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과거사와 현재 외교정책, 대북문제 등은 냉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변수가 아닌 상수인 냉전에서 다양한 평화의 논의 역시 부족할 수밖에 없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개성공단 폐쇄로 인해 남북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우리가 다른 지역의 냉전사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서울대 사회대 아시아연구소 동북아시아센터에서 ‘글로벌 냉전의 이해’라는 주제로 각 지역의 냉전사에 대한 릴레이 강연을 이어간다. 7일 두번째 시간에는 김학재 독일 베를린자유대 동아시아대학원 박사후 전임연구원의 ‘두개의 냉전, 두 개의 평화’라는 제목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냉전사에 대해 비교했다. 대통령이 ‘통일대박’을 외쳐 독일식 흡수통일론이 힘을 얻고 있는 가운데 유럽과 동아시아의 냉전이 얼마나 다른지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다. <편집자주>

독일은 재통일(1990년 10월3일)한지 벌써 사반세기가 지났다. 정치인들은 해마다 동서독 통일을 어떻게 기념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을 넘어, 통일의 경험을 통해 시리아 난민들과 어떻게 사회통합을 이룰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반면 2016년 봄 한반도는 북한 핵실험과 한미 키리졸브 군사훈련 등으로 호전적인 분위기다. 유럽과 동아시아는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 동서독을 갈랐던 베를린 장벽이 1989년 11월9일 붕괴하는 모습. 이후 독일은 1990년 10월3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가입하는 형식으로 통일했다.

유럽통합을 설명하는 다양한 분석이 있다. 전통적으로 유럽에는 국민국가(nation state)간 체제를 넘어 연방을 형성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국제기구 등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 민족해방이 아닌 연방을 통해 결합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다.

시장통합을 통해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와 같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만들거나 집단안보를 추구해야한다는 주장(기능주의)도 있었다. 연방주의 운동보다는 기능적인 필요성에 의해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공동체를 만들고, 분업관계를 통한 연대로 평화를 추구하자는 내용이다. 또한 연방주의나 기능주의와 달리 공동체를 만들기보다는 협력이나 의존과 같이 국가간 양자관계를 토대로 유럽이 통합했다는 주장(Intergovernmentalism)도 있다.

김학재 독일 베를린자유대 동아시아대학원 전임연구원은 유럽냉전사에서 화해와 협력이 어떻게 제도화했는지에 초점(역사 제도주의)을 뒀다. 여기서 제도란 구성원들이 서로의 행동을 구속할 수 있는 명시적, 묵시적인 원칙·규범·기구·정책 등을 포괄하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가들이 각자의 국익을 추구하면서도 서로 협력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 관점에 근거한 의견이다.

전혀 달랐던 유럽과 동북아의 냉전 초기상황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유럽의 당면과제는 전후처리와 평화체제 만들기였다. 유럽은 19세기부터 진행한 산업화로 국가간 수준이 비슷했기에 경제협력을 통한 재건의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이미 국민국가를 형성한 뒤 냉전이 찾아왔기 때문에 미국과 소련에 대응할 수 있는 제3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었다. 즉 유럽이 통합해 미·소 갈등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전범국에 대한 대응도 동아시아에 비해 손쉬웠다. 문제국가는 독일 하나였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는 독일의 재무장을 막기위해 독일 영토를 네 부분으로 쪼개서 점령했다. (소련의 경우 2차 대전에서 2700만 명의 소련군이 사망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어 분할점령의 명분이 있었다.)

반면 동아시아는 복잡했다. 전쟁이 끝나고 대다수 아시아 국가들은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했다. 당면과제는 전후처리가 아니라 독립이었다. 냉전구도에서 탈식민 국가들은 정부가 세우기 시작했고, 특히 한반도와 같은 냉전의 최전선에서는 이념에 근거한 정부가 수립했다.

▲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인민군 포로들이 무장 경비병에 둘러싸여 지시사항을 듣는 모습.

동아시아가 제3세력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도 없었고, 산업화가 진행된 나라는 일본뿐 이라서 주변국과 공동재건을 해야 한다는 이해관계도 희박했다. 가장 큰 문제국가는 일본이었지만 그 외에도 중국 공산당과 대만 국민당의 갈등, 두 국가와 한국·일본의 관계, 한반도 분단 등 유럽보다 문제가 많았다.

냉전대립의 강도와 속도의 차이

동아시아는 냉전 구조에 압도당했다. 한국전쟁(1950~1953) 중에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을 통해 주권을 회복했다. 동아시아 자유진영 국가들은 1950년대 미국과 양자동맹을 체결했다. 독일과 한반도의 통일정부구성이나 외국군 철수문제를 다루기 위한 제네바 회담(1954)이 시작할 때 상황만 비교해도 한반도는 이미 3년간의 전쟁을 마친 양극적인 상황이었지만 유럽은 뚜렷한 이념갈등이 드러나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한반도와 같은 냉전 이데올로기 적대감이 1950년대를 지나며 거의 사라졌다. 한국전쟁 이후 서독의 재무장 필요성이 나왔지만 제네바 회담 이후에나 재무장할 수 있었다. 일본과 달리 독일은 1991년에서야 주권을 회복한다. 서독이 자유주의 진영, 동독이 사회주의 진영에 영향은 받았지만 1960년대까지 각 체제의 국가라고 단정하기 어려웠다.

서독은 프랑스와 소련의 견제로 1955년이 돼서야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에 편입했다. 나토에 가입했지만 소련과 외교관계도 수립한다. 동아시아는 미국과 북한의 외교관계가 단절됐고, 한국과 일본의 외교관계도 1965년, 미중은 1970년대에 와서야 회복하는 등 한국전쟁 이후 한동안 교류 자체가 없었다. 동아시아는 유럽보다 냉전의 대립 강도와 속도가 압도적으로 크고 빨랐다.

각자의 이익이 모여 파트너로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 1952)는 독일의 재무장을 막기 위해 군수물자의 기본인 석탄과 철강을 공동으로 관리하면서 서로 신뢰를 쌓는 기회가 됐다. 독일 재무장 억제를 주도하려는 프랑스, 전후 상실한 명예를 회복하려는 독일, 특정 국가가 유럽을 주도하는 것을 막으려했던(세력균형) 이탈리아나 베네룩스 3국 등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이는 1957년 유럽 원자력공동체(EURATOM, 유라톰)으로 이어졌다. 원자력 역시 에너지원이자 동시에 무기로 활용할 수 있는 물질이었기 때문에 공동생산·공동소비를 통해 공동의 이해관계를 만들 수 있고, 프랑스는 재건을 위한 물적 토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 참여했다. (이후 프랑스 핵실험은 1960)

이외에도 로마조약으로 유럽경제공동체(EEC, 1957)가 설립됐고, 거대한 미국시장으로부터 유럽산업 보호하기 위해 서유럽 관세동맹(1968)이 생겼다. 이후 EEC가 유럽연합(EU, 1991)으로 전환했고 동유럽 국가들이 EU에 가입했다. 이는 유럽 지역 간 무역을 확대하는 효과 뿐 아니라 ‘하나의 유럽’이라는 정체성까지 만들었다.

▲ 사진=pixabay

반면 동아시아는 경제협력의 유인이 적었다. 냉전 초기 동아시아의 무역이란 산업화를 어느 정도 마친 국민국가 간 경제협력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과 같은 후발산업국에 대해 동맹국 미국이 원조하는 형태였다.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며 커진 중국, 일본 시장은 그 자체로 큰 시장(세계 2, 3위)이었기 때문에 지역 내에서 협력할 유인을 찾지 못했고, 개별국가가 WTO 등 국제기구에 직접 가입하는 형식을 보였다.

화해분위기에서도 달랐던 유럽과 동아시아

유럽과 동아시아 냉전사를 보면 첫 한걸음이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미소갈등 상황에서 유럽의 독자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는 냉전 초기의 아이디어는 결국 독일 통일과 유럽연합이라는 결과를 만들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동아시아는 여전히 냉전체제에 살고 있다. 갈등 상황에서 패권국에 주도권을 넘겨 준 수동적인 모습은 화해모드에서도 나타났다.

서독 빌리브란트 총리(사회민주당)는 10년 이상 집권하면서 소련 모스크바 협약(1970), 서독-폴란드 협약(1971), 서독-동독 기본협약(1972) 등 동방정책을 유지했다. 이는 헬싱키 예비회담(1972)과 헬싱키 최종합의서(1975)로 결실을 봤다. 사회민주당이 주도했던 동방정책은 기독민주당이 정권을 이어받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하지만 20년 뒤 한국의 북방정책은 헝가리, 폴란드, 유고와 수교(1989) 등을 통해 남북 기본합의서(1991)로 이어졌지만 이는 미약했던 평화의 시도였다. 역설적으로 문민정부 이후 북방정책은 후퇴했고,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남북화해 분위기는 다시 문민 보수정권에 의해 무너졌다. 북방정책은 동방정책보다 정책 일관성, 화해에 대한 정부의 의지 모두 부족했다.

탈냉전은 유럽에 평화를 가속했다.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이 민주화했으며 독일은 비핵화했다. 하지만 소련의 항복에 가까운 개혁·개방과 달리 중국은 체제를 유지하며 점진적으로 개혁·개방했다. 미국과 갈등이 고조됐다. 전선을 맞대고 있는 북한은 탈냉전 이후 핵개발에 돌입했다.

유럽에선 해결된 문제들이 동아시아에는 해결되지 않은 채 과거-현재-미래의 문제와 섞여 공존하고 있다. 냉전 초기의 작은 차이는 70여 년간 부챗살처럼 벌어져 전혀 다른 현실을 만들었다. 지역 내에 이렇다 할 제도가 없는 동아시아는 어떻게 평화를 만들어가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흡수통일은 한반도에 적용할 수 있을까? 유럽의 냉전사가 좋은 교과서인 동시에 위험한 도전을 남긴다.

※ 글로벌 냉전의 이해

1. 이동기 강릉원주대 교수 ‘몰락과 대결에서 안정과 평화로 : 전후 유럽 냉전사’
2. 김학재 독일 베를린자유대 동아시아대학원 박사후 전임연구원의 ‘두개의 냉전, 두 개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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