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미디어 프레시안이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이 매체는 최근 “프레시안은 강용석에 대해 보도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강용석 변호사가 공당의 공천을 받지 않는 한, 그의 행태에 대해 보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프레시안의 전홍기혜 기자는 ‘기자의 눈’ 코너를 통해 “정치인으로 재기하겠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강용석 변호사가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뭔가? 개인의 명예회복과 권력욕이 아닌, 어떤 공공적 이익을 대리한다고 할 수 있나? 기득권 층의 이익을 대변할 사람은 강 변호사말고도 많이 있다.”라며 그가 정치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따라, 프레시안은 강용석 문제가 “사회적 공기이자 공론의 장이어야 할 언론이 다뤄야할 문제는 아니라고 여겨진다”며 “다른 매체들도 '검색어'에 연연하지 말고 언론 본연의 기능에 입각해 판단해주기를 바란다.”고 타매체의 각성까지 촉구했다.

프레시안이 이렇게까지 주장한 데는 몇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우선 성희롱 발언과 이를 만회하기 위해 과도하게 박원순 아들 병역면제 의혹 제기를 하다 의원직을 잃었다는 사실. 또 유명 블로거와 불륜의혹이 불거지면서 방송프로그램에서 도중 하차한 사실. 특히 이런 사건들에서 강 변호사는 제대로 사과하거나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다는 사실 등.

   
강용석 전 새누리당 의원이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프레시안의 의견기사에 동의하든 하지않든 미디어가 대중의 검색어 상위에 랭크된 인물에 대해 ‘보도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놀라운 일이다. 뉴스가치는 공익적 요소와 함께 흥미성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미디어가 별로 공익적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중의 흥미에 영합해서 무조건 기사화 하는 것은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가수 장윤정과 그 어머니 육흥복씨의 가정사다. 어머니와 딸, 아들, 친척 등 사사로운 가족이야기에 듣기 민망한 충격적인 내용들은 해가 바뀌어도 변하지않고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도 대부분 미디어가 “장윤정의 어머니육흥복 씨가 녹취파일을 공개했다.”며 어머니의 일방적 주장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흥미있는 뉴스감으로 공익성 여부는 따지지않겠다는 식이다. 내용도 일방적일 뿐만 아니라 반사회적 공해에 가깝지만 미디어는 일단 보도하고 본다. 다른 곳은 하는데 왜 우리가 안하는가 식이다. 인터넷을 통해 잠시 제목만 검색해봐도 너무 많다.

“장윤정 엄마 육흥복,‘누가 엄마 죽여줬으면 좋겠다’녹취록 공개..'막장. 2016.01.14 | 세계일보”

장윤정 엄마 육흥복 "누가 죽여줬으면 좋겠다" 충격 녹취록 공개 2016.01.14 |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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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흥복씨에 대해 미디어는 뉴스가치 판단을 멈추고 일방적 단순전달수단으로 전락했다. 미디어가 사회적 공기로 인정받는 것은 공익적 가치를 균형있게 다루기 때문이다. 미디어라는 탈을 쓰고 한 가정의 적나라한 몰골을 그대로 미디어 소비자들에게 전하는 것은 ‘미디어 폭력’이다.

프레시안의 전홍기혜 기자가 ‘강변호사에 대해 보도하지않겠다’는 것은 미디어와 우리 사회를 향한 분노의 울림이다. 프레시안은 “방송에서 성희롱 사건으로 낙마한 정치인을 기용하는 게 언론 윤리에 부합하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서울대 법대와 하버드 대학을 나온 이에겐 '성희롱 따위는 별 것 아닌 일'임을 강용석 변호사는 실제로 보여줬다. 돈, 권력, 지위를 가진 이에게 우리 사회는 그렇게 허술하다.”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의 이중성과 반윤리성을 예리하게 지적한 프레시안의 뉴스는 타미디어에 큰 울림이 되고 있다. 잘못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사람, 잘못을 알면서도 그 잘못을 반복하는데 오히려 힘을 보태는 미디어의 무지와 반윤리성. 오늘날 종편을 비롯한 수많은 미디어는 ‘언론’을 내세우며 ‘반언론적 행위’를 서슴없이 하고 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유권자들이 부담하고 있다.

프레시안의 ‘보도하지않겠다’는 보도에 박수를 보낸다. 제대로 된 언론은 무엇을 보도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보도해서는 안되는 것인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용보다 포장, 껍데기에 눈이 먼 사회는 불행하다. 그런 사회를 부추기거나 앞장서는 역할을 하는 미디어는 미디어가 아니다. 프레시안 같은 미디어가 더 많아져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모순된 사회를 바로 잡게 되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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