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돌리면 시선이 돌아간다. 걸어볼 수도 있고 총을 쏠 수도 있다. 현실인 것 같은 착각을 준다. VR(가상현실, Virtual Reality)이라는 말이 이제는 낯설지 않다.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내리다 보면 스마트폰 화면을 움직이면서 볼 수 있는 유사 VR 콘텐츠들도 많이 보인다. KBS 페이스북 페이지는 배우 송중기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KBS 뉴스 스튜디오까지 가는 장면을 촬영한 360도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대세’라고 하니 사업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지상파방송, 통신사, 포털도 가세했다. 미국에서는 이례적으로 방송사 뿐 아니라 애플, 구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1세대와 2세대 IT기업이 모두 뛰어들었다. 스포츠중계, 현장보도, 드라마, 영화, 게임 등 장르도 다양하다. 

▲ KBS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360도 영상.

그러나 현실적으로 VR시장은 여전히 물음표다. 사업자들조차 투자는 하고 있지만 확신을 갖지 못한다. 당연히 수익을 내는 곳도 없다. 한국영상제작학회는 31일 서울 마포구 DMS빌딩에서 ‘VR 생태계 혁명 2016’ 워크숍을 열고 VR사업을 진행 중인 사업자들의 전략을 공유했다. 이 자리엔 콘텐츠, 플랫폼사업자인 지상파와 통신사 뿐 아니라 삼성과 LG 등 기기 제조사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지금의 VR, CCTV와 뭐가 다른가”

최용석 서경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사업자들에게 쓴 소리부터 쏟아냈다. 그는 “다들 360도 카메라 들입다 찍으면서 천편일률적인 동영상을 쏟아낸다. 사람을 찍고, 꽃을 찍고, 배우를 찍고, 놀이동산도 찍는다. 이런 걸 시연하면 사람들이 몰려들고, 즐거워하긴 한다. 그런데 정작 돈을 내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한국 사업자들의 가상현실 콘텐츠 제작의 관점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용자 관점에서 접근해 어떻게 해야 즐겁고, 구매를 할지 파악하지 않고 공급자 기준에서 제작하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빠져있다. 기술만 가득하고, 전문가가 많지만 정작 체험하는 이용자는 안중에도 없다”고 말했다.

중요한 건 ‘상호작용’이다. 현재 콘텐츠들은 세계를 단순히 관찰하는 데 그친다. 정영환 SK브로드밴드 팀장은 현재의 VR콘텐츠를 “CCTV를 세워놓고 그 시점으로 보는 것 외에는 특별한 임팩트가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최 교수는 “가상현실이 왜 가상현실인가. TV처럼 단순히 보는 게 아니라 공간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 특성을 활용해야 한다. 상호작용하고 오감으로 느끼는 걸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가상공간이 꼭 게임처럼 화려할 필요는 없다는 게 최 교수의 견해다. 최 교수는 “뭔가 활을 쏘고 폭파하고 그래야 가상공간 같다고 느끼는데 그러면 오히려 이용자들이 쉽게 지친다. 소극적이더라도 상호작용이 중요하다. 대화만 하더라도 소통이 잘 되면 훌륭한 가상현실이 된다”고 말했다.

▲ 플레이스테이션 VR 홍보영상.

무한도전, VR로 볼 수 있을까?

방송업계도 고민이 많다. 실험을 해보고 있지만 뚜렷한 대안이 나온 건 아니기 때문이다. 지상파는 지난해부터 뮤직비디오, 예능, 스포츠 중계 등에 VR을 응용하고 있다.

MBC는 예능과 드라마에 VR을 적용했다. 문제는 드라마였다. 김창배 MBC 차장(한국카메라감독연합회 회장)은 “무한도전의 경우 예능프로그램 특성상 카메라에 스탭이 나와도 문제가 안 되지만 스토리에 몰입해야 하는 드라마는 무조건 NG”라고 토로했다. “‘최고의연인’ 드라마에 360도 카메라 장면을 썼는데, VR은 영상 몰입에 방해되는 요소가 많다. 이 점을 제거하는 게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이용자 입장에서도 VR은 집중이 쉽지 않다는 점이 기존 방송과 가장 다른 점이다. 기존 방송에서는 제작자의 의도가 그대로 전달된다. 카메라 렌즈를 교체하고, 초점을 맞추는 식으로 특정 장면과 인물에 관심을 유발할 수 있었다. 그런데 VR에서는 이 같은 기술을 쓸 수 없다. 특정 공간에 이용자를 던져놓긴 했는데, 무엇을 봐야할지 모른다면 흥미는 금방 떨어진다.

김창배 차장은 “VR이라고 해서 그냥 카메라를 갖다놓으면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면서 “VR만의 스토리텔링 문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방송 영상을 VR로 만든다면 이용자에게 높은 자유도를 부여하지만 동시에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계속 사건을 만드는 게 핵심이다. “3인칭과 1인칭을 적절하게 결합해야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다. 또 사람은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고, 밝은 쪽을 향하고, 움직이는 곳을 향한다. 이 같은 요소를 지속적으로 주입해 집중을 유도할 수 있다.”

김도식 SBS 스마트미디어사업팀장은 “VR이 가장 필요한 곳은 현장”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VR은 몰입시간이 3~5분 밖에 안 된다는 점도 한계다. 이 같은 특성을 감안하면 탐정물에서 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청자가 셜록과 함께 사건현장에 들어서게 됐을 때 VR을 도입해 1인칭 시점으로 직접 단서를 찾도록 한다는 것이다.

▲ SBS는 예능 프로그램에 360도 카메라를 적용했다.

VR은 저널리즘 분야에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도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도식 팀장은 “뉴스의 경우 현장이 있기 때문에 활용하기 쉽다”면서 “얼마전 국정원 직원이 자살했다. 당시 현장과 경로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 보도국 기자들이 360도 VR촬영을 했으면 어땠을까. 적절한 기획만 들어가면 뉴스에서 파괴력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승부처는 ‘모바일 플랫폼’

현재로선 VR콘텐츠는 한계가 뚜렷하다. 별도의 VR기기를 통해 콘텐츠를 시청하거나 모바일을 통하지 않고서는 시청이 불가능해 TV나 극장에서 활용할 수 없다. 방송 콘텐츠, 플랫폼 사업자들이 일제히 모바일을 중심으로 VR콘텐츠 제작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기술이 나올때마다 과도할 정도로 경쟁을 해온 방송통신 사업자들이 VR에서는 협력을 하고 있다는 점이 의외다. 지난달 30일 SBS, LG전자, KT,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세븐스타웍스가 공동 플랫폼 구축, 디바이스 제작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들 사업자는 미래창조과학부에 공동 플랫폼 구축을 건의하기도 했다.

이영호 KT VR사업팀장은 “기존의 미디어시장은 모두 경쟁관계였지만, VR은 시장 자체가 경쟁을 할 정도로 활성화됐지 않다. 그래서 이 시장을 나눠먹는 건 의미가 없다고 보고, 공동으로 생태계를 만들고 키운 다음 경쟁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상파 입장에서는 자체적으로 플랫폼화를 추진할 여유가 있지 않고, 통신사 입장에서는 VR시장이 확대되면 트래픽으로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계산도 있어 보인다.

협력한다고 해서 경쟁이 없는 건 아니다. 플랫폼사업자가 이용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콘텐츠가 중요하다. KT는 독점으로 프로야구 중계를 VR로 준비하고 있으며 연말까지 자체 VR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제작할 계획이다. 이영호 팀장은 “5월 말에 독점 콘텐츠를 선보이고 연말까지 VR콘텐츠에만 100억을 투자해 500여개 VR콘텐츠를 올레TV모바일에서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 골판지로 제작된 구글의 카드보드는 VR 상용화를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SK는 기존 OTT플랫폼인 ‘호핀’과 ‘Btv모바일’을 ‘옥수수’로 통합하면서 VR 전용관을 마련했다. SK브로드밴드는 CJ헬로비전 인수합병을 계기로 콘텐츠에 3200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는데, 이 중 일부를 VR 콘텐츠 제작에 활용할 계획이다. 정영환 SK브로드밴드 미디어사업부문 담당은 “VR이 당장 대중화되는 건 한계가 있지만 어찌됐건 VR에 걸맞은 영역이 있고, 이 부분을 파고들 계획”이라며 “시장상황을 주시하면서 계속 새로운 서비스를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자체적인 모바일 플랫폼이 확고하지 않은 지상파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다. 가장 적극적인 SBS도 전용 콘텐츠를 제작하는 대신 공모전을 통해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하겠다는 계획이다. 김도식 팀장은 “공모전에 응한 영상을 1000개 모아 놓고, 콘텐츠 방향을 고민하고 플랫폼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상파OTT인 ‘푹’과의 연동 계획에 관해 김 팀장은 “당연히 푹과 연계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유통을 해 보고 시장이 형성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어째됐건 장기적인 투자가 관건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용석 서경대 교수는 “누구나 쉽게 VR 플랫폼을 말하는데, 360도 영상 잔뜩 넣는다고 플랫폼이 되는 게 아니다. 차별화된 서비스를 줄 수 있는 솔루션과 엔터테인먼트가 있어야 한다”면서 “이는 하루 이틀 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10년 이상의 투자가 있어야 통찰력과 직관력이 생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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