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인 1986년. 7년차 한국일보 기자 김주언은 ‘보도지침’을 폭로했다. 

그해 9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월간 ‘말’ 특집호에 ‘보도지침, 권력과 언론의 음모-권력이 언론에 보내는 비밀통신문’을 게재하면서 보도지침은 세상에 알려졌다. 

이는 신군부의 언론 통제와 이에 굴종한 한국 언론의 부끄러운 역사를 담으려 했던 저널리스트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났지만 ‘보도지침’은 지침의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이다.  

김주언 기자는 지난 30일 다시 언론통제 실상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장에 섰다. 그를 포함한 언론시민단체들이 이날 공개한 세월호 참사 직후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과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의 통화 녹취는 30년 전의 ‘보도지침’을 떠올리게 했다.

김주언 기자(전 KBS 이사)가 지난 30일 언론시민단체의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 녹취 폭로 기자회견장에 참석해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이 정부의 보도통제 증거를 폭로하기로 한 까닭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30년 만에 일을 또 쳤네. 잘했어. 잘했어.” 이날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 참석했던 그의 옛 동료가 김 기자와 악수를 나누며 힘을 북돋았다. 김 기자는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양심 선언’을 할 수 있도록 곁에서 끊임없이 설득하고 용기를 줬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그는 “KBS 이사 시절(2012~2015년) 김시곤 국장을 알게 됐다”며 “그는 보도국장 시절 동안의 언론 통제 자료를 정리하고 녹취 파일까지 내게 전달했다. 그가 넘긴 자료를 보고 1986년 보도지침을 폭로할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이날 공개된 ‘이정현-김시곤’ 녹취는 청와대가 세월호 참사 직후 실종자 수색이 아닌 언론통제와 압박에 촉각을 곤두세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단서였다.

2014년 4월 21일과 30일 통화 녹취를 보면, 이 전 수석은 “뉴스 편집에서 빼 달라”, “다시 녹음해서 만들어 달라”고 편집에까지 직접 개입했고 “하필이면 대통령이 오늘 KBS를 봤으니, 내용을 바꿔 달라”고 주문했다.

이 전 수석은 “이런 식으로 지금 국가가 어렵고 온 나라가 어려운데 (KBS가) 지금 그렇게 해경하고 정부를 두들겨 패야 하는 게 맞느냐”고 반문하는 등 반복적으로 김 전 보도국장을 압박했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욕설을 하고 압박하다가 그것도 쉽지 않자 “(대통령님이) KBS를 오늘 봤네. 한 번만 도와주시오. 국장님 나 한번만 도와줘”라며 김 전 국장을 어르고 달랬다.

김 전 국장은 항의에 반발하면서도 이 전 수석을 ‘선배’라고 지칭하며 “이 선배 솔직히 우리만큼 많이 도와준 데가 어디 있습니까”, “저기 뉴스라인 쪽에 내가 한번 얘기를 해볼게요”, “제가 하여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볼게요”라며 동조하는 모습도 보였다.

김 전 국장이 녹취를 폭로하기까지 쉽지만은 않았다. 김주언 기자는 “권력으로부터의 언론 독립에 대한 김시곤 국장의 신념은 분명하다”면서도 “아직 그가 현직이기에 KBS 조직에 불이익이 가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또 그가 폭로하려는 취지를 왜곡 해석할 수 있다는 불안감도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김 전 국장이 김 기자에게 넘긴 것은 이번 녹취뿐 아니다.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년 5월, 청와대로부터 연락을 받고 김 전 보도국장의 사퇴를 요구했던 길환영 전 KBS 사장이 어떻게 보도에 개입했는지 일별 기록으로 남긴 비망록도 있다. 

미디어오늘이 단독 보도했던 ‘김시곤 비망록’(국장업무일일기록)에는 길 전 사장이 큐시트에 추가 뉴스를 넣으라고 지시하거나 삭제하라고 지시한 사례, 뉴스 순서를 앞쪽이나 뒤쪽에 배치하라는 사례 등이 빽빽하게 쓰여 있다.

비망록에는 이 전 수석이 2013년 10월 김 전 보도국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박근혜 대통령 보도 순서에 불만을 털어놓는 대목도 있다. 세월호 참사 전부터 청와대 핵심 인사는 KBS 보도에 불만을 제기하며 보도국장을 압박한 것이다.

김주언 기자는 “김시곤 국장은 특조위 조사를 받으면서 자료(비망록+이정현 녹취)를 제공했다”며 “단순히 증거자료로 그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설득했고 김 국장이 수락해 여기까지 왔다. 김 국장에 대한 일부 부정적 평가가 있지만 기자로서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아래는 일문일답.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 (사진=이치열 기자)
- ‘김시곤-이정현’ 녹취록을 처음 들었을 때 생각은 어떠했나?

“민주화 이후엔 언론 통제가 사라진 줄 알았지만, 이번 녹취는 직접적인 통제가 지속적이었다는 걸 증명한다. 녹취록뿐 아니라 비망록도 마찬가지다.”

- 녹취를 폭로하기까지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김시곤 국장을 설득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언론 독립에 대한 그의 신념이나 양심은 분명 살아있다. 김 국장은 아직 현직이다. 외부 압력에 의한 개인의 불이익보다 KBS 조직에 혹여 해를 가하진 않을까 염려했다. 조직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자신과 30~40년 이상 함께 했다. 또 (정직무효소송 등) 재판이 진행 중이라 ‘재판에 영향을 끼치려는 것 아니냐’는 식의 의혹을 받을 수 있던 상황이었다.”

김 전 국장은 2014년 세월호 참사 국면에서 청와대와 길 전 사장이 청와대 관련 KBS 보도와 인사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폭로했다가 정직 4개월 징계를 받았다. 지난 4월 징계의 부당성을 다투는 재판에서 패소했지만 1심 재판부는 길 전 사장의 보도 개입을 인정했다.

- 어떻게 김 전 국장을 설득했는지 궁금하다.

“재판부나 특조위에 제출했던 자료를 증거자료로만 남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언론 통제에 대한 기록이니 공개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설득하고 설득했다. 무엇보다 본인이 확고했다. 청와대나 정부 지시가 내려오는 걸 참지 못했다. 그 기록이 비망록이고 녹취다. 그는 청와대나 정부로부터 방송이 독립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공영방송 사장에 청와대 낙하산이 낙점되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이 있다. 나도 그런 점을 강조했다.”

길환영 전 KBS 사장(왼쪽)과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 (사진=미디어오늘, 연합뉴스)
- 현재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상태는 어떠한가.

“자신이 결단 내렸으니 이후 일은 감수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KBS노조 애들하고 결탁했다’는 식의 마타도어 프레임이 걱정됐다. 그래서 김 국장은 자신의 선배들이 몸을 담고 있는 언론시민단체를 통해 이처럼 폭로한 것이다.”

- 1986년 보도지침 폭로를 떠올리는 언론인들이 많다. 그러나 보도지침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도 많은데, 당시 김주언 기자는 무엇을 폭로한 것인가?

“정부에 의해 언론이 통제되면 보도는 결국 정부 홍보뿐 아닌가. 권인숙이 성 고문 만행을 폭로해도 당시 신군부의 보도지침에 따라 신문들은 ‘운동권 학생들이 성마저 혁명 도구화한다’는 식으로 제목을 뽑았다. ‘물가인상’이라는 단어도 쓸 수 없었다. 여론에 악영향을 미칠까봐 ‘물가현실화’라고 써야 했다. 보도지침은 민주주의 다양성 원칙을 완전히 훼손시켰다.”

- 한편 정부는 세월호 특조위 활동을 종료키로 했는데?

“세월호 특조위 활동은 연장돼야 한다. 김시곤 국장도 같은 생각이다. 김 국장은 특조위 조사를 받았고 관련 자료를 제공했다. 특조위가 이를 확인하고 길환영 전 사장과 이정현 전 청와대 수석을 고발한 거다.”

지난 2014년 사퇴 기자회견을 연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이 취재진에 둘러싸여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

“공영방송 지배구조는 언론시민단체도 그렇고 언론사 노동조합도 그렇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 야당과의 공조도 이뤄져야 한다. 이번 녹취 파일이나 비망록 폭로가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김시곤 국장과 관련해 한말씀 한다면?

“김시곤 보도국장과 관련해 KBS 후배들 사이에서 ‘독선적’이라는 일부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기자로서의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이다. 언론 통제를 기록한 비망록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언론이 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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