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정치권의 대리전쟁을 하는 것 같다. 절대 밀리면 안 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렇게 싸우는데 정신적으로 버틸 수가 있나?”

지난 2일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 이사회 현장을 방문진 기자실에서 TV 화면으로 시청하던 한 인사의 말이다. 

국회가 여‧야로 나뉘어 한 치도 물러남이 없이 치열하게 싸우는 것처럼 방문진 이사(여‧야 6대3)들도 정파적으로 나뉘어 서로를 헐뜯고 있다는 취지였다. 

고성과 막말, 심지어 욕설까지 터져 나오는 복마전. “예능보다 재밌는 게 방문진 이사회”라는 조롱이 어색하지 않은 곳. 전투를 마다하지 않는 전사들이 격돌하는 그곳. MBC 사장 임면권을 갖고 있는 대주주 방문진이다. 

“방문진 이사회 전날에는 밥맛이 뚝 떨어진다.” ‘그렇게 싸우면 피곤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야당 추천 최강욱 이사는 사석에서 이처럼 말했다. 최 이사는 2012년부터 임기(9기)를 시작해 지난해 연임(10기)한 야당 추천 이사다. 

▲ 야당 추천 최강욱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사진=미디어오늘)
그는 9기 방문진 때부터 MBC 경영진 전횡을 캐묻고 여당 이사들과 전투적으로 맞섰다. “MBC 해직자들과 공영방송 정상화에 도움”이 되고자 이사가 됐지만 4년 동안 MBC 상황은 악화하고 있다는 현실에 좌절과 모멸감을 느끼고 있다. 

“9기 때는 (여론의) 눈치라도 봤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여당 이사들이) 대놓고 거짓말을 하니….”

최 이사는 종종 방문진 이사회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MBC가 부당한 해고‧징계를 자행해 법원에서 패소해도, 그 결과 소송에 가늠할 수 없는 비용을 지불해도, 책임을 묻지 않고 되레 임원 성과급 잔치를 벌이는 방문진 여당 이사들에게 전혀 소통을 기대할 수 없어서다. MBC 경영을 관리‧감독할 권한과 책임이 있음에도 여당 이사들은 함구한 채 요지부동이라는 것.

기자가 지난 4년여간 방문진을 지켜본 결과, 방문진 이사회 논의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이 패턴은 9기 때에 비해 10기에 더욱 공고해졌다. 

▲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①야당 추천 이사들의 문제제기 봉쇄 

일례로 야당 추천 이사들이 MBC 언론인 징계 관련 재판에서 연이어 패소하는 MBC 경영진을 도마 위에 올리면, 여당 이사들은 “아직 (대법원) 재판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 “MBC 인사권에 개입할 수 없다”는 식이다. 

②본질을 흐리는 물타기

백종문 MBC 미래전략본부장이 MBC 언론인을 “근거없이 해고했다”는 정황이 담긴 ‘백종문 녹취록’이 대표적이다. 여당 이사들은 “사적 자리에서 나온 부적절한 발언” 정도로 치부하면서 사안을 축소하고 백 본부장을 두둔한다. 야당 이사들의 질문에도 백 본부장이 “지난번에 나와서 얘기했다”며 답변을 거부하는 것도 여당 이사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왜?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까.

③표결로 야당 안건 뭉개기 

야당이 제시한 안건은 번번이 머릿수에 밀려 폐기되거나 뭉개진다. ‘백종문 녹취록’ 건도 그랬다. 

국회의 지적사항이었던 ‘속기록 작성’ 건의 경우 속기록 작성 관련 논의를 할지 여부를 표결에 붙이려다 파행을 빚는 촌극이 발생했다. 언론학자인 여당 추천 유의선 이사는 “회의에서 나오는 험한 말을 공개하는 것이 국민들의 알권리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여·야가 극심하게 대립하면 슬그머니 표결 카드를 꺼내는 여당 이사들의 꼼수다. 

④말꼬리 잡고 막말, 인신공격

상황이 이렇다보니 소수 야당 이사들은 책임을 묻지 않으려는 여당 이사들에게 격한 말을 쏟아내고, 삽시간 안에 목소리가 높아진다. 기명으로 속기록이 작성되지 않으니 험한 말도 서슴없이 나온다.

특히 오랫동안 언론 민주화 운동을 해온 야당 추천 이완기 이사에 대해서는 인신 공격적인 발언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 2일만 해도 이 이사가 방문진의 해외출장 문제를 도마 위에 올리자 한 여당 이사는 “이 이사가 (해외출장을) 엉터리로 갔다 와서 (사안을 잘 모른다)”라고 말했고 “보고서를 한 번도 보지 않으신 (이완기 이사)”라며 비아냥댔다. 

이 이사가 “밖에서는 MBC를 ‘범죄집단’이라고 말한다”라고 하자, 물 만난 고기 떼처럼 여당 이사들이 돌아가며 “이 이사가 말하는 ‘밖’은 어디냐. 특정해봐라”고 따지는 등 말꼬리를 잡았다. 

▲ 방송문화진흥회 야당 추천 최강욱 이사, 이완기 이사, 유기철 이사. (사진=이치열 기자)
흥분한 이 이사의 말이 거칠어지면 여당 이사들이 다시 꼬투리를 잡고 조리돌림을 한다. 자연스레 오가는 말은 격해질 수밖에 없다. “이 XX”, “이 자식”, “저 자식” 욕설과 고성이 오가고 회의나 안건은 무산된다. 

10기 방문진을 출입한 경험이 있는 한 일간지 기자는 “다 큰 어른들이 최소한의 품위도 없이 싸우는 모습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 처음 갔을 때는 크게 당황했다”며 “어떤 안건이 올라와도 이사장과 여당 측 이사들 의견과 다르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상황에서 방문진이 왜 존재하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꼬집었다. 

방문진 10기의 분열과 파행은 여당 이사조차 학을 떼게 했다. 여당 추천 방문진 김광동 이사는 2일 이사회 직후 기자와 통화에서 “윗사람으로서 못 볼 꼴 보여준 것 같아 미안하다”고 유감을 표했다. 

그는 “이런 식의 회의는 무의미하다”며 “10기 방문진 이사들은 9기 때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고, 상대방에 대해 격한 분노를 표출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부 여‧야 이사들을 지목하고 그들의 막말에 우려를 표했다. 점잖은 축에도 속하는 김 이사지만, 그 역시도 보수 색채가 강한 인사다. 

문제는 6대3 이사진 구조

결국 정부‧여당에 쏠릴 수밖에 없는 6대3 이사진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막장 예능 활극’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지금껏 정치권은 이 문제에 귀를 닫아왔다. 방문진 이사 교체 시기가 되면 관행상 여‧야 정치권은 누구를 채워 넣을지부터 고민했다.

2008년 ‘광우병 촛불’ 이후 MB정부는 MBC를 장악하는 수단으로 보수의 정권 창출 주역인 뉴라이트 인사들을 대거 집어넣었고 야권에서는 이에 맞설 사람을 언론계‧시민사회 추천을 받아 채우는 데 급급했다. 

실제 뉴라이트 인사인 여당 추천 김광동 이사는 사석에서 기자에게 MB 정부 이동관 전 청와대 대변인 추천으로 방문진에 오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방송 전문성보다는 정권에 대한 특정 인사들의 이념이 중시됐던 것이다. 

언론 운동권, 이른바 진보 진영에서는 9기 방문진 임기가 끝난 이후 “야권 이사들이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진보 진영 역시 전문성보다는 시급했던 투쟁과 대응력에 초점을 맞췄던 것. 방문진 무용론과 함께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터져 나오는 이유다. 

▲ 서울 여의도 방송문화진흥회. (사진=김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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