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감사하다. (Thanks, Korea)”

이 말을 남긴 이는 미국의 데이비드 본드라는 남성이다. 한국의 언론이 사실관계 확인 없이 기사를 써준 덕분에 2년치 집세에 가까운 큰 돈을 벌게 됐다는 다소 황당한 주장이다.

미국인 데이비드 본드(가명)는 지난달 9일 아시아 지역의 한 언론인 라이스 데일리라는 매체에 기고한 글을 통해 “2년 간 돈을 벌기 위해 아시아 언론사들을 속여왔다”며 “촬영된 영상은 모두 거짓”이라는 주장을 폈다.

해당 기고글에 따르면 데이비드 본드는 2014년 ‘내 친구가 중국 남자의 여자친구를 훔치는 장면’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동영상에 대해 홍콩 언론과 짧은 인터뷰를 했다. 해당 영상이 실제로 ‘여자친구를 훔치는’ 장면이 아니라며 사실관계에 대한 해명을 했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본드는 그러나 당시 언론들이 사실관계 해명보다 사생활에 더 초점을 맞춰 보도를 하는 바람에 자신이 더 큰 비난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러한 자극적인 내용의 소재가 언론에서 즉시 기사화가 되고, 이것이 심지어 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고 밝혔다.

한국에서도 트래픽이 몰리는 걸 본 데이비드는 한국에도 ‘떡밥’을 던졌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데이비드 본드, 한국에 가다’라는 가짜 동영상을 제작해 올렸는데, 이어 그의 웹사이트 트래픽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한국 언론들도 이 내용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4월 한국 언론들은 ‘원나잇 헌팅남’ ‘본드 주의보’ ‘야동 헌팅男’ 등의 제목을 달아 데이비드 본드라는 인물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그가 서울 이태원과 홍대 등지에서 한국 여성을 ‘헌팅’하고 음란 영상을 찍어 온라인에서 팔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이다.

▲ 지난 4월 데이비드 본드 관련 온라인 기사 목록. '백인남' 등 외국인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제목이 눈에 띈다.
그가 기고 글을 통해 주장하는 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언론들의 사실관계 확인 없는 무책임한 보도’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이 올린 동영상은 ‘야동’이 아닌 평범한 여행 장면이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에 대한 확인 없이 언론들이 자신을 ‘플레이보이’로 만들었고, 이에 따라 동영상도 엄청나게 팔려나가면서 “2년 치 월세를 벌게 됐다”는 주장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이 사실일까. 확인은 쉽지 않다. 그의 주장처럼 그가 동영상 판매로 2년치 월세를 벌었는지, 해당 동영상들이 다 조작된 것인지 등은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그가 기고글을 실은 매체인 라이스 데일리 역시 “해당 기고 글은 작성자의 의견과 관점이 표현된 것이며 ‘라이스 데일리’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 아니다”라고 명백히 밝혀놓았다. 즉, 그가 해당 매체를 통해 밝힌 글 내용은 말 그대로 주장일 뿐이다.

▲ 데이비드 본드의 기고글 중 일부. 그는 한국 언론이 사실 확인 없이 자신을 플레이보이로 묘사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이 거짓일 수 있는 하나의 근거는 그가 꾸준히 유투브 계정으로 올린 동영상들 때문이다. 실제로 동영상 속에는 지난 4월 한국 언론들이 문제를 지적한 것처럼 그가 아시아 여성들로 보이는 이들과 진한 스킨십을 나누는 모습이 담겨있기도 하다. 지금와서 갑자기 그가 ‘야동’은 없었으며, 이를 확인없이 보도한 한국 언론을 탓하고 나서는 것이 오히려 의아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다만 재밌는 사실은 ‘사실관계 확인 없이 쓰는 한국 언론’에 대한, 사실관계도 명확하지 않은 주장 글을 인용 보도하면서 한국 언론들은 또 다시 ‘사실관계 확인 없이’ 기사를 썼다는 점이다. 지난 4월 데이비드에 대한 ‘주의보’ 기사를 썼던 일부 언론들도, 이번 데이비드의 기고 글을 인용보도하며 한국 언론들이 확인없이 기사를 쓴다고 지적하는 ‘유체이탈’을 보여주기도 했다.

헤럴드경제는 지난 2일 “‘야동 헌팅男’ 홍대·이태원 출몰?…자작극에 놀아난 한국언론”이라는 온라인 기사에서 “한국 언론이 사실 확인도 없이 자신의 주장을 그대로 보도해 웹사이트 수익으로 2년치 집세를 벌었다고 밝혔다”면서도 이에 대한 데이비드 본드의 주장만 인용했다. 이투데이는 “아시아 여성 원나잇 헌팅남 ‘한국 언론이 나를 플레이보이로 만들었다”는 제목을 달아 데이비드 본드의 입장만 담은 카드뉴스를 만들기도 했다.

YTN은 지난 4월5일 “아시아 여성 노리는 작업 주의보 ‘성관계 동영상 유포’”라는 기사를 내보낸 바 있으나 현재 이 기사는 삭제된 상태다. 지난 2일 YTN은 “한국에 ‘원나잇’하려고 입국했던 외국인 남성의 근황”이라는 기사를 통해 “언론사들은 ‘데이비드 본드 주의보’ 기사를 내며 그의 행보에 주목했다”며 “한국 언론 문화의 부끄러운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고 전했다.

한 인터넷 매체 관계자는 "온라인 기사의 특성 상 일일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쓸 수 없어 이번 기사도 데이비드의 주장만 정리해서 쓴 것"이라고 밝혔다.

▲ 데이비드 본드가 기고글을 올린 뒤 나온 기사 목록.
이러한 일련의 인터넷 매체 보도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데이비드 본드는 인터넷 트래픽에 매달리는 한국 언론의 관심을 어떻게 끌 수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외국인 혐오 정서에 기반한 ‘떡밥’을 던졌을 때 한국 언론들이 쉽게 물 수 있으며, 그리고 떡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언론사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점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번 기고글에 대해서도 그는 한국 언론들이 자신에게 재차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고 또 다시 기사화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따라서 그의 기고글 역시 거짓이 섞여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기 힘든 그의 글 속에서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그가 한국 언론에 던진 메시지가 아닐까. 한국에 그는 감사하다고 밝혔다. 한국의 언론이 쏟아낸 자신과 관련한 보도와 트래픽 덕분에 2년 치 월세를 벌었기 때문이다. 이 말도 거짓일지는 모르지만, 정확한 보도보다는 트래픽을 올리는데 급급한 한국 언론이 또 다시 비슷한 ‘떡밥’을 물 것 만큼은 사실로 보인다. 그의 글은 “계속 지켜봐달라(Stay tuned)”는 말로 끝난다.

미디어오늘은 3일 데이비드 본드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라이스 데일리'에 실린 이야기에 대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나의 기사는 모두 사실"이라며 "한국 미디어는 사실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인터뷰를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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