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에서 부장급 기자들을 중심으로 ‘KBS기자협회 정상화 모임’을 결성하고 기자협회를 압박해 보도감시활동이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KBS 출신인 심인보 뉴스타파 기자가 ‘KBS기자협회 정상화 모임’에 참여한 선배에게 보내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심인보 기자의 허락을 받아 전문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000 선배께

111명의 명단에서 선배 이름을 발견한 순간 마음이 돌부리에 걸린 것처럼 한 번 휘청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명단을 읽고 또 읽어도 선배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며칠 동안 뭐가 얹힌 것처럼 마음이 불편해 결국 이 편지를 쓰게 됐습니다.

KBS 기자협회 정상화를 위한 모임이라니요. 정상화되어야 할 것은 기자협회가 아니라 KBS라는 점을 선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요즘 KBS 뉴스는 대통령과 여당이 뼈다귀를 던져주면 그걸 잽싸게 물어 주인에게 물고 돌아오는 데 진력하는 사냥개 같습니다. 주인이 슬쩍 눈짓만 하면 불쑥 튀어나와 무고한 사람들에게 입에 침이 튀도록 짖어대고, 주인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면 멀쩡한 메주를 찢어발기며 그게 팥이라고 강변하는 조폭의 행동 대장같은 그런 사냥개 말입니다.

사냥개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냥개들보다 그걸 먼저, 확실히 물고 돌아옴으로써 주인에게 충성심을 과시하는 것이죠. 선배가 열정을 바쳐 일했던 한때, KBS 뉴스는 권력자들 입장에서는 언제 터질 줄 몰라 조마조마한 시한폭탄 같았고, 국민들 입장에서는 5년에 한 번 투표로 선출되는 권력의 전횡을 감시하는 가장 믿을만한 감시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KBS 기자협회가 특정 정치 세력의 대변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셨죠. 그런데 사장을 포함한 간부들이 특정 정치 세력의 대변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왜 쏙 빼놓으셨나요. 배우 오달수 씨가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버스 기사가 급격히 우회전을 하면 승객들의 몸은 왼쪽으로 쏠리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요. KBS의 상황도 이와 같은 것을 선배가 모르실리 없겠죠. 그런 상황에서도 후배들은 '특정 정치 세력'과 연계되는 것처럼 보일까 싶어 얼마나 몸조심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선배들은 창피한 줄도 모르고 온몸에 똥칠을 하고 뛰어다니면서, 그에 항의하는 후배들 옷자락에서 '특정 정치 세력'의 냄새가 난다고 삿대질을 하는 격입니다.

선배는 대통령과 여당을 위해 KBS 뉴스를 송두리째 가져다 바치는 사장과 간부들 앞에서는 새색시처럼 고분고분하셨죠. 부장이 하라는데, 팀장이 하라는데 어쩌겠냐고 하셨죠. 남에게 싫은 소리 할 줄 모르는 선배의 성격 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선배가 KBS 뉴스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절규하는 후배들에게는 마치 받을 빚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눈을 부라리고 목청을 높이다니, 정말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 'KBS 기자협회 정상화모임'에 참여한 KBS 메인뉴스 ‘뉴스9’의 황상무, 최문종 앵커와 ‘뉴스광장’ 강민수 앵커. (왼쪽부터, 사진=KBS, 방송기자연합회)

바로 얼마 전 선배도 저도 좋아하는 후배 준범이가 징계를 받은 사실은 물론 알고 계시겠죠. 조직 바깥에 있다보니 정확한 얘기를 전해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해외로 진출하는 젊은이들을 소개하는 신년 아이템에 부장이 특정 업체를 소개해줘 방송이 나갔고, 알고보니 이 업체가 과거에도 같은 사람의 소개로 KBS의 전파를 탄 일이 있었기에 그 경위를 알아보기 위해 전화를 한 통 걸었던 게 징계 사유라고 합디다.

선배는 이게 정말 징계를 할 만한 사유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러실 리 없을 겁니다. 준범이는 기자협회의 공정방송국장이었습니다. 뉴스에 대한 기자협회의 감시 활동은, 상명하복으로 이루어지는 일방통행적 뉴스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바로잡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기자 사회가 오랜 전통으로 이를 유지해 온 이유입니다. 기자협회의 감시 활동은 지난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망가져왔던 뉴스를 바로잡기 위한 마지막 평형수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선배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성명서를 보니 기자협회를 음침한 정치적 야심가들의 집단인 것 처럼 묘사하셨더군요. 벌써 몇 년째 기자협회장을 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이가 없어 반강제적인 추대 형식으로 협회장 자리를 떠 안기고 있다는 사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간부들에게 찍히고 조직생활 피곤해질까봐 서로 마다하는 기자협회의 간부 자리는, 결국 양심의 소리에 가장 민감한 후배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맡는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잘 알고 계시겠죠. 그런 후배에게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후배를 구명하기 위해 간부들에게 항의를 해도 시원치 않을 선배들이 총구를 거꾸로 돌려 후배의 등에 총을 쏘다니요.

이렇게도 쓰셨더군요. "회사를 더 이상 흔들지 마라" 선배, 미안하지만 바깥에서 바라보는 KBS는 이미 침몰하고 있는 항공모함입니다. 이 몰락의 경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사를 흔드는 것"입니다. 오로지 저 한 몸 더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해 대통령과 여당에게 꼬리를 흔들고 있는 사장과 간부들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으면 그 몰락의 경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진정 생각하시는 건가요?

이런 말도 쓰셨습니다. "기자협회는 취재수당과 출장비와 시간외 수당이 왜 이렇게 적은지 고민해본 적 있는가?" 저 역시 회사에 몸담고 있던 시절 취재수당과 출장비와 시간외 수당이 적다고 생각해본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언론사 가운데에는 취재수당과 출장비와 시간외 수당이 아예 없는 곳도 있습니다. 더구나 제가 알기로 KBS는, 기자들이 광고 영업의 압박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언론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말 이 문제가 KBS 기자 협회가 최우선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할 우선 순위의 과제라고 생각하시나요?

'기자협회 정상화를 위한 모임'에 이름을 올린 111명의 이름을 하나 하나 묵새겨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명단에 선배의 이름이 있어서는 안되는 겁니다. 공영 방송은 최고 권력자의 이해 관계에 복무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한줌의 극우 탈레반들, 회사의 혼란을 틈타 그릇에 과분한 보직을 탐하는 자아도취적 기회주의자들, KBS 저널리즘이야 어찌됐든 알 바 없이 연수나 특파원이나 앵커 보직 같은 당근에만 기웃거리는 회사원 기자들의 이름 사이에 왜 선배의 이름이 끼어 있는 건가요.

부역의 대가로 현실의 특혜를 누리고 있는 자들이, 이제는 부끄러움마저 털어내겠다고 부역하지 않는 자들을 무리지어 공격하는 모습이, 해방 직후 우리의 현대사와 겹쳐보이지 않습니까? 그만 그 명단에서 빠지십시오. 지금이라도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해 명예스럽지 못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고, 실수라고 하십시오. 잃을 것이 무엇입니까? 신분이 보장된 공사의 직원으로 회사에서 잘리기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감봉이라도 받겠습니까. 연수나 특파원이나 보직이 선배의 긴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요.

선배가 원망스럽습니다. 그러나 미워하거나 비난하지는 않겠습니다. KBS를 지배하고 있는 한줌의 극우 탈레반들은 기자들이 서로 무리지어 싸우기를 바랄 겁니다. 거짓 명분을 앞세우되 현실의 힘을 내세워 사람을 모아 무리를 만들어 놓으면 이들과 다른 이들이 서로 비난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감정의 골이 생기고, 그렇게 되면 처음에는 마지못해 이름을 내준 선배 같은 사람들도 결국 자기 정당화를 위해 스스로 '구사대'로 변해간다는 사실을, 저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편지를 쓰면서 선배의 이름을 익명으로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제발 초심으로 돌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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