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환영 전 KBS 사장이 KBS 뉴스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판결이 잇달아 나오고 있지만, 정작 길 전 사장을 해임제청한 KBS 이사회는 2년 전 길 전 사장의 보도통제 문제를 해임사유에서 삭제했던 사실이 조명을 받고 있다.

길 전 사장 해임 후 그가 KBS 뉴스에 개입했다는 판단은 최근들어 사법부에서 판결을 통해 나오고 있다.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의 징계무효소송 판결(지난달 29일) 뿐 아니라 현재 진행중인 길환영 전 사장의 KBS사장해임취소소송의 1심 판결결과에도 길 전 사장의 KBS 보도개입 판단이 나타나있다.

문제는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2년 전 길 전 사장의 보도통제 문제를 폭로한 이후 문제가 돼 결국 길환영 사장이 사장직에서 해임됐으나 정작 KBS 이사회 해임제청사유에는 없다는 데에 있다. 이에 따라 KBS 이사회의 역할론이 제기된다.

미디어오늘이 입수한 길환영 전 사장의 해임처분취소송 1심 판결문을 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2부(재판장 박연욱 부장판사)는 지난해 9월3일 판결에서 KBS 이사회가 2014년 6월5일 임시이사회에서 길 전 사장 해임제청 사유로 △사장으로서 직무수행능력 상실 △부실한 재난보도와 공공서비스 축소 △공사 경영실패와 재원위기 가속화 등을 사유로 해임제청안을 가결했다고 밝혔다. 이후 길 사장은 엿새 뒤인 그해 6월11일 박근혜 대통령이 해임했다.

그러나 처음 해임제청안엔 보도통제 문제가 포함됐다 막판에 삭제됐다. KBS이사회는 2014년 5월26일 790차 임시이사회에서 해임제청안을 상정하면서 그 사유로 △보도통제를 통한 방송편성의 자유 및 공사의 독립성 훼손 △조직관리 및 운영능력의 완전 상실에 따른 사장으로서의 직무수행 불가능 △세월호 보도, 뉴스 불방 등 방송서비스 축소ㆍ중단에 따른 공사의 대표 및 업무총괄자로서의 책임 △공사 경영 실패에 따른 재원위기 가속화 등 4가지 명시됐다고 법원 판결문에 기재했다.

▲ 길환영 전 KBS 사장
이틀 뒤인 5월28일 791차 정기이사회 땐 ‘보도통제를 통한 방송편성의 자유 및 공사의 독립성 훼손’을 ‘보도통제 의혹 확산에 따른 공사의 공공성과 공신력 훼손’으로 변경했다. 이후 이사들은 길 전 사장 해임제청안을 의결한 그해 6월5일 임시이사회에서는 아예 해임제청사유에서 ‘보도통제 의혹 확산에 따른 공사의 공공성과 공신력 훼손’ 부분을 삭제했다고 재판부는 기록했다. KBS 이사회가 길환영 전 사장을 해임제청하면서 정작 보도통제 부분은 그 사유에서 빠진 아이러니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재판을 이끌어온 재판부는 길 전 사장의 부당한 보도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양대노조의 파업 등 극심한 파행, 세월호 당시 승객 구조 오보로 인한 국가기간방송의 신뢰 훼손 등을 들어 “이러한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원고가 보도에 개입하는 등 공영방송의 독립성․공정성․자율성을 침해하였다는 의혹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원고(길 전 사장) 스스로도 자신이 업무를 수행하는 방식에 따라 보도나 프로그램에 개입한 것으로 비칠 수 있었으나, 이런 사태가 확산되기 전에 담당자로부터 아무런 항의를 받지 않았다는 취지로 변명하는 점에 비추어 보면, 길 전 사장이 보도에 개입한다는 의혹은 이 사태가 확산되기 전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재판부는 또한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보도개입 폭로 발언 이후 대응에 대해 “길 전 사장이 일련의 사태에 대해 신속하고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고, 사태가 악화돼갔지만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실효성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등의 적극적인 노력을 보이지도 않았다”며 “KBS 사장으로서의 공적 책임을 실현하여야 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재판부는 이런 이유 등을 들어 길 전 사장의 사장 해임 취소소송을 기각했다.

이밖에도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이 제기한 징계무효소송에서 서울남부지법 민사13부(재판장 김도현 부장판사)는 지난달 29일 판결에서도 길환영 전 사장이 보도내용에 개입해 독립성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 지난 2014년 5월28일 KBS 이사회에 참석하는 KBS 이사들이 이사회 회의장소 밖에서 농성중인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조합원들 뒤로 지나가고 있다. 사진=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재판부는 길 전 사장이 2013년 3월 이화섭 당시 보도본부장 및 국장급 간부들과 만난 자리에서 기계적 중립을 포기하라고 발언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기계적 중립을 포기하라’는 길환영 전 사장의 발언은 KBS 뉴스 보도 개입과 그 개입 내용, 길 전 사장의 지위와 김시곤 전 국장 등 간부들과의 관계 등에 비춰 보면, 정부와 여당에 유리한 편파적 보도를 요구한 것으로 해석하거나 그러한 의혹을 사기에 충분해 보인다”며 “길 전 사장이 이 발언을 통해 KBS 보도 내용에 개입해 독립성을 침해했다고 보인다”고 판단했다.

이 재판부는 길 전 사장이 김시곤 전 보도국장에게 오후 5시를 전후로 9시 뉴스 큐시트를 전송할 것을 지시했고, 김 전 국장으로부터 이를 지속적으로 받았다고도 설명했다. 특히 길 전 사장이 지난 2014년 4월23일 김 전 국장에게 9시 뉴스에서 대통령 관련 리포트 순서를 앞쪽으로 배치하라는 요구를 하자 김 전 국장은 길 전 사장에게 ‘오늘은 대통령 리포트 순서를 뒤로 배치하고 내일부터 자연스럽게 앞쪽으로 배치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자칫 역풍이 불면 대통령께도 누가 될 수 있다’는 취지의 답을 한 점 등을 사실로 인정했다.

이를 두고 KBS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당시 KBS 야당추천 이사였던 김주언 전 이사는 17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길 전 사장이 해임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에 해당되는 길 전 사장의 보도개입 문제에 대해 정작 KBS 이사회에서는 막판에 삭제했다”며 “혹시라도 ‘보도통제’를 사유로 해임제청안을 내면 청와대가 보도통제를 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여당추천 이사들이 반대할 것으로 예상해 마지막 이사회 때 (야당추천이사들이) 빼고 제출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 전 이사는 “지금은 여러 판결에서조차 보도통제와 간섭을 사실로 보인다고 인정하는데, 해임문제를 직접 논의한 우리 이사회에서는 그것을 왜 뺐느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며 “여당추천 이사는 청와대와 여당의 눈치만 보면서 하라는대로 하고, 야당추천이사는 쪽수에서 밀리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이사회 자체의 구조적 문제점 때문에 KBS를 지도감독하는 이사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번 기회에 사장선임구조를 비롯해 이사회 이사 구성 문제 등도 낱낱이 따져보고 뜯어고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 김시곤 전 KBS보도국장이 국장시절 기록해둔 이른바 '비망록'(국장업무일일기록). 이미지=이우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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