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박근혜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될까. 정의화 국회의장이 북한의 테러 위협을 ‘국가비상사태’로 판단해 테러방지법을 직권 상정하는 방침을 정했다. 이런 판단이 앞으로 ‘날치기’의 길을 열어뒀다는 비판이 나온다. 야당은 ‘필리버스터’를 통해 직권상정을 막기로 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23일 직권상정의 이전 절차로 23일 오후 1시 반을 심사기일로 지정했다. 심사기일을 지정하면 관련 상임위에서 1시 반까지 논의가 끝나지 않을 경우 자동으로 본회의에 상정된다. 국회법 85조에서 정한 심사기일 요건 중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해당한다는 것이 정 의장 측 설명이다.

정 의장은 23일 출근길에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테러방지법이 국회법상 직권상정의 요건을 갖췄나’는 질문에 “그렇게 보고 있다”고 답했다.

정 의장의 직권상정 결정은 이병호 국정원장과의 면담 이후 결정됐다. 이병호 원장은 정 의장의 요청으로 22일 국회의장실을 찾아 오후 3시부터 한 시간 가량 테러 관련 정보와 테러방지법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이 원장은 국정원이 정보수집권을 가져야 한다며 국정원을 컨트롤타워로 하는 테러방지법 통과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 정의화 국회의장이 2015년 12월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본회의 개의를 선언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앞서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은 19일 국회를 방문해 정의화 국회의장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면담했다. 이병기 실장은 현정택 정책조정수석, 현기환 정무수석과 함께 정 의장을 찾아 테러방지법과 민생법안들을 처리해달라고 요구했다.

정부여당은 지난해 11월 파리 테러를 계기로 테러방지법 처리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요구는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로켓발사 등과 맞물려 더욱 거세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16일 국회연설에서 “북한이 언제 어떻게 무모한 도발을 감행할지 모르고 테러 등 다양한 형태의 위험에 국민들의 안전이 노출되어 있다”며 “우리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그동안 제가 여러 차례 간절하게 부탁드린 테러방지법을 하루속히 통과시켜 주시길 부탁 드린다“고 말했다.

이날 통과된 법안은 대테러활동에 대한 정책의 심의, 의결을 위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테러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국무총리 소속으로 대테러활동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대테러센터를 설치하며 국가정보원장이 테러위험인물에 대해 출입국 금지 및 금융거래 정지요청, 통신이용 관련 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 등으로 구성돼 있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는 국정원에게 영장없는 도감청을 무제한으로 허용하는 법안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야당은 의원총회을 열어 대응방안을 논의했고, 필리버스터를 가동하기로 했다. 필리버스터란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로 장시간 연설, 계속된 의사진행발언 등을 통해 법통과를 막는 방법이다.

오후 2시 의원총회 개최를 기다리던 이종걸 원내대표는 동료 의원들에게 “10시간 씩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원내대표는 의원총회 모두발언에서 “오늘은 의원님들께서 국회에 많은 시간 쓰셔야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의원총회 도중 밖으로 나온 우윤근 더민주 의원은 ‘무슨 논의가 진행 중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필리버스터”라고 답했다. 실제로 더민주 의원총회에서 필리버스터에 나설 의원들의 서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선진화법 도입 이후 필리버스터가 시행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야당이 ‘필리버스터’라는 강수까지 둔 이유는 테러방지법 자체의 문제점도 있지만 ‘북한의 테러 위협’이라는 상시적인 상황까지 직권상정으로 둘 경우 직권상정과 사실상의 날치기의 남용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종걸 더민주 원내대표는 의원총회에서 “국회법에 직권상정의 요건은 정확하고 명확하게 규정 돼 있다. 천재지변, 전시사변, 또는 준하는 사태. 그리고 양당 대표가 합의한 경우”라며 “그 어느 곳에도 지금 국회의장이 직권상정 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닌데, 국회의장이 청와대의 사주, 청와대의 압력과 청와대의 압박에 못 이겨서 초법적인 직권상정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김기준 더민주 원내대변인도 이날 오후 서면브리핑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일방통행과 불통이 급기야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에까지 전염된 것”이라며 “정 의장 논리를 그대로 따르면,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전후, 그리고 국정원의 테러 정황이나 첩보가 있으면 바로 국가비상사태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국정원의 테러위험 첩보나 정황을 근거로 언제든지 국회 날치기를 강행할 수 있는 최악의 민주주의 유린 사태가 이어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의원총회가 진행되던 오후 3시 경 이종걸 원내대표와 이목희 정책위의장은 국회의장실을 항의 방문했다. 이목희 정책위의장은 의장실을 항의방문하러 가는 길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이게 무슨 국가비상사태야”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이 필리버스터 가동을 예고한 가운데 현재시각 오후 4시까지 아직 본회의는 열리지 못한 채, 이종걸 원내대표 등과 정의화 의장 간의 면담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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