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7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일 위안부 문제 타결에 대해 “(한일 양국이) 합의를 이룬 것을 축하한다”며 “박근혜 대통령의 용기와 비전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위안부 관련 합의 타결은 북한 핵실험이라는 공동의 도전에 대한 한·미·일간 대응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7일 조선일보에 따르면 벤 로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안보 부보좌관은 지난 2일 한일 협상과정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 정부에 대해 상당히 압박을 가했다고 밝혔다. 한일 양국의 합의가 미국에게도 필요했다는 뜻이다. 

   
2014년 3월25일(현지시간) 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네덜란드 헤이그 미대사관저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의 대미 관계를 보기 위해선, 미국이 주도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한 1951년 연합국과 일본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일협정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의 한미일 관계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동북아 정책은 일본이 소련과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일본을 냉전의 동반자로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일협력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미국의 동북아 정책의 중심은 한국이 아니었다.  

전쟁 범죄 책임을 검토하던 미국의 모스크바 특사 폴리는 당시 미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은 우호적으로 취급돼야 하나,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국가로 한국이 특별히 고려될 자격은 없다”고 보고했다. 일본을 중심으로 동북아의 냉전구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식민지배 했던 한국 문제를 일본에 우호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샌프란시스코 회담 직전 이루어졌던 미 대통령 특사 덜레스와 요시다 일본 수상 사이의 회담에서도 일본에 대한 배려가 보인다. “한국은 독립된 나라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만약 한국이 (평화조약)서명국이 된다면 100만인의 재일조선인이 보상받을 권리를 취득해 일본은 난처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 

한일협정은 대일 굴욕외교인 동시에 대미 굴욕외교

2차 대전 전후처리를 위한 일본과 연합국 사이의 평화조약인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결국 일본의 전쟁책임을 관대하게 처리했다. 미국이 중심이 된 이 조약에서 소련·중국·한국은 서명국에서 배제했다. 미국이 일본에 주둔하고 개입해 일본의 안전을 지키는 내용으로 하는 미일안보조약도 맺었다. 다음 달인 1951년 10월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요청으로 한일회담을 시작했다.

케네디 행정부에 이르러 미국은 한일관계개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미 국무성이 주한·주일 미 대사관에 1962년 7월13일 발송한 전문에는 “합리적인 일본의 제안을 받아 한국 측이 흥정에 나서도록 만들기 위해 한국정부에 대한 추가적인 압력이 필요하다면 미국의 개발차관 공여가 협상타결과 관련돼 있다고 말하라”고 돼 있다. 한국정부 최고위층을 접촉해 청구권·무상공여·장기저리차관을 패키지(일괄타결)로 처리하도록 압박하는 내용도 있다.   

한일협정은 강제징용 등 피해자 보상금액을 놓고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한국에게는 실질적인 이익을 주는 반면 일본에게는 명분을 주는 방식을 선택했고, 미국이 3억5000만~4억5000만 달러의 금액을 제시해 협상을 압박했다. 한일 양국은 3억 달러에 협상에 합의했고, 양국은 각자 언론에 합의를 포장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의도대로 한일협정이 타결됐다. 국내에서는 굴욕적인 한일협정 반대시위가 발생했다. 한일협정은 대일 굴욕외교면서 동시에 대미 굴욕외교였다. 

한일협정의 성격은 베트남 전쟁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미국이 1964년 동맹국에게 베트남전 참전을 요청했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물론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던 일본도 파병 요청을 거부했다. 하지만 한국은 ‘한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이 빠져나가 한반도 안보위기로 이어진다’는 논리를 펼쳐 5만명의 젊은이를 전쟁터로 보냈다.

   
▲ 1965년 월남 파병을 준비하는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장병들.
 

서울대 박태균 교수는 박정희 정권이 파병을 서두른 이유 중 하나를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꼽았다. 4·19혁명을 계승하고 ‘민족주의’를 집권이념 중 하나로 제시했던 군사정부는 65년 한일협정으로 스스로의 이념을 포기한 상황이었다. 반대여론을 잠재울 계기는 베트남 파병밖에 없었다. 1965년 5월 박정희의 미국 방문이 돌파구가 됐다는 분석이다. 이로써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견고해졌고, 한일 양국의 수교로 미국이 원했던 한미일 삼각동맹의 틀이 완성됐다. 

결국 미국이 원하는 건 ‘강한 일본’과 한일 군사협력

정작 일본 전쟁범죄의 피해 당사자들인 위안부 할머니들과 한국의 국민들은 소녀상 철거 반대, 한일 양국 합의 무효 등을 외치고 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박 대통령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보냈다. 위안부 합의가 나오기까지 미국이 한일 양국에 모두 압박을 가했다는 것을 보면 위안부 문제 해결의 시급성은 한일 양국 보다는 미국에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서둘러온 새로운 한일 관계는 무엇일까?

일본 언론들은 7일 아베 총리가 북한의 4차 핵실험과 관련한 박 대통령과의 전화 회담에서 “(위안부) 합의가 있었기에 이런 기회에 협력을 정상 간에 확인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고, 양 정상은 “올해를 한일 신시대의 시작으로 하고 싶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보도했다.

때맞춰 일본 정부 대변인 자격으로 기자회견을 연 하기우다 고이치 관방부장관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에 대한 대응을 위해서도 정보면에서의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며 “협정의 조기 체결을 포함한 안보 협력을 가일층 추진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일본 언론은 보도했다. 체결 직전까지 갔다가 보류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서두르자는 메시지다.

   
지난 7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해 축하메시지를 보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한미일 삼각동맹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한 이 조치는 2012년 시도되었다가 국내의 반발에 밀려 좌절된 바 있다. 이명박 정부는 그해 6월 국무회의에서 국민들 몰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의결했다. 이 협정의 최종 목표는 한일 군사협정에 있다. 이번에도 미국이 배후에 있었다. 

위키리크스에 공개된 2008년 12월 주한미대사관 비밀전문에 따르면 2008년 9월10일 한미 안보정책구상회의(SPI)에서 미국이 한국에게 한일군사협력 체결을 촉구했으며, 2009년 4월 작성된 주일 미국대사관 외교문서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한반도 위기사태가 발생할 경우 자국민을 대피시키기 위해 자위대 항공기와 선박이 접근하도록 한국정부의 허가, 공항과 항만에 대한 정보를 원한다”고 밝혔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미국 입장에서는 한미일 삼각동맹 안으로 한국이 들어와야 하는데 위안부 문제가 계속 걸림돌이었고 이번 합의는 이를 해결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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