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플랫폼이 다변화되고 브랜드가 해체되면서 파편화된 뉴스가 맥락이 거세된 채 흘러 다닌다. 한국에 인터넷 신문이 6000개가 넘고 포털 사이트 네이버와 다음에는 하루 3만 건의 기사가 쏟아져 들어온다. 양적으로는 팽창했지만 뉴스 영향력은 오히려 줄어들었고 저널리즘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미첼 스티븐스 뉴욕대 아서카터저널리즘인스티튜트 교수는 최근 출간한 ‘비욘드 뉴스 : 지혜의 저널리즘’에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같은 전통적인 육하원칙의 중요성이 줄어든 대신 ‘왜’란 질문이 더 중요해졌다”면서 “위기에 빠진 것은 저널리즘일 뿐, 뉴스의 미래는 밝다”고 분석한 바 있다. 스티븐스 교수는 “공공 관심사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공유되는 규모는 계속 늘고 있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보 기술의 최대 수혜자 역시 뉴스”라고 강조하면서 ‘지혜의 저널리즘’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5일(미국 시간) 미국 맨해튼의 미첼 스티븐스 교수의 자택을 찾아 새로운 저널리즘과 저널리스트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1시간30분에 걸친 인터뷰는 미디어오늘 고정 칼럼니스트인 박상현 리틀베이클라우드 이사가 진행했다.
 

- ‘지혜의 저널리즘’이란 무엇인지 간략하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지혜의 저널리즘(Wisdom Journalism)’이라는 개념은 기존의 저널리즘에 가치를 더한 개념입니다. 디지털 혁명과 테크놀로지 혁명을 겪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피할 수 없는 방향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식의 보도나 ‘어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식의 보도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런 정보는 인터넷에 공짜로 널려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사는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정보에 지혜를 더해야 하고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지혜로워져야 합니다. 시청자가 신문사의 웹사이트를 보거나 뉴스 중계를 볼 때 가만히 있어도 다른 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 이상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위기에 빠진 것은 저널리즘일 뿐, 뉴스의 미래는 밝다”고 하셨는데, 뉴스와 저널리즘의 차이를 어떻게 구분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뉴스와 저널리즘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한 번은 컬럼비아대학교의 컨퍼런스에서 제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어요.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거기에 모인 저널리즘 교수들 중에서도 저널리즘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내리는 사람이 없었죠.

저는 뉴스를 좋아하고, ‘뉴스의 역사’라는 책도 썼지만 뉴스는 신문에 실리기 전 단계입니다. 뉴스는 현재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정보로 그 중 일부가 대중들에게 공유됩니다. 저널리즘은 그런 공유를 하게 해주는 사업이죠. 뉴스는 길거리에서 사람들끼리 그냥 주고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주고 받지만, 과거에는 그런 방식이 더 흔했어요. 그냥 교차로에 서서, 모닥불 앞에서 뉴스를 교환했습니다. 하지만 저널리즘은 그런 교환이 프로페셔널한 직업이 돼서 사람들이 그 일에 에너지를 쏟는 사업이 된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런 형태만으로도 역사가 깁니다. 소식을 전달하던 메신저나, 문맹률이 높던 시절 마을광장에서 소식을 외치던 사람들, 직업적으로 뉴스레터를 쓰던 사람들, 그리고 나서 처음으로 인쇄된 신문이 등장했죠. 제가 뉴스의 미래는 밝다고 하는 이유는 뉴스를 전파할 수 있는 최고의 발명품이 인류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인쇄보다 더 뛰어난 기술을 찾아낸 겁니다. 바로 인터넷이죠. 놀라운 기술입니다.

이제 누구나 전 세계에서 뉴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 지진이 났는지, 쓰나미가 일어났는지, 비행기가 추락했는지 거의 즉각적으로 알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술혁명으로 저널리즘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정보를 가져오는 데 반드시 저널리스트들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되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뉴스가 대부분 공짜로 들어오다 보니 저널리스트가 어떻게 뉴스를 팔아 돈을 버는지가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중요한 문제가 됐습니다.”

- 설명 없이 팩트만을 전달하는 태도가 근래들어 바뀌는 것은 외부조건의 변화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이미 20세기에 19세기 식의 사실만을 묘사하는 리얼리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예술에서는 입체파나 추상표현주의로 나타났고 문학에서는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가 그런 추세를 보여줬죠. 심지어 과학에서도 그런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만 해도 사실에 기반했지만, 동시에 눈에 보이는 현실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줬죠.

그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은 곳이 저널리즘입니다. 사실주의가 사라지지 않은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현상이 20세기 미국과 유럽에서 나타났습니다. 팩트만을 묘사, 전달하려는 세계관의 최후의 보루가 저널리즘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현재 저널리즘에서의 테크놀로지 혁명이 흥미로운 이유는 테크놀로지가 이제까지의 사실주의의 흐름을 바꾸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저널리스트들도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라는 보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거죠. 화가들도 과거에 같은 걸 깨달았습니다. 사진도 할 수 있는 사실묘사 이상을 해야 한다는 거죠.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리학자들은 단순히 입자나 행성이 궤도를 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사실의 전달 이상을 해야한다는 필요, 지혜를 더 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는 것은 저널리즘에 유익합니다. 그런 필요는 저널리즘만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등장한 것으로 더 새롭고 흥미로운 사고를 하게 해줍니다.”

   
▲ 미첼 스티븐스 뉴욕대 아서 카터 저널리즘 인스티튜트 교수. 미국 해이버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저널리즘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부터 뉴욕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언론 분야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미디어의 과거와 미래’, ‘미디어의 역사’ 과목 강의를 맡고 있으며, 주요 저서는 ‘A History of News(’뉴스의 역사‘로 번역 출간)’, ‘The Rise of the Image’, ‘The Fall of the Word’, ‘Writing and Reporting the News’, ‘Broadcast News’ 등이 있다.
 

- 그렇다면 18세기 언론의 모습과 그랬던 언론이 후에 팩트에만 치중하는 언론으로 변화했던 사회적 조건이 궁금합니다.

“팩트에만 기반한 보도를 했던 시기가 사실은 인류 역사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인류 역사 내내 사람들은 뉴스를 전달할 때 분석과 의견을 함께 전달했어요. 미국 역사에서 위인으로 추앙받는 벤자민 프랭클린도 (기사에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습니다. 그는 아예 ‘저널리즘은 의견(opinion)을 전달하는 비즈니스’라고 정의했어요. 그게 건국초기에 미국인들이 생각하던 저널리즘입니다.

미국인들은 헌법 수정조항 제1조인 ‘언론의 자유’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조항이 보호하는 ‘언론(press)’은 직업적인 기자들을 가진 그런 언론이 아니었습니다. ‘기자(reporter)’라는 건 언론이 시작되던 18세기 미국의 저널리스트들이 사용하던 직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언론은 분석과 의견을 전달했고, 상당히 당파적(partisan)이었습니다. 아예 당파적 언론(partisan press)이라고 부르기까지 했죠. 인류역사 내내 그랬다가 갑자기 약 150년이라는 기간동안 저널리즘이 ‘팩트 수집’만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한 현상은 미국과 영국, 유럽 일부 지역에서 19세기 중반 정도에 시작되었죠.

그리고 그런 변화에는 기술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인쇄기의 속도도 크게 증가해서 어제 일어난 일을 전달하는 데 있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전달방식과 속도 경쟁이 가능해졌습니다.

전신기술도 한 몫을 했습니다. 해저 케이블도 등장했구요. 이런 기술들이 등장하면서부터 뉴스를 파는 것이 비즈니스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신문이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듣는 것 보다 더 빨리 소식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그걸 인쇄할 수 있었고, 팔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런 신문의 전달 속도가 동네에서 소식이 가장 빠른 사람보다 빨라진 거죠. 그 뒤로도 기술은 계속 발전했고, 속도는 더 빨라졌습니다. 가령 전화의 경우 저널리스트들에게 아주 요긴한 수단이 되었고, 게다가 라디오와 TV는 뉴스를 즉각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해줬습니다. 따라서 제가 아는, 저희 세대의 저널리즘은 바로 그러한 기술혁명의 결과물입니다. 어제나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들의 팩트를 팔아서 크고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팩트만을 팔아서 큰 사업을 유지할 수 있었던 150년이라는 시기는 이제 끝나가고 있습니다. 그게 전 세계 저널리즘이 겪고 있는 위기죠.”

- ‘지혜의 저널리즘’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팩트전달 위주의 기자들이 설 자리는 없어질까요, 아니면 두 종류의 저널리즘이 공존할 수 있을까요?

“이제 뉴스는 인터넷에서 공짜로 얼마든지 얻을 수 있으니까요. 인터넷은 어떤 신문들 보다 빠릅니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언론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뉴스를 팔고 있어요. 저널리즘이라는 비즈니스 자체가 변화해야 합니다. 탐사보도(investigative reporting) 기자에 대한 수요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전쟁, 기근, 재난지역 등 일반인들은 갈 수 없는 곳을 찾아가는 보도가 사라져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정치보도를 하는 기자들이 있어야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지 감시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저널리즘의 진정한 미래는 지혜의 저널리즘에 있게 됩니다. 시사문제에 대한 아주 현명한 분석, 시사문제를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도 말입니다. 기자들이 정치인들이 말하는 걸 수첩에 받아적어서 다음날 신문에 옮겨 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정치인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아야 하고, 그런 말을 한 결과가 어떨지를 알아야 하고, 정치에 대해서 잘 아는 현명한 사람들은 그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저는 그런 기사를 쓰는 기자들이 그렇게 현명한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널리즘에 스페셜리스트들이 더 많아져야 합니다.

따라서 질문에 답을 하자면, 일반인들이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소식이 있는 곳을 찾아가서 취재를 해오는 그런 기자들은 여전히 필요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더 많이 교육받고, 더 똑똑하고 현명한 기자들, 우리가 시사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기자들 역시 많이 필요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미래에 기대가 큽니다. 왜냐하면 지난 20세기의 저널리즘에는 흥미롭지도, 도전적이지도 않은 부분이 분명히 있었거든요. 저는 저널리즘을 오랫동안 가르쳐왔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다른 강의에서는 위대한 문학작품을 읽고 최고로 분석적인 사학자들의 책을 읽는데 저는 학생들에게 ‘가서 화재사건을 취재해오라’고 해야 하거든요. 소방차가 몇 대가 출동했는지, 몇 명이나 부상을 당했는지 같은 것들을 말이죠. 그러다 보니 다른 강의들과 같은 수준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가 가르치는 저널리즘 강의가 그런 수준에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따라서 이제는 학생들에게 시사문제에 대해 제대로 사고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고 시사문제를 새롭게 조망할 수 있게 가르쳐야 합니다. 정치, 경제, 과학 등의 분야에서 가장 앞선 사상을 따라가야 하고 그런 분야들에 스스로를 특화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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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등장이 언론에게 주는 기회와 위기 중에 어느 쪽을 더 크게 보십니까.

“신문의 미래와 관련해서는 어두운 면이 두 가지, 긍정적인 면 한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우선 매일 아침 종이신문이 집 앞에 배달되는 날은 오래지 않아 끝날 것입니다. 그런 배달을 하려면 많은 인력과 트럭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정보를 전달하기에는 비효율적인 방법입니다. 게다가 그만큼의 종이를 마련하려면 나무도 많이 잘라야 하지 않습니까.

또 하나는 신문사는 지금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신문사에 계신 분들에게 계속 강조하는데, ‘기술이 바뀌기 때문에 신문이 바뀌어야 한다’고 하면 이해를 쉽게 하지만, 그것 뿐 아니라 ‘언론이 작동하는 방식이 바뀌기 때문에 신문이 바뀌어야 한다’고 하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입니다. 다시 말해, 종이신문에 쓰는 것과 똑같은 기사를 써서 웹에 올려두기만 한다고 기술변화로 야기된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디지털과 온라인, 혹은 웹이라는, 기사를 전달하는 테크놀로지는 저널리즘의 성격 자체를 바꿀 것입니다. 인쇄기술이나 전신기술이 저널리즘의 성격을 바꾼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은 제가 이야기하는 ‘지혜의 저널리즘’이 될 것입니다. 즉, 좀 더 분석적이 된다는 것이죠. 신문사에게 좋은 소식은 그들이 시사문제에 밝은 똑똑한 인재를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질문을 던질 줄도 알고, 정보를 수집하는 데 아주 뛰어난, 총명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지혜의 저널리즘’이라는 신세계를 이끌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들도 사고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이제까지 해오던 방식으로는 안됩니다. 그냥 기자들을 내보내서 누가 무슨 말을 했고,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적어 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좀 더 분석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뉴스를 더 잘 분석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를 채용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경제기사를 위해서는 경제를 깊이 아는 박사학위 소지자, 심지어는 경제학과 교수를 영입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최근 과학동향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과학자가 필요하고, 정치학자가 정치를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어느 나라의 대통령이 어제 무슨 말을 했다’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나라의 정치적 성격과 외교문제의 큰 관점에서 설명을 해줘야 합니다.”

- 에즈라 클라인이 온라인 매체 복스(Vox)에서 하고 있는 실험, 즉 어려운 뉴스를 재미있는 그래픽을 사용해서 짧고 쉽게 설명해주는 형태의 뉴스가 인기를 끌면서 많은 언론사들이 따라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두고 ‘뉴스의 복스화(Voxification)’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복스의 시도도 ‘지혜의 저널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설명’은 ‘지혜의 저널리즘’의 일부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지혜의 저널리즘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미국의 웹사이트인 복스(Vox)는 에즈라 클라인(Ezra Klein)이라고 하는 실력있는 젊은 저널리스트가 운영하고 있고 상당히 성공적입니다. 그 웹사이트가 주로 하려고 하는 것은 복잡한 이슈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좋은 시도인 것은 맞습니다만, 그걸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독자의 수준을 너무 낮게 보는 위험도 있구요. 에즈라 클라인이 복스에서 편집장을 하기 전에 운영하던 (워싱턴포스트의) 블로그를 보면서 아주 똑똑한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그의 글은 도전적이었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줬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글을 쓰는 것보다 편집 일을 주로 하고 있고,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이야기하는 기사가 많습니다. 이슈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바람에 흥미가 떨어집니다.

제 생각에는 언론이 너무나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이슈를 (아기에게 먹이듯) ‘떠먹여’ 주었습니다. 팩트만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언론학 교수들은 ‘쉽고 분명하게 쓰라, 모든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라’고 가르쳐왔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최고의 작품이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 그렇게 (의미가) 쉽고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이해하려면 생각을 좀 해야하죠. 관객에게 도전을 줍니다. 오늘날 최고의 미술작품이나 음악도 그렇게 도전적입니다. 오늘날 저널리즘이 누리고 있는 행운 중 하나가 그렇게 도전적인 저널리즘을 구현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는 점입니다. 기사에서 사용한 단어가 어려워서 모든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큰 문제가 아닙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되니까요. 마찬가지로 기사에 등장하는 아이디어가 어린 학생들도 모두 이해해야 하는 수준일 필요는 없습니다. 독자들도 노력을 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지혜의 저널리즘’에서 설명 부분만을 강조하는 언론이 가진 위험은 이슈를 너무 단순화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건 독자들의 수준을 낮게 보는 태도입니다. ‘지혜의 저널리즘’은 독자의 수준을 높게 봅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고, 배우게 하고, 사고의 지평을 넓혀줍니다.”

- 방금 말씀하신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모바일에 특화된, 재미와 감동만을 추구하는 카드뉴스가 인기를 끄는 세상에서 ‘지혜의 저널리즘’이 과연 설 자리가 있을까요?

“우리가 온라인에서 특히 모바일 환경에서 목도하고 있는 것들, 즉 쉽게 소화할 수 있는 리스티클(Listicle: List와 Article을 합성어로,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지 10곳’ 따위의 순위를 보여주는 기사)이나 고양이 비디오 같은 가벼운 동영상의 인기에 대해서 저는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매체든지 그런 저급하고 가벼운 면은 다 가지고 있거든요. 종이 매체에도 당연히 있죠. 당장 가판대에 가보시면 진열돼 있는 잡지들의 상당수가 그런 것들입니다. 서점에 가보세요. 거기에서 파는 책들의 상당수가 뻔하고 진부한 로맨스 소설이나 자기계발서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라인 저널리즘의 일부가 그런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언론매체라면 목표를 높게 잡아야 합니다. 물론 그들도 스마트폰 같은 새로운 공간에서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지 실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글쓰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지혜의 저널리즘’은 글이 좋아야 합니다. 지금은 시기적으로도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각 학문영역의 발전으로 학자들의 사용하는 용어나 개념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이런 상황은 저널리스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열어줍니다. (지혜의 저널리스트라면) 복잡한 이슈를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풀어쓰는 동시에 읽는 재미까지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저널리즘은 하나의 예술입니다. 이미 그런 종류의 글과 저널리스트들이 온라인에 많이 등장했지만, 앞으로는 더 많이 봤으면 합니다. 지난 150년 동안 저널리즘이 팩트를 더 많이 모으는 데만 집중하느라 저널리스트들이 그런 글을 쓰는 재주나 관심을 잃었지만, 미국의 저널리즘에는 그런 글들, 재미있는 글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글만 해도 지혜롭고 좋기만 한 게 아니라 재미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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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서 독자의 책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온라인 매체에서는 댓글과 퍼나르기 등을 통한 독자들의 참여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데, ‘지혜의 저널리즘’에서는 어떤 역할을 할까요?

“디지털 혁명과 함께 단어들의 유행도 빨리 바뀌고 있습니다만, 5년, 10년 전에 크게 유행한 단어가 ‘큐레이션’입니다. 큐레이션은 ‘지혜의 저널리즘’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언론사들은 이제 단순히 기자들을 밖으로 내보내서 세상을 이해하고, 그것으로 독자들에게 세상을 이해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다른 곳에서 더 나은 설명(이해)을 찾아서 독자들과 연결해주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중요한 작업이 됩니다.

저는 트위터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한 번에 140자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얕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웃음) 제가 트위터를 좋아하는 이유는 트위터가 저널리즘의 세계 여기저기로 저를 안내해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특별히 관심있는 주제에 저를 연결해줄 뿐 아니라, 제가 관심이 있는 줄 몰랐던 주제까지도 소개시켜주고 그 주제에 관해 정말로 똑똑하고 현명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연결시켜 줍니다.

제 생각에 저널리스트들이 큐레이션을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새로운 목소리(voice)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 새로운 목소리 중 하나가 바로 독자들의 목소리죠. 하지만 온라인 저널리즘에서 댓글(comment)은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심지어 뉴욕타임즈같은 신문의 웹사이트에 달린 댓글도 정말 읽기 괴롭고 한심한 것들이 많거든요. 사람들은 댓글을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도 많이 사용하고, 시끄럽기만 할 뿐 별 깊이도 없는 의견을 개진하는 데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가끔씩 아주 좋은 댓글들도 만납니다. 댓글이 특히 좋은 웹사이트들이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레딧(reddit)인데, 알고리듬을 통해 댓글을 걸러내 웹사이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뉴스 매체들이 정말 지혜로워지고 싶다면 그렇게 댓글을 잘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알고리듬도 개선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기사를 일방적인 강의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과 대화하는 것, 혹은 최소한 그런 대화의 시작점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문사는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기자를 현장에 내보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주어야 하는 동시에 독자들을 대화에 끌어들여야 합니다. (기존의 댓글처럼) 악을 쓰고 싸우는 식이 아닌 방법으로 외부의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들을 연결하고, 대화의 장으로 데려와서 활용해야 합니다.”

- 소셜 미디어가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이 뉴스를 많이 퍼다 나르지만, 정작 그렇게 퍼나르는 기사를 본인은 읽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공영라디오(NPR)에서는 실제로 웹사이트의 독자들이 기사를 읽지 않고 댓글을 쓴다는 것을 실험으로 밝혀내기까지 했죠.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렇게 뉴스를 전달하려고 애를 쓸까요?  

“뉴스에 대한 욕구는 인류역사상 어느 사회에나 존재했습니다. 사람들이 뉴스에 굶주리지 않았다는 사회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사람들에게는 앎(awareness)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어요. 가령 과거처럼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사자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잖아요. 알고 있다는 것은 내가 당장 오늘 저녁에 먹을 끼니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내일 우리 아이들이 굶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죠.

그런 앎에 대한 욕구는 아직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그런 이유로 뉴스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인터넷에 뉴스가 넘쳐나는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는 이해하고, 배우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테크놀로지는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에게 더 잘 알려줄 뿐 아니라, 그런 일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새로운 미디어를 비판하면서 과거에 대한 향수를 갖기도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령 요즘 미국의 대선뉴스만 봐도, 온라인에 등장하는 기사들이 가진 지혜와 이해의 수준은 예전처럼 신문에만 의존해야 했던 시절에 비하면 훨씬 높습니다.

그게 가능해진 건 똑똑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채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뉴욕타임즈가 뭐라고 하는지에만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뉴욕타임즈는 여전히 훌륭하지만, 이제는 경제학자, 정치학자들이 대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온라인에서 읽을 수 있고, 통계 전문가가 트럼프의 당선가능성을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도 읽을 수 있어요. 온라인에는 정말 지혜로운 담론이 넘쳐납니다.

한 가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지혜의 저널리즘’은 자신의 의견을 마음대로 지껄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저널리스트가 때로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기사를 쓰는 것이 나쁜 건 아닙니다. 제가 가르쳐온, 그리고 제가 젊은 시절에 알았던 저널리즘은 극도로 팩트 중심이었습니다. 기자가 의견을 밝히려는 어떤 시도도 나쁜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저는 어떤 면에서는 그런 태도가 (저널리스트를) 지나치게 제한한다고 생각합니다. 분석을 하는 방법 중 하나가 특정 시각에서 이슈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말이죠. 하지만 요즘 미국언론에서는 오로지 ‘나는 이게 마음에 안드니까 당신(시청자)도 싫어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TV에서는 FOX나 MSNBC가 그렇고, 종이매체나 웹에서도 ‘오바마는 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거나 ‘오바마는 정말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쏟아내는 걸 많이 봅니다.

그런 것들은 ‘지혜의 저널리즘’이 아닙니다. ‘지혜의 저널리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견해에 도전합니다. 가령, 내가 오바마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시리아 문제를 보니 오바마가 그 문제를 제대로 다루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거나, 혹은 내가 오바마를 싫어하는 사람인데 헬스케어 법안이 국민들에게 도움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하는 식이죠. 저널리즘은 사람들이 가진 편견을 큰 목소리를 사용해서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 것이라고 봅니다. 케이블 뉴스채널이 생산해내는 온갖 소음이 있기는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더욱 생각이 깊은 저널리즘이 충분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 폴리티코(Politico)가 그런 예가 될 것 같습니다. 2008년 미국의 대선을 다루는 작은 매체로 시작해서 이제는 온라인의 정치뉴스로는 뉴욕타임즈나 워싱턴포스트와 경쟁할 만큼 큰 성장을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미국의 대선과 관련해서 접할 수 있는 좋은 저널리즘(good journalism)은 양과 질은 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수준입니다. 해가 갈수록 좋아지고 많아집니다. 물론 정치인들이 더 좋아지는 건 아니지만요. (웃음) 폴리티코 같은 매체는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들을 이용해서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워싱턴포스트가 온라인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낭비되는 잠재력을 폴리티코가 십분활용한 거죠. 대선기사를 보는 사람들은 스포츠 중계를 보는 사람들처럼 매번 누가 앞서고 있는지 꼼꼼하게 챙겨보고 싶어하거든요. 그걸 폴리티코가 알아본 겁니다.

그 외에 분석적인 정치기사를 보여주는 네이트 실버(Nate Silver)의 538(FiveThirtyEight)같은 매체도 있습니다. 스포츠의 비유를 이어가자면 실버는 대선을 마치 경마를 분석하듯 데이터를 사용해 분석하는데, 가장 앞선 통계분석방법을 동원해서 정확한 예측을 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독자들에게 많은 걸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게다가 생각이 깊은 좋은 글이 많아요. 물론 정치라는 게 항상 (정책적인) 이슈만을 다루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안타깝기는 하지만요.”

- 네이트 실버는 뉴욕타임즈를 떠나면서 자신은 사실 정치보다 스포츠가 더 재미있다고 밝히기도 했죠.

“저도 스포츠 광입니다. (웃음) 사실 스포츠 보도는 ‘지혜의 저널리즘’의 좋은 예입니다. 예전에는 농구나 야구 경기가 끝나고 신문에서 읽을 수 있는 건 어느 쪽이 이겼는지와 선수가 말한 내용 한 줄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엄청나게 자세한 경기분석을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NBA 농구를 수 십 년을 보면서도 ‘픽앤롤(pick-and-roll) 플레이’가 뭔지, ‘삼각공격(triangle offense)’이 뭔지 전혀 몰랐어요. 지금은 사람들이 바인(Vine)같은 짧은 동영상을 통해서 그런 플레이가 뭔지 정확하게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똑똑한 사람들이 운동경기에 대해서 아주 뛰어난 글을 쓰죠. 그런 사람들 때문에 신문이나 방송은 보도수준을 높여야 하는 압력을 받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아주 좋은 경기를 했습니다’, ‘최악의 경기였습니다’ 같은 판에 박힌 선수 인터뷰가 아니라, 도대체 경기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비슷한 일이 정치보도에서도 일어나는 겁니다. 단순히 힐러리 클린턴이 무슨 말을 했고, 도널드 트럼프가 무슨 말을 했다는 팩트만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런 말을 했고,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 후보들의 당선 가능성은 어떤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하지 않고 있는지, 무슨 이슈를 피하고 있는지, 그런 이슈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 그들이 그런 이슈를 어떻게 다루려고 할 것인지를 이야기해줘야 하는데, 그런 건 쉽게 쓸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하지만 독자와 시청자를 현명하게 만들어주는 보도는 그런 보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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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기사를 자동으로 써내는 로봇저널리즘이 제일 먼저 도입된 분야가 스포츠면이죠. 결국 분석적이지 못한 기자들이 사라지게 된다는 걸 제일 극명하게 보여주는 분야가 되었네요.

“저처럼 저널리즘을 가르치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게 로봇저널리즘이죠. (웃음) 제가 가르쳤던 것들이 알고리듬으로 해결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저만이 아니라 저널리스트와 언론사도 불안을 느껴야 합니다. 동시에 언론사는 단순한 숫자와 통계, 단순한 팩트 따위를 수집하는 일은 이제 인터넷에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로봇들 보다 더 잘 해야 합니다.”

- 저널리스트가 변해야 하고, 언론사가 변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공감을 합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팩트 보도 중심의 기사를 써 온 기자들에게 하루 아침에 ‘지혜의 저널리즘’으로 바꾸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요? 그런 변화를 기자와 언론사가 감당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제 아내가 신문사에서 푸드섹션 편집자로 일하기 때문에 기자들이 느끼는 위기의식을 잘 이해합니다. 아까 뉴욕타임즈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신문의 예를 들어볼까요? 지금의 뉴욕타임즈는 10, 20년 전의 뉴욕타임즈와 아주 다른 신문입니다. 아니, 5년 전의 모습과만 비교해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신문의 변화방향이 제가 이야기하는 ‘지혜의 저널리즘’과 일치합니다.

저는 아주 긍정적인 변화라고 봅니다. 물론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고, 뉴욕타임즈가 그런 변화에 대해서 역사적인 조망을 갖고 있으면 좀 더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하지만, 하지만 뉴욕타임즈의 종이신문 1면이나 홈페이지에 단순한 팩트 기사가 제일 위에 등장하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다루는 분석기사가 1면에 실리는 빈도가 갈수록 증가하는 게 보입니다. 1면 톱은 더 이상 오바마가 무슨 말을 했는지, 힐러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이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그 말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당장 오늘 아침에 제가 종이신문 1면에서 읽은 것이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를 설명한 기사입니다. 두 나라는 정말 복잡하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관계에 영향을 주는 큰 사건들이 현재 일어나고 있거든요. 저는 그 기사를 읽고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10년 전만 해도 그 정도로 훌륭한 분석기사가 뉴욕타임즈의 1면에, 그것도 그렇게 높이 배치되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20년 전에는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제가 책에도 썼지만 1948년의 뉴욕타임즈 1면을 찾아 읽어 보면 ‘트루먼이 이런 말을 했다’, ‘대통령이 저런 말을 했다’는 보도로 가득합니다. 그냥 정치인들이 한 말을 그대로 받아적는 게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통적인 기자들이 그런 분석을 안 한 것이 아닙니다. 취재가 끝나고 바에 가서 술 한 잔을 걸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단지 그 때는 우리가 그들의 그런 분석을 듣지 못했을 뿐이고, 지금은 그런 분석을 들을 수 있는 것 뿐입니다. 이제는 스포츠든, 정치든 그런 분석을 바탕으로 넓은 전략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겁니다.”

- 그렇다면 저널리즘의 그런 변화가 인터넷 등장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십니까?

“네. 그리고 그런 변화에는 긴 역사가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만 관심이 있는 팩트 중심의 저널리즘이 150년을 이어오면서 거기에 대한 반발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건 인터넷이 등장하기 이전이고, 그 역시 특정 테크놀로지의 등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바로 라디오와 TV입니다.

라디오와 TV는 뉴스를 배급하는 신문에게는 큰 경쟁자였고, 세계적인 신문 구독부수 감소는 이미 그 때 시작되었습니다. 통계를 보면 미국에서 신문 구독부수의 정점은 20세기 초입니다. 그러던 것이 라디오의 등장과 함께 경쟁이 시작되었고, 거기에 TV가 뛰어들어 경쟁은 더 심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의 등장으로 신문이 영향을 받는 것은 그런 오랜 트렌드의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대선 보도를 예로 들어보면, 케네디와 닉슨이 맞붙은 1960년 대선을 다룬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한 번 보세요. 하나같이 케네디가 이런 말을 했다, 닉슨이 저런 말을 했다는 식의 인용보도 뿐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어린 학생들도 케네디가 이긴 이유가 TV토론에서 닉슨보다 훨씬 좋아보였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지만, 당시 뉴욕타임즈를 들여다보면 그런 언급을 찾기 힘듭니다.

그런 추세를 시작한 사람 중 하나가 시어도어 화이트(Theodore White)라는 저널리스트입니다. 화이트는 1960년 선거를 시작으로 미국의 대선을 다룬 책 시리즈를 썼는데, 제목이 ‘Making of the President(대통령 만들기)’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그 시리즈를 탐독했습니다. 그 책에서는 선거운동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자세하게 보여주었죠.

전에는 그런 책도 없었고, 신문이나 다른 언론에서는 당연히 다루지 않았던 내용이죠. 그러다 보니 선거가 끝나고 일 년이 지나서야 그런 자세한 뒷얘기를 읽을 수 있었어요. 우리가 신문에서 읽는 얘기말고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면 기다려서 그 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저널리스트들로서는 그야말로 새롭게 눈을 뜨는 경험이었습니다. 화이트의 시리즈를 읽기 시작하면서 신문기자들은 비로소 자신들을 옭아매던 구속복(straightjacket)을 벗어나 자신들이 바에서 술을 마시며 하던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한 겁니다.

따라서 그런 변화는 인터넷의 등장만으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일부는 그렇게 150년 동안 지속되던 팩트위주의 기사작성에 대한 반발입니다. 그런 관행은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 여러나라에서 20세기를 지배했죠. 어떤 의미에서 인터넷은 그런 관행에서 탈출하게 해준 변화를 앞당긴 촉매제이죠.”

- 교수님께 그런 책이 ‘대통령 만들기’였다면, 제게는 ‘게임 체인지(Game Change)’였습니다.

“맞아요. 바로 그런 전통을 잇는 책이죠. 곤조 저널리즘(Gonzo journalism: 객관적 팩트만 보도하는 원칙을 버리고 취재대상에 적극적이고 주관적인 개입을 하는 헌터 톰슨의 취재 스타일)로 유명한 헌터 톰슨(Hunter Thompson) 아시죠? 톰슨이 롤링스톤에서 일하면서 1972년 미국 대선을 취재했습니다. 그 사람의 글 역시 기자들의 눈을 뜨게 해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읽는 신문기사와 ‘게임 체인지’의 차이는 화이트의 ‘대통령 만들기’와 그 책이 나올 당시의 뉴욕타임즈 기사의 차이와 비교해보면 훨씬 적습니다. 물론 ‘게임 체인지’는 화이트의 책에 비해 훨씬 더 분석적이고 많은 뒷얘기가 많습니다. 그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대통령 만들기’가 나올 당시 뉴욕타임즈는 분석적인 측면에서 지금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비교가 됩니다.”

- 마지막으로, 저널리즘을 대학에서 가르치시는 입장에서 체감하는 저널리즘의 미래는 어떻습니까?

“저널리즘의 변화는 학교에서도 느껴집니다. 일단 프로그램에 들어오는 학생들의 수가 줄었거든요. 하지만 졸업생들의 취업은 더 잘 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는 잘 모르지만 말이죠. 대학원과정은 예전보다 많이 비싸졌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변화는 이겁니다. 과거에는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학부를 나오면 작은 지역신문사나 방송사에서 일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아이오와의 시골 같은 곳에서 발로 뛰어다니며 경력을 쌓아야 좀 더 큰 언론사로 옮겨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신입사원으로 들어가면 뉴욕의 맨하탄이나 샌프란시스코, 오스틴 같은 대도시에서 일을 시작해요. 우리로서는 좋은 일입니다. 요즘은 아이오와에 졸업생을 보내기가 쉽지 않거든요. (웃음) 저널리즘의 미래는 밝다고 봅니다. 그리고 변화한 저널리즘 때문에 가르치는 일도 훨씬 더 재미있구요.”

대담=박상현 리틀베이클라우드 이사
인터뷰 도움=김익현 지디넷미디어연구소 소장, 엄진섭 커뮤니케이션북스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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