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무가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관음증에 가까운 질환이다.”

국가 정보·수사기관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관계자에 대해 무차별적인 ‘통신사찰’을 감행한 정황이 드러났다. 민주노총은 지난 20일 기준으로 우선 파악된 관계자 94명에 대해 통신자료 681건이 수사기관에 제공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일부 민주노총 간부의 경우 가족에게까지 통신자료 조회가 이뤄진 정황이 추가 발견돼 수사기관의 무분별한 통신사찰에 대한 논란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22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공안기관의 민주노총 무차별 통신사찰 조사 결과 중간 발표 및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은 사실을 발표했다.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22일 오전 서울 중구 민주노총 대회의실에서 ‘공안기관의 민주노총 무차별 통신사찰 조사 결과 중간 발표 및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이치열 기자

민주노총 조합원, 상근활동가 등 관계자 94명은 직접 이동통신사에 통신자료 제공내역 사실확인서를 청구했고, 2015년 3월부터 2016년 3월까지 총 681건의 통신자료가 국가정보원, 서울지방경찰청 등 정보·수사기관에 제공된 것으로 확인됐다. 1인당 평균 7.24건 수준이다.

이영주 민주노총 사무총장은 통신자료제공 ‘최다 대상자’로 총 31건, 매달 평균 2.6건의 정보가 제공됐다. 특히 이 사무총장은 “남편, 자식 등 가족들의 통신자료도 경찰에 조회된 것으로 확인됐다”며 “일반 시민들을 범죄자 취급하고 어떤 절차도 없이 사생활 침해하는 무차별적인 권력 남용이다. 일정 부분 연좌제로도 작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보 제공은 민중총궐기 집회가 열리고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체포가 이뤄졌던 지난해 11월, 12월에 집중된 양상이다. 11월 123건, 12월 386건 등 파악된 제공 건수 681건 중 75%가 두 달에 몰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1월30일에는 민주노총 사무총국 관계자 7명과 공공운수노조 관계자 2명에게 ‘서면 요청 없이’ 통신자료를 받을 수 있는 ‘긴급요청’이 집중된 사실도 드러났다. 민중총궐기 집회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체포와 관련해 관계자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무분별한 사찰이 이뤄졌다고 추측할 수 있는 정황이다.

전기통신사업법 제83조 4항에 따르면 통신자료제공 요청은 “요청사유, 해당 이용자와의 연관성, 필요한 자료의 범위를 기재한 서면(자료제공요청서)으로 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긴급한 사유가 있을 때는 “서면에 의하지 아니하는 방법으로 요청할 수 있으며, 그 사유가 해소되면 지체 없이 전기통신사업자에게 자료제공요청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예외를 두고 있다.

민주노총은 특히 수사기관이 통신자료 요청을 위해 작성한 문서당 20건에서 65건에 달하는 통신자료가 동시에 제공된 사실에 비추어볼 때 ‘기지국 수사’에 대한 의혹을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기지국 수사는 기지국에 잡힌 이동통신기록을 모두 수집하는 것으로 평균 1건당 1만 개 안팎의 통신기록이 제공돼 ‘기본권 침해’ 비판을 받는 대표적인 수사기법이다.

이날 발표에 따르면 서울지방경찰청이 지난 12월 22일 작성한 문서 ‘2015-09447’에는 65건, ‘2015-09524’에는 43건 등으로 상당한 수의 통신자료가 제공됐다.

이에 대해 장여경 진보네트워크 활동가는 “하나의 공문으로 굉장히 많은 사람들 정보를 쓸어왔다. 어떤 사람의 통화 대상을 한꺼번에 제공받았을 수 있고 집회 현장에서 잡히는 기지국의 휴대번호를 일제히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다”면서 “지금 드러난 자료나 특정 위치의 사람들 다수가 소환조사를 받는 점을 고려하면 그 위치에 있었던 ‘기지국’이 사용됐을 거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 민주노총 사무총국 다음으로 통신자료 요청이 집중된 공공운수노조의 진기영 부위원장이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통신자료를 요청한 기관별로는 경찰이 585건, 국정원 83건, 검찰 13건으로 경찰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민주노총 조직별 조회 분석 결과 민주노총 사무총국에서 43명이 457건, 공공운수노조에서 16명이 101건 등 ‘통신 사찰’이 두 기관에 집중됐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수사기관이 제공받은 통신자료엔 이름, 주민번호, 주소 등 간단한 개인정보만 있다는 지적에 대해 장여경 활동가는 “주민번호는 다른 데이터베이스와 연결되는 중요한 정보다. 주민번호 제공은 다른 개인정보 조회, 사찰과 연결되며 기본권 침해기도 하다”면서 “이동통신사는 법적근거를 가지고 주민번호를 수집하는 독특한 기관이다. 수사기관이 (이를 통해) 입수한 주민번호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 활동가는 이동통신사에서 지나치게 정보가 수월히 제공되고 있는 구조도 지적했다. 그는 “이동통신사와 수사기관 간엔 통신자료가 ‘원클릭’으로 제공되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면서 “워낙 남용 문제 가능성이 커 유엔 자유권 위원회가 개선을 권고한 제도”라고 말했다.

그는 “디지털 시대엔 모든 사람이 연결돼있고 6단계만 거치면 전 지구인을 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누군가의 통신자료 털고, 그 옆 사람의 통신자료 털면서 전 국민의 정보가 털리는 건 시간 문제”라면서 “수사기관들이 아무 문제의식 없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통신사찰 논란과 관련해 수사기관은 책임있는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강신명 경찰청장은 지난 14일 기자간담회에서 “(수사비밀을 지켜야 하므로) 통신자료 확인에 대한 사유 공개는 맞지 않다”면서 “(통신자료는) 비교적 개인정보 침해가 덜하다”고 말한 바 있다.

민주노총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를 기점으로 사찰행위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점은, 수사기관이 집회 참가자 신원파악을 위해 통신자료를 이용한 것으로 의심되며, 통신사찰의 분량과 분포를 볼 때 특정 기지국을 통해 송수신된 통신자료 전반을 들춰본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된다”며 “휴직 중인 자도 사찰 대상에 포함된 것은, 공안기관이 ‘민주노총 범죄집단 만들기’에 혈안이 돼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 단체는 “이번 조사결과는 피조사자가 통신사에 자료를 요청하는 방식을 통해 드러난 것이므로 실제 검경과 국정원이 어느 규모로 누구를 상대로 한 통신사찰을 벌이고 있는지는 확인조차 할 수 없다”면서 “검경과 국정원은 무분별한 통신사찰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 국민 앞에 낱낱이 해명해야 하며, 책임자 처벌 등 국민의 정보인권 침해에 대한 법적 책임도 면할 수 없다”고 규탄했다.

민주노총은 연맹 산하의 임원, 조합원, 상근자 및 이들의 가족을 대상으로 통신자료 제공내역을 추가 취합해 나갈 예정이다. 민주노총은 시민사회단체 및 일반 시민의 피해 사례를 모으기 위해 이메일 주소를 따로 개설해 제공내역 정보를 받고 있다.

이승철 사무부총장은 “통신 사찰에 대한 의혹을 계속적으로 제기하고, 국정원, 공안기관, 경찰에게 입장을 요구할 예정”이라며 “고소·고발, 손해배상 청구 등 가능한 법적 조치도 진행해 나갈 것”이라 밝혔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