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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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특별할 것도, 강렬한 점도 없는 짧은 만남” 김종필 전 국무총리(JP)는 중앙일보 증언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첫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하지만 이제와 보면 그들의 첫 대면은 역사적인 만남이 됐다. 1949년 6월 이 둘은 JP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본부(육본) 정보국에 배치되면서 처음 인사를 나눴다.

당시 5개월이던 육사교육을 마쳤을 때 JP는 8기 1263명 중 공동 1등이었다. 그러나 JP는 종합품행테스트에서 공주중학교 선배 박병권이 면접관으로 있어 웃었다가 6등으로 떨어졌다. 당시 육사 1등 졸업생은 육사교장실, 2~31등은 육본에 배치되는 게 관행이었다. JP가 웃지 않았다면 박정희가 있는 육본 정보국이 아닌 육사교장실로 갈 가능성이 컸다.

8기 수석으로 졸업한 이헌영은 당시 육사 교장인 김홍일 준장의 부관으로 갔다가 6·25에 참전했다. JP에 따르면 그는 미아리전투에서 사망했는데 JP 동기생 중 가장 먼저 전사한 인물이다. 육본 정보국에 JP와 함께 배치된 육사 8기와 당시 정보국 작전정보실장으로 있던 박정희는 훗날 5·16쿠데타의 주역이 된다.

당시 박정희는 민간인이었다. 그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조직책을 담당한 혐의로 1948년 체포돼 49년 2월 사형 구형, 무기징역 선고로 군복을 벗게 됐다. 박정희는 백선엽 대령에게 군내 남로당 명단을 다 불고 그 대가로 풀려났다. 박정희를 구해 준 당시 육본 정보국장 백선엽은 박정희를 정보국 문관으로 채용했다. 전례 없는 위인설관(爲人設官)이었다.   

박정희의 조카딸 박영옥과 JP도 우연이 도와준 인연이다. 육군본부는 6·25 당시 대구에 있었고 정보국 숙소는 ‘영남여관’이었다. 박정희는 당시 박영옥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한(웅진) 대위나 김 중위를 찾으라”고 했다. 1950년 7월 박영옥이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 구미초 교사였던 박영옥의 동료 둘이 육본을 찾았다. 

당시 육본에 한 대위는 없었고, 김 중위(JP)만 있었다. 증언록에 따르면 JP는 박영옥에게 야전용 장교 모기장과 목침대를 제공하고 의사도 불러줬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1951년 2월 대구 중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박정희와 JP는 친인척으로 묶여 더 끈끈해졌다. 

박정희를 벗어나지 못하는 JP

JP는 박정희의 다른 2인자들과 구별된다. JP는 증언록에서 “때론 돕고 때론 대들었지만 박정희는 나를 내치지 않았다”며 박정희와 자신을 ‘혈맹’ 관계로 표현했다. 그 이유로 자신이 박영옥의 남편인 점을 꼽았다. 권력관계로 보면 5·16, 중앙정보부 창설, 공화당 창당 등을 주도한 JP는 박정희의 킹메이커였고 증언록에서도 JP는 박정희의 충신을 자처했다. 

   
▲ 1973년 9월22일 제3회 박정희대통령컵 아시아 축구대회 선수입장식에서 박수를 보내는 박정희(오른쪽)과 김종필.1973.9.22 사진=연합뉴스
 

바꿔 말하면 JP는 박정희에게 충성을 다했고, 능력도 있었지만 박정희 때문에 최고 권력을 잡지 못했다. 김정렴(제4대 대통령비서실장)의 회고록 ‘아, 박정희’에서 “박정희가 JP를 후계자로 염두에 뒀다”고 기록한 데 대해 JP는 증언록에서 “생전의 박 대통령이 날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을 내게 한적 없다”며 “박 대통령은 돌아가실 때까지 누구에게든 권력을 넘겨줄 분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서운해 하면서도 JP는 박정희를 부정하지 않았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에서 “(JP가) 박정희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JP가 할 말이 많을 텐데 박정희를 감싸고 옹호한다”며 “JP는 그 시절에도 결국 홀로 서지 못하더니 지금도 홀로 서서 자신의 역할을 보지 못하고, 자신이 활용당한 범위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부정할 수 없다면 찬양하기 마련이다.   

박정희는 좌익인가?

JP는 박정희의 좌익(남로당) 전력을 해명하며 증언록을 시작했다. JP가 ‘혁명(5·16쿠데타) 공약’에서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JP는 박정희가 6·25 때 북한과 싸웠고, 박정희에게 영향을 끼친 형 박상희가 사회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였다며 박정희가 좌익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JP가 말한 대로 박정희는 사회주의자로 오해된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JP가 ‘반공’의 관점에서 ‘박정희를 민족주의자 또는 애국자 정도로 평가한 것이 적절했다’는 뜻은 아니다.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에 대한 평가가 JP와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어보자. 박정희가 좌익 사상에 감명 받은 게 아니라 남로당 경력이 승진 등 출세하는데 필요했을 것이란 내용이다.  

박정희가 소대장 시절 중대장을 역임한 김점곤은 1999년 MBC ‘PD수첩’과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은 일종의 회색시대, 좌익과 우익이 혼동되는 시대였는데 그 중간에 있는 사람(박정희)은 회색분자라고 해서 오히려 나쁜 사람으로 평가됐다”며 “지금까지도 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민족에 얽매이지 않는 출세주의자였다. 대구사범학교 시절 최하위권 성적이었던 박정희는 교사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혼란스런 시기엔 군인이 돼야 한다’며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을 1등으로 졸업하고, 성적우수자 자격으로 일본 육사에 들어가 3등으로 졸업했다. 신간회와 건국동맹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박상희와 전혀 다른 길을 걷다가 남로당 가입 때만 형의 영향을 받았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JP가 말하지 않은 박정희의 기회주의적 속성 

박정희는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졸업 후 춘천 8연대로 부임했다. 직속상관인 부연대장 이상진 소령, 육사2기 동기생인 강태무·표무원 소령 등 박정희는 남로당원에 둘러싸였다. 1949년 5월 ‘8연대 월북사건’ 주인공인 강태무·표무원은 부하 300여명을 데리고 북에 올라갈 정도로 8연대에서 남로당은 대세였다. (김학민, ‘박정희 장군 나를 꼭 죽여야겠소’ 참고)

박정희의 이런 행보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쿠데타에 참가했던 엄민영은 일제에서 고등문관시험을 통과했다가 해방 이후 남로당원이 됐고, ‘공화당 4인방’ 중 한 명인 백남억은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다 대구 10월 인민항쟁의 도화선이 된 1946년 9월 총파업을 주도했다. 황태성, 박상희와 막역했던 김성곤 전 공화당 재정위원장은 일제시대 자본가였다. 이들 모두 박정희처럼 친일과 좌익을 넘나들던 TK(대구·경북)출신이다. 

박정희의 탁월한 처세술은 해방 직후에도 찾아볼 수 있다. 일제가 미국에 의해 패망한 이듬해인 1946년 5월 박정희는 한국광복군에 편입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했다. 한반도의 주인이 일제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포착한 결과다. 만주국 중위 박정희는 어떻게 광복군으로 입국했을까?

해방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의 광복군은 339명에 불과했다. 임정은 조선인 패잔병들을 모아 광복군으로 재편한 뒤 10만 광복군을 이끌고 귀국하려 했다. 계획은 광복군 내부 반발로 온전히 성사되지 못했지만 박정희는 관동군·만주군으로 구성된 광복군 제3지대에 들어가기 위해 북경으로 갔고 1대대 2중대장을 맡았다. (조희연,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참고)

지난해 10월20일 새누리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립군을 도왔다는 증언이 있다”고 주장했다. 위 사례를 모티브로 한 박영만의 소설 ‘광복군’(1967)에 ‘박정희 비밀독립군설’이 나오는데 이를 토대로 한 주장일 가능성이 있다. 박영만은 ‘광복군’을 박정희에게 전달했으나 칭찬은커녕 사실과 다르다며 호통을 들었다고 한다. (정운현, ‘실록 군인 박정희’ 참고) 

   
▲ 이승만 전 대통령(왼쪽)과 박정희 전 대통령
 

JP는 박정희의 이런 모습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증언록에서 “(광화문) 세종대왕 좌상 뒤에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와 조국 근대화를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지기를 소망한다”며 “앞으로 세울 동상은 동(銅)을 잘 골라 천년이 가도 변함없을 상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이승만 환국을 추진했나?

JP는 박정희 뿐 아니라 이승만에 대해서도 미화했다. JP가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 칭한 건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시점으로 보겠다는 뜻이다. 이 주장은 친일의 역사를 외면하고 1919년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헌법의 가치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받는 의견이다. 나아가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을 산업화 세력으로 둔갑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 1952년 07월22일 이승만대통령이 한강철교 테이프커팅 후 기차에 시승해 한강을 건너고 있다. 사진=정부기록사진집
 

JP는 박정희가 사실 이승만의 환국을 추진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권좌에서 내려와 미국으로 망명했다.

JP는 “1962년 하와이로 가 이승만을 모셔오라는 박정희의 지시를 받았지만 이승만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비행기를 탈 수 없어서 환국이 불발됐다”고 주장했다. 박정희가 ‘건국 대통령’과 우호적 관계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한국현대사산책’에 따르면 박정희가 이승만의 환국을 막았다는 내용이 있다. 

1960년 5월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은 허정 과도내각과 제2공화국 장면 정권으로부터 모두 귀국을 거절당했다. 이승만은 1962년 3월16일 사과성명을 발표하며 귀국을 추진했지만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다음날인 3월17일 특별지시를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막았다. 3월18일자 신문들도 사설을 통해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다. 

정당성이 없던 5·16 세력이 정권 초 권력마저 불안정한 상황에서 국민이 끌어내렸던 대통령을 끌어안긴 힘들었다. 대한민국 수구세력의 뿌리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으로부터 시작된다. JP는 “이승만 대통령은 근대화된 사고로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자유민주국가로 성장시킬 수 있는지 고심하던 애국자”라고 평가했다. 

JP는 또한 이승만을 “뼛속 깊이 항일주의자”라고 평가했다. 과연 그럴까? 비밀 해제된 미국 CIA 1948년 10월28일 ‘한국 생존의 전망’이란 문서는 이승만에 대해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며 “이 목적을 추구하며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1916년 10월6일 이승만은 교육사업을 하던 중 ‘호놀룰루 스타블러틴’이라는 신문에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며 “나는 반일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고 썼다. 1912년 11월18일 워싱턴포스트와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한일합방 후 3년도 안 돼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고 있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며 일제 식민지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 적어도 JP의 말처럼 “뼛속 깊이 항일주의자였다”고 보긴 어렵다. 중앙일보는 지난해 12월5일 JP 증언록 마지막 114화에서 박정희의 사상의혹을 씻어낸 반공국시, 이승만의 환국을 추진한 박정희 관련 사실 등을 “김종필 증언록이 밝혀낸 현대사 새로운 진실”이라고 보도했다. 

JP의 언론 장악력, JP를 검증하지 못한 중앙일보

JP 증언록이 나왔을 때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 박정희에 대해 미화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부분이었다. 중앙일보는 JP의 말을 진실의 경지로 끌어올리려 했다. 권력자를 검증하려는 언론 본연의 역할과 동떨어진 모습이다. JP 증언록을 그대로 믿을 수 없고, JP가 말하지 않은 현실을 봐야 하는 이유다.   

   
▲ 2000년 4월23일 여야 총재회담 이후 자민련의 향방이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가운데 서울 인근의 한 골프장을 찾은 김종필 명예총재가 티샷에 앞서 생각에 잠겨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직후부터 언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1961년 6월3일 청와대에서 당시 대통령 윤보선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쿠데타 세력에게 불리한 얘기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무장 헌병들이 기자회견장을 둘러쌌고 출입기자단 간사는 “곤란한 질문은 피하자”고 몸을 사렸다. 윤보선은 쿠데타 세력이 민간에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날 저녁 동아일보 1면 톱기사 제목은 “윤 대통령, 정권 민간이양 촉구”였다. 다른 신문들은 해당 기사를 내지 않거나 비중 있게 보도하지 않았다. 당시 기사를 쓴 이만섭 동아일보 기자는 김영상 편집국장과 경찰에 끌려갔다. 신직수 변호사(훗날 7대 중정부장)는 동아일보가 해명 기사를 써주길 요구하기도 했다. (이만섭, ‘5·16과 10·26’ 참고)

권력 앞에 당당했던 이만섭 기자는 박정희 정권의 눈엣가시가 됐다. 그랬던 이만섭도 1963년 12월 ‘기사 썼다고 잡아가던’ 박정희 정권의 여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됐다. 박정희 정권은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다. 비판자에 대해는 이만섭처럼 포섭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꺾어버렸다.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이던 장준하를 취조하던 JP의 모습을 보면 그렇다. 

1961년 사상계 7월호에 함석헌의 5·16 비판 칼럼이 실렸는데 이 때문에 글을 부탁했던 장준하가 남산에 끌려갔다. 당시 JP는 “정신분열자 같은 영감쟁이(함석헌)의 이 따위 글을 도대체 무슨 저의로 여기에 실었소”라고 따졌다. 장준하는 한일회담 등 박정희 정권의 정책을 비판을 지속했다. 그는 1975년 의문사로 사망했다.

박정희 정권은 언론을 통제했고, 언론은 정권에 이용당했다. JP는 증언록에서 “역사는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해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언론을 통해 자신의 원하는 역사를 기록해 나가고 있다. 지난해 말 114회를 끝으로 JP의 박정희에 대한 변명이 끝났다. 박정희를 비판하지 못한 JP를 재평가해야 할 때다. 

* <김종필에게 묻는다> 연재목차

1. 증언록 다시보는 이유와 5·16

2. 한일회담

3. 4대의혹사건과 공화당 창당

4. 황태성 사건, 첫번째 간첩조작

5. 1인자를 꿈꿨던 영원한 2인자

6. 김종필이 미워한 사람들

7. 박정희와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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