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시작해 일주일 만인 3월1일 중단 결정된 필리버스터는 시민들이 정치 혐오를 조장하는 언론의 프레임에 자발적으로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지상파 및 조선·중앙·동아를 포함한 주류 언론들은 필리버스터의 의미를 축소·왜곡했지만 시민들은 제 발로 국회를 찾았고 본회의장 연단에 선 정치인에 열광했다.

그러나 필리버스터 국면을 주도했던 더불어민주당이 “여러 언론이 우리를 잡으려 작정하고 있다”(손혜원 더민주 홍보위원장)면서 스스로 중단 선언을 할 만큼 주류 언론의 프레임은 견고했다. 

▲ 학생들이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필리버스터를 경청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4·13 총선을 고려한 결정이었다고 해도 야당이 설정한 의제를 스스로 폐기했다는 점에서 쏟아지는 지지자들의 비판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더민주와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당의 국회의원들은 지난 일주일 동안 카메라 앞에서 각자의 개성을 담아 테러방지법의 위험성을 설파했다. 

시청자들은 날 것의 필리버스터를 편집한 2차 콘텐츠를 만들어 트위터, 페이스북에 공유했다. 

필리버스터 참여 의원들을 격려했던 이석현 국회부의장이 ‘힐러리(healer lee)’라는 애칭을 얻으며 SNS 스타로 등극하는 등 필리버스터는 하나의 놀이 공간으로 기능했다.

MBC 예능 프로그램 ‘마이리틀텔레비전’에 빗댄 ‘마국텔’(마이국회텔레비전)은 온라인에서의 열기를 상징하는 별칭이었다. 

네티즌들은 자발적으로 의원들의 발언에서 주요 내용을 뽑아 기록하고 관련 정보를 아카이브(필리버스터 투데이)에 정리하기도 했다. 

필리버스터 열풍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필리버스터를 생중계했던 팩트TV에 따르면, 필리버스터가 시작된 지난달 23일부터 28일까지 팩트TV 누적 시청자 수는 510만 명 이상이었다. 최고 동시 시청자 수는 5만7천명이었다. 

팩트TV 관계자는 29일 “새벽에도 2만명 정도의 시청자가 보고 있었고 낮에도 평균 3만에서 3만5000명의 시청자가 생중계를 봤다”며 “국정감사 등 그동안의 국회 생중계는 낯설고 어렵다는 평가를 하는데 국회의원들이 강의처럼 쉽고 재미있게 토론을 해 이해하기 쉬웠다는 반응이 많았다. 연설 화면을 재가공한 콘텐츠들이 삽시간 내에 퍼지는 현상이 인상 깊었다”고 전했다.

국회방송 시청률도 10배가량 치솟았다. 국회방송 관계자는 “시청률 8% 등 잘못된 보도들이 있지만 시청률이 크게 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실제 2월1일 0.02%에 불과했던 국회방송 시청률(AGB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은 27일 0.18%, 28일 0.19%, 29일 0.18%를 기록했다.

▲ 필리버스터 직후 더민주 김광진·은수미·신경민, 정의당 박원석 등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의원들의 팬아트(fan art, 좋아하는 대상을 소재로 한 그림)가 만들어지는 등 필리버스터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컸다. (사진 = 닝구)
조은상 대중문화비평가는 필리버스터 열풍에 대해 “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재밌게’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동안 정치는 ‘재미없는 것’으로 치부됐다”며 “재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하고 듣는 사람 사이의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야 한다”고 했다. 

이어 “필리버스터는 둘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며 웃고 떠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며 “뉴미디어 시대에서 개인이 어떻게 결집하는지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기존 언론이 뉴스 수용자와의 괴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필리버스터 현상에 대한 냉정한 평가도 나온다. 박권일 칼럼니스트도 “필리버스터는 견제 역할을 제대로 못해 코너에 몰린 야당의 궁여지책이었다”며 “민주주의를 구원하는 영웅인 것처럼 필리버스터가 소비되는 것은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조은상 비평가도 “필리버스터가 주로 공유되는 SNS 공간은 쉽게 닫히고 자아도취에 빠질 수 있게 한다”며 “세대를 뛰어넘은 폭넓은 지지를 받는 데 일정 부분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다. (사진=팩트TV)
필리버스터 중단을 결정한 29일 더민주 의총에서는 지도부의 이와 같은 우려가 반영됐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더민주 비상대책위원인 박영선 의원은 “내일(1일) 조간신문에 ‘선거법 발목을 잡은 야당’이라고 새까맣게 쓰지 않겠느냐. 오늘(29일) 자정에라도 필리버스터를 중단하자”고 말했다. 

‘야당 심판론’, ‘무능 국회’ 등 야당을 비판하며 정치 혐오를 조장하는 기존 언론의 프레임을 야당 스스로 의식한 모양새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필리버스터는 언론이 전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젊은 세대들이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면서도 “그만큼 공영방송 등 기존 언론이 정치 혐오를 부각하고 ‘정치인들은 국가 발목만 잡는다’는 식으로 진실을 은폐했다는 걸 반증하는 대표적 사례로 기록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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