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방지법을 반대하는 야당의 필리버스터가 이어지고 있다. 보수신문은 새누리당 못지않게 테러방지법 통과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양새다. 이들 신문은 과거 민주당 정부때도 테러방지법이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시도가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이용하고 있다. 맞는 말이지만 정작 당시 보수신문의 보도는 지금과 달랐다. 조선일보로 조선일보를 반박할 수 있을 정도였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이 테러방지법 입법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국정원에 감청 등 정보수집 권한을 확대하게 되면 국내용으로 악용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과거 국정원이 권한을 악용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국정원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보수신문들의 태도는 강경하다. 조선일보는 24일 사설에서 “테러 한번 당해보고서야 테러방지법 통과시킬 건가”라며 으름장까지 놓았다.

테러방지법이 국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지난해에도 이들 신문은 일관된 논조를 보였다. 지난해 11월19일 동아일보는 “법적 뒷받침이 없어 테러 위험인물에 대해 계좌추적이나 통신감청도 할 수 없다”며 감청의 필요성을 시사했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12월3일 미국 연방 법무부 검사장을 인터뷰하며 기사 제목을 “테러 예방 위해선 휴대폰·이메일 감청 필요”로 뽑았다. 조선은 11월20일 “테러무방비, 한국” 연재기사에서 “허약한 정보수집 능력”을 지적하며 “해외 정부와 정보기관 시각에서 봤을 때 우리나라는 정보를 공유할 수준도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 2008년 9월6일 조선일보 사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초기 때만 해도 이들 신문의 논조는 달랐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직후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이 논의 되자 2008년 9월6일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국정원은 그간 스스로 도청, 감청과 관련해 얼마나 국민의 신뢰를 잃는 일을 해왔는지부터 되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한 뒤 “국정원이 남용방지장치를 마련할 테니 휴대전화 감청을 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 순수하게 보일리 없다”며 국정원을 의심했다. 물론, 이명박 정부 초기에 나온 사설이지만 그 내용은 민주정부 국정원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뤘다.

이 사설에서 조선은 노무현 정부 때 논의됐던 테러방지법에 대해 “테러예방과 대응을 명분으로 민간인 사찰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불렀다”고 지적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과 같은 견해다. 물론, 노무현 정부의 테러방지법과 현재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은 다소 차이가 있어 동등하게 비교할 수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실효성 논란이 제기되는 대테러인권보호관 1명을 임명하는 제도를 마련한 걸 두고 ‘우려를 불식시킬만한 조치’로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설에서 조선은 “국민의 도청공포가 여전한 상황에서 국정원의 감청은 철저히 제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냥 제한하는 것도 아니고, ‘철저한 제한’을 주문한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국정원은 여러차례 도마에 올랐다. 그 때마다 이들 신문은 국정원에 대한 강도높은 비판을 하며 국민들의 사생활 침해를 우려했다. 지금과는 상반된 태도다.

노무현 정부 때 국정원이 국내기관의 전산자료를 활용한 사실이 알려지자 동아일보는 2007년 7월18일 사설에서 “빅브라더가 따로 없다. 국정원이 사회 곳곳에 이렇게 광범위하게 감시망을 구축하고 있는 줄 몰랐다”면서 “마음만 먹으면 국민의 사생활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나라를 과연 자유민주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라고 우려했다.

▲ 2007년 7월17일 조선일보 기사.

2007년 6월26일 조선데스크는 “권력과 국정원이 도청의 추억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볼 수 있는가? 또 권력과 정보기관이 다시는 도청의 추억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통제장치는 꼼꼼히 완비된 것인가. 휴대전화 감청은 이런 의구심들에 대한 확답과 그 확답에 대한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시에도 통신비밀보호법에 대한 조선데스크의 평가는 이랬다. “통신비밀보호법은 통신비밀 침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통신비밀을 보호하자고 만든 법이다.”

앞서 2007년 6월25일 중앙일보는 “휴대전화 감청, 오남용 차단이 먼저”사설에서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국가기관의 도청을 완전 봉쇄하기는 여전히 불가능해 보인다”고 밝히며 “감청의 오남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기술적 세부지침을 먼저 만들어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고 썼다. 당시만 해도 이들 신문은 국정원의 권한확대를 우려하며 휴대전화 감청 권한을 줘선 안 된다는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 2001년 3월26일 조선일보 사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국정원 도·감청 논란이 불거졌을 때마다 가장 강력하게 국정원을 비판한 쪽은 조선일보다. 조선은 2005년 11월 7일 사설에서 “대통령의 승인만으로 감청을 허용하는 제도가 남발되면 감청의 합법성과 투명성은 설 자리를 잃는다. 말로만 도청이 없다고 할 게 아니라 국민들이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하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2001년 3월26일 조선은 “국정원이 국가안보는 젖혀두고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할 때 국민적 저항은 물론 우리 역사는 또 한번 후퇴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를 거듭바란다”고 경고까지 했다.

그 사이 국정원이 개혁되지 않았는데 보수신문의 입장은 변한 것이다. 당시 테러위협이 지금보다 덜하지도 않았다. 김대중 정부 때는 9.11테러 이후 국제적인 테러위협이 부각되던 시기였다. 노무현 정부 때는 이라크 파병에 따른 김선일씨 피랍사건 등이 벌어졌고, 테러단체가 한국을 테러 대상국으로 지목할 정도였다. 정상적인 언론이라면 “테러한번 당해봐야”라고 으름장을 놓는 대신 그때와 마찬가지로 국정원을 ‘빅브라더’로 지칭하고 ‘국내사찰’을 우려하고, ‘국민적 저항’을 이야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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