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MBC가 높은 신뢰도와 강력한 콘텐츠를 만들 때 보면 노사 간 싸움이 있어도 복귀 과정에서 잘 조정되고 일정 부분 양보하면 미친 듯이 프로그램 위해 일했어요. 하지만 지금의 MBC는 자유로운 제작 환경이 안 되고 있고, 능력 있는 후배들이 제작 현업 부서가 아닌 쪽으로 너무 많이 밀려나 있죠. 그런 친구들과 같이 일할 수 있어야 하고 머리를 맞댈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철저하게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전혀 개선될 기미가 안 보이더라고요.” 

정찬형 교통방송(tbs) 신임 사장은 지난해 12월 서울 상암동 MBC 사옥에서 남산 밑자락 예장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교통방송이 위치한 곳은 옛 안전기획부 터로 군부독재 정권 시절 무자비한 고문이 자행됐던 인권탄압의 현장이다. tbs 앞 주자파출소 자리엔 이제 비석 하나만이 남았지만 정 사장에게 이곳은 더욱 각별한 의미가 있는 듯했다. 

tbs도 올해 상암으로 사옥 이전을 앞두고 있음에도 정 사장은 예장동 사옥에 대한 애착이 더 커 보였다. 정 사장은 기자가 2층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창밖 풍경을 가리키며 옛 안기부 터 이곳저곳을 설명했다. 역사적 상흔을 바라보며 다시 치열했던 방송 제작자로서 열정을 되살리듯 그의 표정과 말에선 열의가 넘쳤다.

정찬형 교통방송(tbs) 신임사장. 사진=김도연 기자
정 사장은 지난 1982년 MBC 라디오 PD로 입사 후 33년 동안 ‘배철수의 음악캠프’,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 ‘손석희의 시선집중’, ’지금은 라디오시대’ 등 예능과 시사·교양 등을 망라해 역대급 프로그램들을 만들었다. 그중 6년 정도는 라디오본부장과 글로벌사업본부장 등 관리자 지위에도 있었지만, 2009년 라디오본부 PD로 복귀한 이후로는 요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현 MBC 경영진이 그리 달가워할 만한 이력과 성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프로그램 제작으로 꾸준히 인정받으며 한편으론 지난 2012년 파업 이후 사측으로부터 탄압받았던 후배들을 예각에서 도왔다. 후배들의 파업을 시작한 후 김재철 전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에 MBC 간부급으로 이름을 올렸고, 170일 최장기 파업이 이어지는 줄곧 후배들을 격려하고 응원했다.  

지난해 9월3일 제42회 한국방송대상 시상식에선 ‘배철수의 음악캠프’로 연예오락부문 음악구성라디오상을 수상하며 밝힌 수상소감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정 전 PD는 “동료 후배들 중 일자리에서 밀려난 후배들이 있는데 가능한 빠른 시간 내 같이 일할 수 있고, 자유로운 방송 환경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결국 그가 인생의 절반 이상을 몸담은 MBC를 떠나게 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정 사장은 지난달 29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내가 예능PD도 오래 했지만 장르로서 애정을 가지고 아꼈던 프로그램은 젊었을 때 기획한 ‘시선집중’이나 ‘김미화의 세계는, 우리는?’, 예전에 후배들이 만든 ‘라디오 칼럼’”이라며 “하고 싶은 프로나 내 정열을 바칠 수 있는 프로그램은 거의 다 한 셈인데, 이젠 이런 좋은 프로그램을 제대로 만들어서 내보낼 환경도 아니고 실제로 저널리즘 정신이 제대로 구현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정 사장은 “지금 제작 현업 부서에서 배제돼 있는 MBC 후배, 동료들을 보면 무슨 성향이 진보적이거나 과격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분야에 대해 높은 전문성과  미래 방송시장에 뛰어난 안목을 갖고 프로그램을 잘 만들던 사람이 너무 많다”며 “그런데 그런 친구들이 지금 쫓겨나가 있어 그런 것이 잘못됐다고 방송의 날 시상식에서 얘기한 거다. 왜 그렇게 배제해야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된다”고 지적했다.

1996년 2월29일 제8대 MBC노동조합 위원장으로 당선된 정찬형 전 MBC PD. 정 위원장 뒤에 서 있던 사람은 최근 'MBC 녹취록' 공개로 물의를 빚은 백종문 미래전략본부장(당시 편성제작부문 부위원장). 사진=최승호 PD 페이스북
1992년 파업 동지였던 손석희 전 아나운서가 최고의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거듭나고 JTBC 보도담당 사장이 되기까지, 손 사장을 처음 ‘시선집중’으로 데려왔던 것 사람도 정찬형 전 PD였다. 

정찬형 사장은 1992년 손석희 당시 MBC 아나운서와 함께 ‘공정방송’ 파업을 하다 감옥에 수감된 ‘포승줄’ 멤버였다. 손 아나운서는 집회를 기획하는 PD였고 노조 대변인이었던 정찬형 PD가 사회자 역할을 맡았다. 정 사장은 “아나운서가 집회에서 사회 보면서 머리띠를 두르고 파업하는 장면이 뉴스에 나가면 나중에 곤란해질까 봐 손 사장이 기획 쪽을 한 거고, 나는 노조 전임자여서 어차피 감옥 갈 생각으로 한 것”이라고 회상했다. 

손 사장이 ‘시선집중’을 맡게 된 것도 정 사장의 역할이 컸다. 그때 편성PD였던 정 사장이 새로 론칭하는 아침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손석희 아나운서를 추천했고 ‘손석희와 방송하면 시말서 몇 장 써야 한다’고 할 정도로 그를 설득시키기 어려웠다. 결국 손 아나운서는 정 PD가 담당 PD를 맡는다는 조건으로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정 사장은 교통방송에 온 후에도 ‘배칠수 전영미의 9595쇼’나 지난달 첫 방송을 시작한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 같은 시사프로그램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정 사장은 “선택과 집중으로 우선 몇몇 프로그램부터 강한 콘텐츠로 키워내서 그냥 열심히 하는 것 같다는 걸 넘어 ‘장난 아니네’ ‘헉’ 소리 나는 반응을 끌어내고 싶다”며 “존재 이유가 뚜렷한, 업계 최고 수준의 콘텐츠를 만들어 다른 방송사나 미디어 제작 관계들이 지켜보고 체크할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 만들고 싶고, 그런 역량이 된다고 본다”고 자신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가장 중요하게 꼽는 것은 ‘제작 자율성’이다. 정 사장은 “다른 방송 채널이 가진 큰 약점을 치고 들어가고 싶다. 윗사람의 ‘오더(order)’로부터 생기는 신뢰도 저하와 언론의 공정성·정파성에서 파생하는 문제가 있는데 우린 그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라며 “방송이 자율성과 독립성을 확보하고 신명이 나야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콘텐츠도 나오므로 법이나 제도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율성 보장과 제작비 등을 최대한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찬형 교통방송(tbs) 신임사장. 사진=김도연 기자
정 사장이 밝힌 경영자로서 비전 역시 ‘좋은 콘텐츠’다. 그는 이미 오랜 제작 경험을 통해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기록에 남을 만한 콘텐츠를 만들었을 때 제작비도 절감하고, 그 콘텐츠로 광고가 늘거나 새로운 수익 모델이 만들어졌음을 확인했다.

정 사장은 “교통방송은 시민의 돈으로 만들어진 방송인데, 오직 수익만을 추구하기보다 비용을 절감하면서 또 다른 수익을 창출하고도 남을 콘텐츠를 만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수익모델이 그려질 거라고 생각한다”며 “‘9595쇼’ 등 핵심 프로그램과 영어방송, TV에서 만든 킬러 콘텐츠가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어, 이걸 다듬어 세련된 고급 문화상품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우리가 사는 도시가 좀 더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있는 도시로 바뀌도록 교통방송이 도시 품격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옷이 남루한 신사가 지나가다 노숙자의 손을 잡아주면서 봉투를 쥐여 주는, 그런 미덕 있는 도시를 위해 방송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미국 여류시인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 ‘휘파람 부는 사람’에 나오는 ‘이 우주가 우리에게 준 두 가지 선물은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이라는 글귀를 소개하며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힘이 되고 실질적으로 위로가 되는 방송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글귀에 우리의 진심이 담겨 있어요. 나를 비롯해 교통방송 PD들과 기자, 아나운서, 진행자들 모두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고 그렇게 괜찮은 콘텐츠를 만들면 듣는 게 남는 게 아닐까요? 안 들으면 손해죠. 더군다나 무룐데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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