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웅현. 그를 수식하는 수많은 단어들이 있다. 먼저 광고회사 TBWA의 크리에이티브 대표.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이런 카피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 다음은 베스트셀러 작가. 그의 책 중 <책은 도끼다>와 <여덟 단어>는 100쇄를 찍었다. 한 사람이 일생 동안 거둔 성취로서는 거대한 것.

그리고 이 화려한 수식 이전에 '프로책읽러'로서의 박웅현이 있다. 책 읽기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체화한 그에게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 '프로불참러'를 응용해 기자가 별명을 붙여봤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책을 고르고, 읽고, 또 그 책과 융화된 인생을 사는 것, 또 다시 자기가 경험한 '좋은 책'의 길목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 외적 성취를 떼어놓고 생각해도 반짝이며 충만한 인생이 아닌가?

박웅현을 저자로서 세상에 각인시킨 책 <책은 도끼다> 출간 이후 5년 만에 속편 <다시, 책은 도끼다>가 세상에 나왔다. 6월 15일 책 출간을 기념하는 인문학 강독회가 열리기 한 시간 전 그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700석 대규모 무대에서 강연을 앞두고 있었지만 크게 긴장한 기색은 없었다. 어떤 질문에도 과장하거나 숨기지 않고 명쾌하게 답했다. 마치 고단백 두부를 먹는 기분이었달까. 박웅현이 말하는 <다시, 책은 도끼다>, 책의 의미. 그만의 독서법. 아래 문답을 통해 만나보자.

▲ 박웅현 TBWA 크리에이티브 대표 (사진 기준서 스튜디오춘)

"책은 사고의 밀도가 가장 높은 매체"

Q <다시, 책은 도끼다>가 나왔다. '다시'를 붙여 나온 속편, 전편과 무엇이 달라졌나?

첫 번째 책은 '내가 읽은 책이 인생에 어떻게 영향을 줬는가?'란 질문 속에서 그 책과 내 삶과의 관계에 중점을 뒀다면, 두 번째 책은 더 하드코어로 '나는 어떻게 읽는가'의 문제다. "독자분들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읽히더군요"인 거다. 물론 둘 사이에 교집합이 있다.

Q 이번 책에서 '천천히, 깊게 읽기'를 강조했다. 속도가 빠른 광고계는 어쩌면 이런 독서방식을 고수하기가 가장 어려운 분야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천천히, 깊게' 읽기를 고수하는 비법이 있다면? 천천히 읽다 보면 조바심도 생기고, 욕심도 생기지 않나?

비법은 없다. 욕심을 버려야 한다. 주마간산 수박 겉핥기식 독서법이 현재 지배적인 것 같은데 나도 그 경험을 했다. 지금도 가끔 한다. 그런데 주마간산으로 열심히 달려서 첫 페이지에서 540페이지까지 왔는데 ‘뭘 봤지?’란 느낌이 들면 뛰어온 의미가 없지 않나. 그 욕심을 버리는 게 핵심이다. 어떻게 하면 천천히 볼 수 있을까? 왕도는 없다. 욕심을 버리려 노력하고, 많이 봐야겠단 생각을 덜 해야 한다. 천천히 보기, 세밀히 보기, 그 노력을 책에도 해주면 좋겠다.

Q 그렇다면 가장 오랜 기간 읽은 책은 무엇인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4개월간 영어로 읽었다. 최근에는 에밀 졸라 책들, 살만 루시디 책, <콜레라 시대의 사랑> <롤리타>를 천천히 읽고 있다. 역시 영어로 읽고 있는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은 삼독째인데 그 책도 빨리 읽으려 하지 않는다. 한 단락이 이해가 안 되면 다시 읽고,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그 앞 단락으로 다시 가서 읽는다. 아주 세밀하게 보려 하고 있다. '이 책이 연말까지 가면 어때?' 이런 식이다. 이 책이 연말까지 가면 남들보다 처질지 몰라서 이 책을 빨리 읽고 다른 책을 읽어야겠단 건 욕심이다. '많이 읽는다'는 소(小)를 탐하려다, '제대로 읽는다'는 '대(大)'를 놓치는 거다.

Q 책 읽는 방식이 매력적으로 느껴져서 독서습관도 자연스레 궁금해지더라. 주로 언제 책을 읽나?

주말에, 여행 가서, 그냥 시간이 남을 때, 손님 만나러 갔는데 시간이 뜰 때, 누굴 기다릴 때 많이 읽는다. 시간이 있어도 읽지 않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복잡한 일을 막 끝내고, 30분 후에 또 복잡한 일을 해야 할 때는 머릿속에 내용이 안 들어온다. 그럴 땐 아예 차 마시면서 쉰다. 책은 상호작용이다. 똑같은 박웅현이 책을 읽는데도, 같은 텍스트가 언제는 잘 들어오고, 또 언제는 안 들어온다.

▲ 박웅현 TBWA 크리에이티브 대표 (사진 기준서 스튜디오춘)

"행복한지보다 '행복해 보이는지'가 더 중요한 시대"

Q 책 옹호론자다. 다른 예술 장르도 있고, 향유할 매체도 다양해진 세상이다. 굳이 책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나는 무조건 '책만 좋다'는 건 아니다. 좋은 영화가 좋고, 좋은 음악이 좋듯이, 좋은 책이 좋은 거다. 그럼에도 책은 다른 매체에 비해 총체적인 사고가 들어오게 하는 데 강하다. 인터넷 정보는 파편화된 정보다. 그것으론 전체를 잡을 수가 없다. 간략화된 것은 뼈대는 추려져 있지만 살의 촉감은 하나도 살아 있지 않다. 그에 비해 온전하게 뭔가 하나를 뽑고, 좋은 것을 뽑을 만한 사람들이 책을 쓴다. 나를 비롯해 모든 사람이 책을 쓸 땐 혼신의 힘을 다해 명료하게 쓴다. 그래서 책을 쓸 때 사고의 밀도가 제일 높다. 두 번째가 인터뷰나 강의이고, 세 번째가 친구와의 대화다. 책이야말로 정성을 다 들여서 독자들이 자기 생각을 잘 받아먹을 수 있게 정리해놓은 결집체다.

Q <다시, 책은 도끼다> 에서 철학자 쇼펜하우어를 인용하면서 주체적인 독서 자세를 강조했다. 요새는 손만 뻗으면 정보를 얻을 수 있고, SNS에서는 다양한 주장이 넘쳐나는 만큼 내 생각을 만들기가 어려워진 것 같다. 이런 시대에 어떻게 나만의 생각을 갖고, 주체적 독서를 할 수 있나?

이것 역시 왕도는 없다. 내가 주체성을 향한 의지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요새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보여준다, 고로 존재한다'이니까. 내가 실제 행복한지보다 인스타그램에서 행복해 보이는지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된 거다. 이렇게 가다 보면 내가 허망해진다. 예쁜 사진 10장을 올려서 '좋겠다', '부럽다'라는 댓글이 달렸어도, 정작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이건 허상인 거다. 반대로 사람들한테 알려지지 않아도 내가 진짜 찬란한 로맨틱한 걸 봤으면 그게 중요한 거다.

Q 지금까지 강연에서 멘토링도 많이 했고, 이번 책에서도 '자존'을 많이 강조해왔다. 본인 삶에서 흔들릴 때는 없나?

나도 지금도 고민이 있고 방황을 한다. 그런데 글쎄… (잠시 생각에 잠긴 후) 필요없는 방황을 안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손대지 못할 걸 걱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나이가 들어가는 게 싫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내가 나이 드는 게 싫어도 해결 방법은 없다. 그래서 좋다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편이다. 이런 식으로 잘라낼 고민은 잘라내는 거다.

Q 책을 사랑하는 애독가인 동시에, 저작 중 두 권이나 100쇄를 넘긴 인기작가다. 독자와 저자 중 한쪽 역할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택할 건가?

진실게임 같은 질문이다.(웃음) 가증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독자들의 공감은 매우 고마우나 내가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내 목표는 조용히 사는 거다.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처럼, 이번 책에도 나온 판화가 이철수 선생처럼 주변에 (일을) 많이 벌리지 않고 살고 싶다. 생산을 전제로 하지 않는 책 읽기를 하며 사는 삶이면 족하다. ​

▲ 박웅현 TBWA 크리에이티브 대표 (사진 기준서 스튜디오춘)

"'지식'이 아닌 '지혜'…인간과 알파고의 다른 점"

Q 최근 인문학계에 던져진 가장 큰 충격은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고와 인간 바둑기사 이세돌의 대결이 아니었을까? 인공지능 컴퓨터가 소설을 쓰는 시대라고도 한다. 인문학적 감성과 실용의 접점에 선 '광고장이'로서 이런 시대에 인간의 역할은 어떻게 변할 거라 보나?

기계가 인간을 따라올수록 점점 더 기계적이지 않은 유기체로서의 '나'를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더 큰 용량만 중시한다. 데이터나 정보의 양이 적더라도 그걸 지혜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기계는 데이터나 정보량이 적으면 그게 안 된다. 알파고도 이세돌이 한번 이기니까 데이터를 또 집어 넣지 않나.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 지점을 봐야 할 것 같다. 법정 스님이 '지식은 바깥에서 들어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우러나온다'는 말씀을 하셨다.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내가 사유하고 받아들인 건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읽는 건 30만 명이 할 수 있지만, 내가 읽고 사유해서 나온 것은 다른 30만 명의 것과 전혀 다를 것이다. 거기가 변곡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Q 30년이 넘는 세월을 광고인으로 살아왔다. 앞으로의 30년의 인생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

그런 건 없다. 나는 그냥 하루하루를 충실히 사는 게 목표다. 그래서 '개처럼 살자'라는 얘길 하곤 한다. 어제 꼬리 친 걸 후회하지 않고, 내일 공놀이 할 것을 미리 기대하지 않는다. 30년은 모르겠다. 다만 오늘 강연이 중요하고, 내일 회의에 들어가면 그 회의가 중요하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레빈의 삶이고, 본분사(本分事)다.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에게 꿈을 실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충실한 하루를 보내는 거라고 얘기한다. 그게 내 목표이기도 하고. 나도 이 일을 언제까지 할지 모르겠다. 인생은 흘러갈 것이고 내가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들어올 것이다. 다만 그 변수는 모르는 것이기에, 그냥 나는 내 눈앞에 있는 것들을 충실히 잘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인문학 강독회] "우리는 스마트폰이라는 개떼에 쫓기고 있다"

▲ 박웅현 TBWA 크리에이티브 대표 (사진 기준서 스튜디오춘)

<다시, 책은 도끼다> 출간을 기념해 인문학 강독회가 열린 그날은 마침 비가 왔고, 공연장이 있는 서울 신촌의 하늘은 어둡고 흐렸다. 하지만 강연장 좌석에 앉아 무대를 마주했을 때 바깥의 우중충함과는 다른 열기가 느껴졌다. '각자의 오독, 나만의 독법’이란 현수막이 걸린 강연장의 객석 700석이 가득 찼고, 무대 위에 흑과 백의 의상으로 심플하게 단장한 그의 모습이 등장했다.

박웅현은 "이런 무대를 만들어준 것은 <책은 도끼다>가 아니라 독자 여러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란 말로 가장 먼저 독자들을 향해 고마움을 표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가장 '책'과 가까운 자리가 될 거라 예상했던 강연은 의외로 책이 아닌 그가 '우연히' 만난 시, 음악, 영화로 채워졌다. 인문학적인 훈련을 통해서 감흥하는 법을 배운다면 똑같은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다는 게 그가 말하고자 한 요지다.

"똑같은 현상을 봐도 인문학적인 훈련이 된 사람은 감동을 받지요. 그런 데 능한 사람이 시인입니다. 보통 간장게장을 보면 먹어야 하는 건데, 안도현은 간장게장을 가지고 사람 눈물을 빼죠. 담쟁이를 보고 예쁘다고 할 때 도종환은 ‘저것은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라고 하는 절창을 씁니다. 시인이 본 것과 제가 본 담쟁이가 다른 것일까요? 차이는 하나죠. ‘눈’입니다. 똑같은 담쟁이를 보고서도 인문학적인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은 시를 쓸 수 있는 겁니다."

황세희 명창의 '쑥대머리', 짐 리브스가 부른 'He will have to go', 영화 '파리', 영화 '시', 영화 '아마데우스' 등 박웅현이 일상생활에서 만난 다양한 음악과 영화가 소개되었다.

"세상에 좋은 것은 많습니다. 내가 잡지 못한 것일 뿐이죠. 친구가 되려면 시간이 걸리고요. 자세히 보아야 예쁩니다. 우리는 어쩌면 스마트폰이라는 개떼에 쫓기고 있습니다. 음악도 한 번 듣고, 두 번, 세 번, 네 번 다시 듣고, 가사를 찾아보고, 내 감정을 밀어넣어 보고, 눈물 흘려보는 겁니다. 알파고가 못하는 것은 눈물 흘리는 것일 겁니다. 저는 인문학을 하면 우리 연봉이 두 배로 올라간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다만, 인문에는 우리 외부환경이 아닌 그 환경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바꿀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영화 '어바웃 타임'.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오늘, 일상이라는 순간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향유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하며 강연회를 마쳤다. 강연장을 빠져나와 집에 돌아가던 독자들에게 세상의 풍경이 달리 보이지 않았을까? 함께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인문학의 생각을 공유하면서 이전과 다른 '눈'을 갖게 되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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