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현지하쇼핑센터 상가에 ‘현대카드 사절’이 걸렸다. 바이닐 레코드, 흔히 쓰는 말로 ‘LP’를 파는 가게들이 출입문마다 붙인 종이다. 지난 27일 들린 중고 LP 가게 ‘LP LOVE’의 김지윤 대표는 6일 후에 있을 ‘현대카드 규탄 집회’ 준비로 분주했다. 전국의 50여개 레코드 상점들은 7월3일 서울 한남동 ‘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 앞에서 레코드 업계 최초의 단체 시위를 예정하고 있다.

바이닐 레코드 업계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10일 현대카드가 중고·신보 LP를 판매하는 ‘바이닐&플라스틱’을 개장하면서다. 현대카드는 ‘아날로그 감성과 다양한 음악 경험을 제안하는 현대카드의 브랜딩 공간’을 만든다는 취지로 청음 공간, 라이브 디제잉 등의 시설이 들어선 LP 매장을 신설했다. 1~2층을 합해 200평이 넘는 부지에 약 4000종의 LP와 8000여 종의 CD가 비치돼있다. 현대카드 회원은 20% 할인된 값이나 카드 포인트로 LP를 구매할 수 있다.

“이건 아니다. 대기업이 이건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김 대표는 반복해서 말했다. 업계에 따르면 LP 시장은 ‘헌책’보다 시장 규모가 작다. 김 대표는 전국의 레코드 상점을 다 모아봤자 60개가 안 되고 중고 LP 상점은 그보다 더 적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고 LP만 취급하는 그는 “대기업이 고물상에까지 손을 대냐”며 “단 한 번의 논의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쾅’ 오픈했다. 최소한의 상도덕이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 지난 6월27일 서울 중구 회현지하쇼핑센터 LP 가게 풍경. '현대카드 사절'이 출입문마다 붙어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현대카드 ‘골목상권 침해’ 논란, “전국 50여 개 중소가게 규모 시장, 개입하고 싶나”

김 대표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27~28일 이틀 동안 만난 다섯 명의 LP 가게주 모두 바이닐&플라스틱 개장으로 소매점들이 즉각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개장 후 매출이 반 토막이 난 매장이 있는가 하면 개장한 주말 아예 손님 발길이 끊겼던 매장도 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전반적으로 매출은 약 3분의 1 정도 감소했다. 재래시장과 대형마트, 중소 서점과 대형 서점 간에 벌어졌던 양상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이들이 가장 반발하는 부분은 ‘왜 중고 LP 판매인지’다. 김 대표는 “어떤 논쟁을 떠나 이건 대기업에 명분이 없는 영역”이라고 비판했다. 회현 지하상가에서 ‘리빙사’를 운영하는 이석현씨는 “대기업이 할 일이 있고 중소기업이 할 일이 있다”면서 “현대카드가 LP 시장을 진정 지원하고 싶으면 제대로 된 지원을 하면 된다. 거대한 자본력·기술력으로 생산 인프라나 지원 인프라를 구축하면 될 것을 왜 판매에 뛰어드나. 작은 구멍가게 잡아먹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대카드는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국내 LP 문화 활성화’를 매장 운영 주목적이라 밝힌 바 있다.

지난 시간 동안 LP 시장, 특히 중고 LP 시장의 명맥을 유지해온 곳은 중소상가들이다. 2000년대 이후로 음반시장은 급격히 축소돼왔다. 스트리밍 서비스 등장 및 음원시장 확대로 음반 시장이 침체기에 접어드는 가운데 핫트랙스 등 대형 음반유통사가 등장하며 음반 소매업자들은 한때 줄도산을 겪었다. LP에 대한 수요는 대폭 축소된 음반 수요 중에서도 미미한 부분을 차지했다. 20년 전 20여 개에 달하던 회현지하상가의 레코드점도 현재 7개로 줄어들었다.

침체기를 견딘 이들 가게는 “어떤 식으로든 생존방식을 찾아 살아남은” 곳이고 근래 등장한 가게는 “돈이 안 되는 실정을 알면서도 음반에 뜻을 품고 장사를 시작한” 곳이다. 서울 홍대 앞·신촌·이대 등지에 6~7개, 회현 상가에 7개, 황학동 2~3개, 방배동 1개 등 LP 가게는 인구 천만 명이 사는 서울에 많아야 30개가 안 된다. 회현에서 만난 가게주 모두 최소 20년에서 길게는 50년까지 LP 시장을 지킨 베테랑들이었다.

▲ 회현지하쇼핑센터에 위치한 'LP LOVE' 가게주 김지윤씨. 현대카드 중고 LP 시장 진입 반대 움직임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이석현씨의 ‘리빙사’는 50년이 넘은 가게다. 이씨의 아버지는 숨을 거두기 2주 전까지 가게에 나와 단골손님을 맞이할 정도로 LP를 사랑했고 “큰 돈 못 벌더라도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으면 LP 가게를 지켜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씨는 “LP 상점들은 다 저마다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서 “그런 시절을 버티며 지나왔다. 예전에는 거들떠도 안보더니 아날로그다 뭐다 하니 대기업이 자본력으로 (개입) 하려 하나”고 토로했다.

“작은 가게 없인 서브컬처도 없다”

김 대표는 “이 일이 우리의 생계 문제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문화가 말살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소상인들이 일궈온 LP 가게는 ‘서브컬처’를 유지하는 원동력인 동시에 음악을 매개로 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문화 공간이라는 것이다. 김씨는 “누가 큐레이션을 하느냐. (음악이) 정보라고 치면 누가 어떻게 설명하고 의미부여 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음악이 팔릴 수 있다”면서 “소매상마다 개성이 있고 단골이 있고 역사가 있다. 손님과의 교감, 소통에서 새로운 창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홍대 인근에서 4년 전에 문을 연 김밥레코드 대표 김영혁씨도 작은 레코드 가게는 사회의 ‘문화적 기반’이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좋은 창작자를 초청해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어떤 창작자는 외면 받았던 레코드를 (가게를 통해) 알고 다시 창작에 동기부여를 가지게 되기도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문화가 있는 것”이라면서 “뉴욕, 런던 등지의 언더문화도 독립 매장들의 힘이 컸다. 좋은 시스템, 좋은 매장에서 그런 서브컬처(하위문화)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교류·소통의 문화를 하나의 매장이 해결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김 대표는 현대카드의 LP 시장 진출에 대해 “김밥, 일식집, 중식집 등 몇 개 안되는 음식점이 있는데 패스트푸드 점 하나로 통일하자는 것”이라 일축했다. ‘잘 팔리는 음악’ 중심으로 매장이 운영될 뿐만 아니라 현대카드의 시장 점유율이 높아짐에 따라 다양성을 담보하던 기존 매장들이 사라질 것이란 우려다. 그는 “문화는 무조건 다양성이다. 검은 놈, 흰 놈, 이런 놈들이 다 같이 모여서 만드는 것”이라면서 “현대카드가 제공해줄 수 있는 다양성이 있을까”라 지적했다.

▲ 회현지하쇼핑센터에 있는 LP 가게 '리빙사' 전경. 사진=손가영 기자
▲ 회현지하쇼핑센터 내 LP 가게가 모여있는 통로 전경. 사진=손가영 기자

현대카드, 2~3년 기다리라지만… “당장 다음 달 망하는 가게 생긴다”

‘6개월’. 가게주들의 말을 종합하면 현 상황이 변하지 않을 시 중소 LP가게가 살아남을 수 있는 최대 기간이다. 김 대표는 일부는 고수익을 내기도 하지만 LP 가게의 70~80%가 ‘간이과세자’라고 말했다. 간이과세자는 한 달 카드 매출액이 400만 원이 넘지 않는 사업자다. 이석현씨도 “흑자가 날 때도 있지만 적자가 나는 달도 있다. 구매비용, 월세, 운영비는 나가는데 판매량이 떨어지면 당장 힘들 수 있다”면서 “당장 손님들은 2000~3000원 싼 곳을 찾는다. 타격이 크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지난 16일, 23일, 26일 현대카드 측과 세 차례 만났다. 만날 때마다 ‘손을 떼라’는 요구를 전달했다. 현대카드 측은 LP 시장의 파이를 키우고 LP 문화를 지원하기 위해서라고 매장 취지를 밝히며 3년 간 홍보기간을 두는 것이라 설명했다. 매장의 영세한 규모를 고려할 때 김 대표는 “파이가 키워질 동안 상가들은 문을 닫을 것”이라 지적했다.

김영혁씨도 “당장 다음 달, 다다음달 문을 닫는 가게가 생길 수 있다”면서 “파이가 커진다손 치더라도 소매점들은 시장이 커지기까지의 고통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김씨는 LP 시장의 특성을 강조했다. LP 시장은 일회적 소비를 제외하면 일부 ‘헤비유저’들이 대부분의 매출을 차지한다.

LP는 매출 규모가 폭발적으로 늘 수 있는 상품도 아니다. 즉 새로운 소비가 늘기 보다는 기존 소비자들이 중소상점에서 현대카드 매장으로 이동하는 양상이 나타날 것이며 트렌드에 맞춰 ‘반짝 효과’를 보더라도 결국 실제 수요에 맞춰 조정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김씨는 ‘파이가 커진다’는 현대카드 측의 논리에 회의를 표했다.

이는 ‘문화를 지원한다’는 현대카드 측 취지의 진정성이 의심을 받는 이유기도 하다. 파이가 커지든 커지지 않든, ‘대형 유통 매장’의 존재가 소매점에게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석현씨는 “차라리 LP 공장을 짓는데 힘을 써 달라”고 말했다. 국내에 LP를 생산하는 공장이 한 곳이 있지만 규모가 영세해 제대로 생산을 못하고 있으니 LP 생산 부문을 지원하면 가격이 저렴해지는 등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이씨는 “전시, 청음을 통해 고객에게 음악 향유 기회를 주는 현대카드의 ‘뮤직라이브러리’를 환영했다. 그러나 판매에다 카드회원에게 할인 혜택까지 주는 것은 (문화 지원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 6월24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현대카드 바이닐 & 플라스틱 매장 앞에서 레코드 매장 상인들이 집회를 열었다. 사진=시트레코즈 인스타그램

“대기업 일 따로 있어… 인프라 구축이 ‘진짜 지원’”

회현에서 20여 년 동안 가게를 해온 ‘THE DISK’의 구덕현씨는 현대카드의 마케팅이 더 확대될 것을 걱정했다. 구씨는 “‘없으면 카드 바로 발급’이 (매장에) 쓰여 있는 것을 보면 목적이 다른데 있어 보인다”면서 “서울 홍대, 대구, 부산 등 각 지역에 매장이 하나씩 열릴 수 있지 않냐”고 우려했다.

반대 움직임을 가장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는 김 대표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김 대표는 “중간에 그만둔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 내가 50대인데 자식에게 불의를 봐도 그냥 넘기는 모습을 모여주기 싫다”면서 “상대가 크다고 시작도 못할 수 없다. 당사자가 나서야지. ‘명분이 되는 게 없으니 (여기) 끼어들지 말라’고 말할 것”이라 말했다.

이들은 7월3일 오후 1시 ‘바이닐&플라스틱’ 매장이 있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 앞에서 전국의 레코드 가게주들이 모이는 집회를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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