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새누리당편? 여당이 늘 이기는 이유
시간은 새누리당편? 여당이 늘 이기는 이유
[뉴스분석] 툭하면 노무현 탓, 협상 거부하고 버티기 작전… 보수 언론 등에 업고 여론 내세워 압박

테러방지법이 통과 됐다. 처음 국회에 발의된 후 15년 만이다. 정권을 잡은 쪽은 법을 만들고 싶어 했고 야당은 반대였다. 테러방지법에 대한 찬반은 정권의 향배에 따라 달라졌고 이는 손바닥보다 쉽게 뒤집혔다. 그 15년의 무한궤도를 끊은 것이 새누리당이다.

국회는 지난 2일 본회의를 열고 테러방지법을 통과 시켰다. 재석 의원 157명 중 새누리당 의원 156명이 찬성했다. 야당의 노력은 역부족이었다. 본회의장에서는 퇴장으로 항의 표시를 했지만 야당 의석수는 의결정족수를 위협하지 못했다.

이에 앞서 192시간26분 동안 진행한 필리버스터는 새로운 위력을 보였다. 시민들은 테러방지법을 ‘인권침해’라고 하는 야당의 주장에 귀 기울이고 손을 들어 줬다. 일부는 필리버스터가 실시간 중계되는 모니터를 넘어 직접 국회를 찾았다. 방청 행렬은 끝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야당 의원들이 필리버스터 중인 지난 1일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을 시민들이 가득 채웠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하지만 이례적으로 강한 야성을 보인 야당과 시민들의 환호는 결과적으로 지난 9일 동안 펼쳐진 ‘짧은 파티’에 그쳤다. 누구도 새누리당의 테러방지법 입법 욕구를 꺾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여야는 항상 대립했지만 승리의 여신 디케는 대부분 새누리당 편에 섰다.

새누리당이 야당과 대립할 때마다 내놓은 무기는 분명했다. 그 중에서도 ‘김대중·노무현 탓’은 1석2조 효과를 냈다. 새누리당은 이번 테러방지법에 반대하는 야당에 “김대중 정부 때 처음 발의한 법이고 노무현 정부 때에도 통과시키려고 했던 법인데 야당이 왜 반대하는지 모르겠다”고 반박했다.

이철우 새누리당 의원은 수차례 “지금 만들어진 법은 거기(김대중·노무현 정부 입법안)에 비하면 일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법으로 군 동원력은 물론 수사권도 전혀 없다”며 “과거 김대중 정부, 현 야당이 집권했을 때 강한 법을 냈다”고도 했다. 

‘김대중·노무현 탓’은 야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는 프레임을 만들어 낸다. 유권자가 이해하기 쉬운 만큼 강력하게 작용한다. 부가 효과는 물타기다. 새누리당의 테러방지법 수정안을 역대 정부가 낸 법안 중 가장 수위가 낮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새누리당은 불리할 때마다 이 무기를 꺼내 썼다. 대선개입 논란이 불거졌던 2013년 국가정보원 댓글 조작 사건 때도 마찬가지다.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렸던 2013년 8월16일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은 ‘노무현 정권 시절에 정권 홍보 댓글 작업을 했나’, ‘2005년 고영구 국정원장 시절 국정원의 사이버심리전 전담팀을 출범시키고 확대했느냐’고 물고 늘어졌다.

▲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지난 3일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 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는 너머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진이 보인다.  사진=포커스뉴스


당시 청문회장에 선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그렇게 보고 받았다”, “그렇다”며 모든 내용을 인정했다. 새누리당은 국정원의 댓글 작업은 ‘통상적’이라는 주장으로 몰고 갔다. ‘댓글’이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정권 차원의 조직적 대선 개입이라는 야당의 비판은 흐려졌다.

지난해 논란이 된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 비리 국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당은 ‘자원외교 중요성을 강조하고 시작한 것은 노무현 정부’라며 문재인 대표 등도 청문회장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전형적으로 ‘우리가 문제면 너희도 문제’라는 식이다.

야당이 이 논리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면서 청문회는 지지부진해졌다. 유력한 증인은 국회 청문회장에 서지 않았다. 자원외교 과정에서 사업을 부풀리고 쌈짓돈을 챙겼을 것이란 의혹이 제기된 이명박 전 대통령 측근 역시 책임을 추궁 받지 않았다.

새누리당의 또 다른 무기는 시간이다. 새누리당은 제한 시간 안에 야당이 필리버스터를 중단하지 않으면 선거 연기라는 초유의 상황을 맞게 될 것이라고 야당을 압박했다. 여당은 시간으로 압박할 뿐 야당의 협의 처리 제안을 모두 뿌리쳤다.

▲ 변재일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맨 오른쪽)이 지난달 29일 필리버스터가 진행 중인 국회 본회의장에서 새누리당 김무성(가운데) 대표, 원유철 원내대표와 대화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야당은 필리버스터를 진행하면서도 꾸준히 여당에 협상을 제안했다. 더민주당은 통신감청·금융정보거래 등 국정원에 준 과도한 정보수집권한에 대한 견제장치를 마련하면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킬 수 있다고 제안했다.

여당은 모든 제안을 원천적으로 거부했다. 원유철 원내대표는 “국회의장의 수정안이라는 것은 없다”며 “야당의 수정 제안은 이미 직권 상정된 수정안에 충분히 포함됐고 그 외에는 받을 수 없다”고 맞섰다.

대신 야당에는 시간으로 압박했다. 원유철 원내대표는 필리버스터 8일 째인 지난달 29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만약 야당이 필리버스터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 국회를 마비시켜 민생파탄, 선거 연기가 되는 상황이 온다면 그 책임은 모두 더민주, 야당이 져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간의 적절한 이용은 새누리당의 특기다. 그동안 야당은 예산안 상청을 지렛대로 부자 증세 등을 이유로 대여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12월2일이면 예산안을 자동 부의할 수 있도록 한 국회선진화법을 이유로 야당의 협상을 소홀히 했다.

▲ 새누리당이 2월29일 국회 로텐더홀 앞 계단에서 야당의 필리버스터 및 입법 마비 규탄 규탄 결의대회를 하고있다. 사진=포커스뉴스


국회선진화법 제85조의3 2항(예산안 본회의 자동부의)은 교섭단체 합의에 따라 자동부의 조항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해두고 있으나 현실에 적용된 적은 없다. 2014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비대위원장을 맡고 있던 문희상 더민주 의원은 “예산안 처리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여당은 여야정 합의마저 파기하더니 이젠 시간끌기로 나오고 있다”며 “어떻게든 12월2일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은 오만한 착각”이라고 비판했다.

새누리당이 이길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는 어쩌면 당 밖의 우군, 언론 덕분이다. 192시간 동안 진행된 필리버스터는 사상 초유의 일로 세계적으로도 역사를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민들에게 정치의 본모습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날 것의 국회를 본 시민들은 “왜 반대하는지 등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필리버스터, 정말 소중한 시간과 경험이었다”, “필리버스터를 통해 훌륭한 야당 의원의 진가를 확인했다” 등 기존 정치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씻어냈다고 평가했다.

시민들은 지상파 인기 프로그램인 ‘마이 리틀 텔레비전(마리텔)’을 패러디해 국회 생중계 방송을 ‘마이 국회 텔레비전(마국텔)이라고 불렀다. 필리버스터 내용에 대해 “인문학 강의”, “현대사 강의”, “경제학 강의”라고 반응했고 야당 의원들은 네티즌의 발언과 테러방지법에 대한 의견을 국회 본회의장에서 낭독했다.

네티즌들은 강기정 더민주 의원에겐 ‘강블리’ ‘한숨요정’ ‘강 목사님의 국회복음’, 신경민 더민주 의원에겐 ‘사이다’ ‘스파클링 경민’ 등 별명을 붙여주며 인터넷 스타로 만들었다. 필리버스터에 나선 38명의 캐리커쳐를 그려 공유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 네티즌들은 필리버스터 현장 생중계 영상을 보면서 인기 프로그램을 모방해 '마이 국회 텔레비전'이라고 불렀다. 의원별 캐릭터를 만들어 정치를 놀이처럼 즐겼다. 각종 게시판에 오른 '마국텔' 화면 등 모음,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더불어민주당 강기정, 김용익, 신경민, 배재정 의원.

신경민 의원은 테러방지법 표결 전 진행된 반대 토론에 나선 지난 2일 “후원금이 2000원, 3000원, 5000원 등 1만원 이하로 들어왔다”고 밝혔다. 은수미 더민주 의원 역시 필리버스터 후 통장 8개 분량의 후원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네티즌의 직접적인 참여에도 불구하고 지상파와 일부 언론의 보도는 냉랭했다. 총선보도감시연대 10차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언론의 주요 보도 내용은 여당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KBS는 지난달 25일 ‘뉴스9’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중 국정원에 테러 대응 업무를 맡기도록 했다는 발언 영상을 내보냈다. 새누리당에서 공개한 영상을 그대로 공개한 것인데 이는 “‘과거사나 도청 문제를 정리한 국정원에 일을 맡기게 됐다”는 맥락을 뺀 보도라는 것이 총선보도감시연대 주장이다.

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25일 기사에서 각각 “무제한 토론이 사실상 지역구 선거운동”, “국민 생명을 선거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발언을 중심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테러방지법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의 발언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 위부터 필리버스터를 다룬 3월2일자 KBS '뉴스9', MBC '뉴스데스크', JTBC '뉴스룸' 화면 캡쳐.


미디어오늘이 지난 24일부터 29일까지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의 필리버스터 관련 야당 의원의 발언이 언급된 기사를 조사한 결과 야당 의원의 발언을 직접 인용한 비율은 10%안팎이었다. 이 비율이 20%를 넘길 때는 야당 의원들을 조롱하거나 폄훼하는 등 본질과 상관없는 내용을 전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반면 세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를 비난하며 책상을 ‘쾅 쾅 쾅’ 내리쳤다는 지난 25일자 기사에서는 기사의 67~78%를 박 대통령 발언으로 채웠다. 온라인을 사용하지 않고 지상파와 유료 신문만으로 정치 뉴스를 접하는 시민에게 필리버스터는 여당의 프레임대로 전달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새누리당이 국회를 직접 찾아오는 시민들 앞에서 “그렇게 해도 공천을 못 받는다”며 필리버스터 중인 의원에게 모욕을 주고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현재의 언론 지형이 만들어낸 산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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