 기자들이 ‘세로로 읽는 성명’을 발표해 화제가 됐다. ‘공영찬가’라는 제목의 시조 형식의 이 성명은 김시곤 전 국장의 청와대 외압을 폭로하는 녹취록이 공개됐지만 이를 보도하지 않고 북한 소식만을 밤낮으로 전하는 KBS 보도를 풍자하는 내용으로, 세로로 읽으면 “박주민은 까면서 이정현은 왜 안 까 북한보도 그만 좀 해”로 읽힌다. 현재 이 성명은 ‘공사의 이익을 저해하거나 명예와 위신을 손상하는 내용’이라는 이유로 게시 보류된 상태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이번 임시국회에서는 유독 정부가 직접 관련된 의혹이 많이 논의됐다”며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KBS 세월호 참사 보도 개입, 대우조선해양의 회계사기를 알고도 혈세를 지원한 청와대 서별관회의, 어버이연합 게이트 및 청와대‧국정원 연루설 등이 대표적이지만 방송사들은 이런 의혹들에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고 비판했다.

민언련에 따르면 6월 임시국회 대정부질문이 시작된 4일부터 마지막 본회의가 있었던 6일까지 MBC는 ‘뉴스데스크’에서 △청와대 보도 개입 △서별관회의 논란 △어버이연합 게이트 △가습기 살균제 참사 등 4개 사안에 대해서 '어버이연합이 박근혜 대통령의 보위단체'라는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주장을 '소동'으로 보도한 1건 뿐이었다.

KBS ‘뉴스9’는 서별관회의 논란과 가습기 살균제 국정조사 소식을 1건씩 다뤘고, SBS는 ‘8뉴스’에서 어버이연합 게이트 외 나머지 3가지 사안을 각각 한 번씩 보도했다. 같은 기간 JTBC ‘뉴스룸’은 청와대 보도 개입 7건, 서별관회의 논란 8건 어버이연합 게이트와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1건씩 보도했다. 

4일 MBC 뉴스데스크 리포트 갈무리
반면 MBC는 자사 임원에 대해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성추행 전력이 있다고 허위 사실을 유포한 것에 대해 연일 ‘면책특권’ 논란 등으로 비판했다. 지난 1일 조 의원이 공식 사과 입장을 밝힌 후에도 6일까지 조 의원을 비판하는 8건의 리포트를 쏟아냈다. 

임시국회 기간엔 KBS가 조 의원의 면책특권과 관련한 보도를 4건이나 할애했다. 주로 야당 의원이 비판 대상이 된 ‘20대 국회 막말‧고성’과 관련한 뉴스는 KBS와 MBC가 각각 2건, SBS가 3건을 보도했다. 

민언련은 “지난달 30일부터 조 의원에 대한 사안을 집중 보도했던 방송사들은 청와대의 KBS 보도 개입 등 굵직한 현안이 터진 이후에도 면책특권 폐지를 비중 있게 다루면서 청와대 관련 의혹들은 무시한 것”이라며 “청와대 관련 의혹을 모두 배제한 채 국회 ‘고성’만 비판한 방송사들의 태도는 청와대의 각종 비리와 공안적 ‘구태’가 수면 위로 드러난 첫 임시국회를 어떻게 해서든 ‘야당이 막말로 점철한 구태’로 덮어보려는 여론전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MBC의 한 기자는 “청와대의 보도 개입 의혹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사실로 드러났는데도 그 발언조차 다루지 않는 것은 결국 MBC 역시 청와대의 보도 개입을 그냥 수긍하겠다는 자세로밖에 볼 수 없다”며 “세월호 특조위의 동행명령장 발부 때는 언론 자유를 내세우며 강하게 반발하던 회사가 어떻게 이 사안엔 이렇게 침묵할 수 있느냐”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 기자는 “조응천 발언의 문제점이나 면책특권 논란을 다루는 것은 찬성이나 이와 함께 정치권의 핫 이슈인 이정현 보도 개입 문제나 서별관회의 논란 자체를 누락하고 보도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면서 “조응천 문제만을 부각해서 보도 개입과 부적절한 관치 논란을 피해가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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