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통신사와 특정 기업이 제휴한 서비스의 데이터 요금을 내지 않도록 하는 ‘제로 레이팅’ 도입을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통신사와 대형 콘텐츠 서비스 사업자들은 도입을 원하고 있지만, 중소사업자들에 대한 차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지난 15일 ICT 정책에 관해 업계의 견해를 듣는 ‘정책 해우소’를 열고 제로 레이팅 도입에 관한 논의를 했다고 17일 밝혔다. 제로 레이팅은 통신사(망 사업자)가 특정 콘텐츠서비스 사업자와 제휴를 맺고 해당 서비스를 이용할 때 나오는 데이터 이용 대가를 받지 않고 무료로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제로 레이팅이 제도로 도입되지 않았지만 제로 레이팅으로 볼 수 있는 몇몇 서비스가 나온 상태다. 인터넷 쇼핑몰인 11번가는 쇼핑을 하는 동안 나온 데이터 요금을 11번가가 부담하고 있고, 카카오 택시 기사들이 쓰는 택시 앱의 데이터 요금도 카카오가 부담하고 있다. 다만, 이들 서비스는 망 사업자가 아닌 콘텐츠 제공 사업자들이 주도하기 때문에 별다른 논란이 되지 않았다. 미래부는 제도를 정식으로 도입하면서 망 사업자가 주도하는 서비스까지 포함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 인터넷 쇼핑몰 11번가의 데이터 프리 정책. SK텔레콤 가입자의 11번가 쇼핑 데이터 요금은 11번가가 부담해 소비자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통신사와 대형 콘텐츠 서비스 사업자들은 제로 레이팅 도입에 긍정적인 입장이다. 정책 해우소에서 KT 관계자는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통신산업의 중심은 플랫폼 중심으로 개편되고 있다. 상생의 논의를 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카카오 관계자 역시 “통신사와의 제휴는 콘텐츠 제공사업자에게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통신사와 대형 콘텐츠 서비스 사업자들이 이처럼 제로 레이팅의 도입을 반기는 까닭은 서비스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KT와 카카오가 카카오 관련 서비스 데이터를 저가에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카카오팩’을 내놓는 등 지속적인 제휴모델을 추진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또, 스스로 ‘콘텐츠 기업’이 되려 하는 통신사 입장에선 제로 레이팅이 도입되면 자사 모바일IPTV 서비스를 전폭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

제로 레이팅은 표면적으로는 사업자들이 원하고 이용자에게도 혜택이 있기 때문에 모두에게 좋은 정책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사업자들 간 ‘장벽’을 만들어 차별하는 등 망 중립성 침해 소지가 크다는 점이다. 망중립성은 인터넷 망을 소유한 기업이 자사에 유리하게 망을 설정하고, 경쟁사업자를 차단해선 안 된다는 개념이다. 

특히, OTT로 대표되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나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는 데이터 비용이 관건이기 때문에 통신사와 제휴를 맺지 못하면 시장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망을 쥔 통신사가 자사 모바일IPTV의 스트리밍 데이터를 무료로 제공한다면, 망이 없는 스타트업 서비스인 왓챠플레이에겐 불리할 수 밖에 없다. 통신사가 데이터 비용을 부담하게 되면 작은 콘텐츠 사업자 입장에선 통신사에 줄을 대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제로 레이팅을 통한 군소사업자 차별이 혁신을 가로막아 결국 이용자 피해로 돌아온다는 지적도 있다. 웹(WWW)의 창시자 팀 버너스-리는 지난해 2월 유럽연합 사이트에 올린 글을 통해 “(제로 레이팅을) 명시적으로 불법이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엄청난 힘을 통신사와 온라인 서비스 오퍼레이터에게 넘겨주게 될 것”이라며 “경쟁을 밀어내고 혁신적인 새로운 서비스가 빛을 보기도 전에 파괴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래부 관계자는 18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제로 레이팅의 망 중립성 침해 여부에 관해 “국내에서도 무조건 차별적인 서비스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공정경쟁’을 저해하는 경우 등에 한정하고 있기 때문에 망 중립성에 문제가 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면서 “다만, 이제 논의가 시작단계로 특정 기준이 정해진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래부 관계자는 “제로 레이팅은 망 사업자인 통신사나 콘텐츠 제공 사업자 중 누가 요금을 부담하든 상관없이 적용한다”고 말했지만 망 사업자가 제로 레이팅의 주체가 되면 망 중립성 문제를 비껴갈 수 없다. 망 중립성 가이드라인은 망 사업자가 차별적인 망을 제공하면 망 중립성을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콘텐츠 서비스 사업자가 망 비용을 부담하는 건 가이드라인 적용 범위 밖이며 공정거래법으로 판단할 문제다.

미래부가 지난해 KT가 월 3300원으로 카카오의 서비스를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다음카카오팩’에 망 중립성을 침해할 소지가 크다는 판단을 내리면서도, 카카오 택시기사들의 택시앱 데이터를 카카오가 부담하는 서비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 미래창조과학부는 카카오 관련 서비스를 저가에 제공하는 KT의 카카오팩이 망 중립성 침해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제로 레이팅을 도입하되 통신사 중심의 서비스는 숙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통신사 등 망사업자 주도로 도입이 되고, 망 사업자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면 원활한 인터넷 생태계 조성에 저해가 될 수 있다”면서 “카카오팩에 대한 미래부의 판단도 같은 맥락이었다. 미래부는 제로 레이팅이 무조건 괜찮다고 할 게 아니라 망 중립성을 훼손할 수 있는 통신사 주도의 제로 레이팅은 거르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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