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성희롱 범죄사건은 ‘서울대 신 교수 사건’이다. 성희롱이란 말조차 낯설었던 1993년 10월 1심 소송이 시작돼 5년여 간 지속된 끝에 1998년 2월 대법원은 성희롱을 불법행위로 인정했다. 대법원은 성희롱이 인격권을 침해한다고 봤고 가해자 신아무개 교수는 우아무개 조교에게 5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서울대 화학과 실험실에서 1년 계약직으로 근무하던 우 조교는 책임자 신 교수에게 지속적으로 성희롱을 당했다. 우조교가 거부의사를 밝히자 당초 약속과 다르게 신 교수는 우 조교 재임용을 추천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희롱은 명백한 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됐다. 당시 법률대리인이 박원순 서울시장인 것도 눈길을 끈다. 

성희롱은 범죄가 된지 20여년이 흘렀지만 피해자는 여전히 섣불리 신고하지 못한다. 처음엔 자신이 성희롱 피해자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다. 삼성르노자동차에서 근무하는 김윤희 과장(가명)도 그랬다. 김 과장은 2012년 근무평가에서 SP(최고등급)를 받는 등 일 잘하는 직원이었다. (삼성르노 성희롱 사건 재판자료, 피해자 인터뷰 등으로 사건 재구성)

친절한 행동에서 시작

2012년 3월 김씨 소속팀에 새로운 팀장(최 부장)이 왔다. 오기 전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실제 최 부장은 친절했다. 발령 한 달이 지난 2012년 4월 최 부장은 김씨에게 산에 가자고 했다. 일반적인 직장인이 그렇듯 김씨는 귀찮았지만 ‘가겠다’고 답했다. 최 부장이 ‘계획한 코스’라고 한 산은 험했고, 가파른 곳에서 최 부장은 김씨의 손을 잡았다. 

산에서 거의 다 내려와서도 최 부장은 김씨의 손을 잡았다. 최 부장은 ‘둘이 술을 먹자’고도 했다. 김씨는 모두 거절했다. 이후에도 최 부장은 둘이 술을 마시자고 하거나, ‘와이프와 말이 안 통한다’는 식의 사적인 얘기까지 하는 등 김씨에게 접근했다. 최 부장은 김씨에게 4월 중순부터는 문자메시지나 사내 메신저를 따로 보내기도 했다. 

대화는 점점 수위가 높아졌다. 한 예로 최 부장이 “김 과장은 날 별로 안 좋아하나봐”라고 해 김씨가 당황하며 “아닌데요”라고 하면 최 부장이 “그럼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날 5초씩 쳐다봐”라는 식이었다. 부하직원인 피해자가 바로 저항하기란 쉽지 않다. 보통 이때 피해자들은 ‘짜증나는 상사가 있다’며 친한 동료나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김씨도 친한 후배나 친구들에게 최 부장의 메시지를 보여주며 ‘기분 나쁘다’고 말했다. 하지만 직장상사의 부담스런 행동, 특히 호의를 가장했을 때 이를 거절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실제 최 부장은 김씨의 1차 근무평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김씨는 당시 ‘부담스러운 일’ 혹은 ‘짜증나는 일’에 휘말렸다고만 생각했다. 

김씨가 이같은 말과 행동이 성희롱이라고 깨달은 건 친한 여자선배가 상사의 행동이 성희롱이라고 알려준 이후부터였다. 그전까지 김씨는 “그냥 징그러워서 생각하기 싫은 일”일 뿐이었다. 성희롱 피해자가 자신이 당한 일이 직장 내 성희롱이라는 것을 알아채거나 인정하는 일은 어렵다.  

성희롱은 상사의 친절한 행동에서 시작된다. 상사의 호의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부하직원 자신이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상황만 잘 넘기면 된다고 여긴다. 설사 상사의 행동이 성희롱이라는 의심이 들더라도 성희롱의 명확한 기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직장상사에게 저항하긴 쉽지 않다. 

심지어 김씨는 르노삼성연구소 성희롱예방담당자였다. “보통 회사에서 문제 일으키지 않을 것 같은 여성직원”에게 맡기는 자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된 성희롱상담교육을 받지 못했다. 물론 그에게 찾아와 상담하는 피해자도 없었다. 훗날을 위해 성희롱 대화를 녹음하는 등 증거를 확보하는 일도 처음 성희롱을 경험한 사람은 준비하기 힘든 일이다. 

   
▲ 사진=pixabay
 

따라서 성희롱 예방교육이 중요하다. 상시근로자 10인 이상 사업장은 성희롱예방교육을 1년에 한번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도록 법에 규정돼 있다. 교육을 실시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성희롱 교육은 각 사업장의 성 감수성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꽃’에서 ‘꽃뱀’으로 

‘구애’ 형식의 성희롱은 수위를 높여갔다. 기혼 남성 팀장은 김씨에게 “아로마오일 전신마사지를 해 주겠다”고 하거나 업무 중에 “보고 있어도 그립다”고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다른 직원들이 있는 회식자리에서 “사랑한다”고 외치기도 했다. 김씨는 예쁘게 보여지기만 하는 ‘꽃’이길 거부했다.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표하기도 했고 정중히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 부장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우리) 좀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할 것 같다.” 김씨는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성희롱을 인정하는 순간 문제는 복잡해진다. 문제를 제기하면 조직의 위계를 거스르게 되고, 그냥 넘어가면 성희롱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김씨는 1년 간 팀장의 부담스러운 행위에 시달리다가 성희롱임을 깨닫고 회사에 신고를 했다. “새벽까지 일하며 회사를 사랑했던” 김씨는 당연히 회사가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 믿었다. 

최 부장과 김씨의 상사였던 김아무개 이사는 성희롱 신고를 받고 며칠 뒤 “둘 다 회사를 그만두라”며 “인사팀에 공식화하거나 회사 밖에 문제 삼을 경우 내가 다친다”고 답했다. 인사팀 직원은 다른 직원들에게 ‘김씨도 동의했다’, ‘성희롱은 주관적이고 남자에게 불리하다’는 소문을 냈다. 김씨는 어느새 ‘꽃뱀’이 돼 있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발표한 2013년 상담사례를 보면 직장 내 성희롱 상담은 전체 상담건수의 56%로 절반 이상이었고, 성희롱 문제제기를 이유로 피해자가 격는 불이익에 대한 사례는 직장 내 성희롱 상담 중 35%에 달했다. 2010~2014년 민우회에 접수된 성희롱 상담사례 718건 중 피해자 불이익 조치에 대한 상담은 22%(162건)로 성희롱 사실을 호소하는 상담(65%, 469건)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가해자인 50대 팀장은 2013년 5월 ‘정직 및 팀장 보직해임 2주’라는 가벼운 징계를 받았다. 회사는 김씨가 성희롱 가해자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기 위해 동료에게 진술 받은 사실을 두고 ‘협박해서 진술서를 받았다’며 같은해 9월 김씨에게 견책 징계를 내고 연구직에서 사무직으로 업무를 전환했다. 김씨의 소송을 도운 후배는 근무태만을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저성과자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같은해 12월 직무정지·대기발령을 받고 김씨와 그의 후배는 각각 빈 사무실로 책상을 옮겼다. 인사팀 해당 공문에는 “승인을 받은 후 대기발령 장소를 이탈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사실상 독방에 갇힌 셈이다. 김씨는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로부터 징계가 부당하다는 결정을 받았다. 

피해자는 꽃뱀이 아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순결한’ 혹은 ‘진짜’ 성폭력 피해 여성과 소위 ‘꽃뱀’은 구별돼야 한다는 주장은 성의 주체가 남성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씨 역시 ‘꽃뱀’으로 몰린 게 억울해서 소송까지 가게 됐다. 그는 “팀원으로 미움 받고 싶진 않았지만 성희롱을 당하고 싶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 사진=pixabay
 

억울했던 김씨는 2013년 6월 소장을 접수했다. 피고는 가해자 최 과장, 그의 상사 김 이사, 인사팀장, 주식회사 르노삼성이었다.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 사건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당시 우아무개 조교는 근로권·남녀고용평등권 위반과 성희롱 등을 이유로 신 교수, 서울대총장, 대한민국을 피고로 해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했다.

1심은 서울대 사건과 같은 결론이었다. 서울대 사건에서  대법원은 사용자책임과 고용계약보호의무를 인정하지 않아 서울대총장과 국가에 대한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르노삼성 사건 재판부 역시 가해자의 ‘전신마사지 발언’ 등을 인정해 성희롱 범죄를 일부 인정했고, 다른 피고들의 죄는 묻지 않았다. 

1심이 진행되는 동안 김씨는 몸이 안 좋아 재판에 거의 나가지 못했다. 2013년 6월까지 이미 20차례 이상 심리상담을 받은 상황이었다. 김씨에 따르면 직장 동료가 최 부장을 옹호하는 거짓 증언들도 있었다. “1심 막판에는 너무 거짓인 게 티 나서 웃고 말았던 증언도 있었다. 난 증인도 없던 상황이었다. 그날 법정 앞에서 울었다. 법원에서 누가 나와서 달래고 그랬다.” 

김씨는 성희롱에 대한 미흡한 해결과 피해자·조력자에 대한 불이익조치에 대한 사측의 불법성을 다투기 위해 항소했다. 가해자 최 부장과 그의 상사 김 이사는 회사를 떠났다. 2014년 12월18일 1심 판결 1년 뒤인 지난해 같은날 2심 판결이 있었다. 재판부는 사용자 책임을 일부를 인정했다. 

사용자 책임 인정한 2심

2심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성희롱의 사용자 책임에 대해 “상급자가 그 부하직원에 대해 직장 내 성희롱을 한 경우 그 자체로 직무위반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피고(르노삼성)는 사용자 책임을 부정했던 ‘서울대 신 교수 사건’을 토대로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성희롱 예방 의무 도입 전 판결”이라며 적용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성희롱 이후 이어진 불이익 조치에 대해 △전문업무에서 배제 △김씨 견책 징계 △조력자(김씨의 후배) 정직징계 △대기발령 등 크게 4가지를 다퉜다. 재판부는 이 중 첫 번째에 대해 사용자의 배상책임을 인정했고, 인사팀에서 피해자 김씨에게 불리한 소문을 유포한 것과 관련해 비밀유지의무를 위반한 것이며 이에 사용자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보통 성희롱 피해자의 문제제기는 조직문화를 망치고 기업질서를 위협한다고 여겨져 쉽게 2차가해로 이어진다. 남녀고용평등 및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 14조에는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 관련해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피해발생을 주장하는 근로자에게 불리한 조치를 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이소희 활동가는 “회사 임원들은 조직을 관리하고 책임진다는 미명 하에 인권침해를 인정하는 순간, 자신과 조직이 모두 무너진다는 논리를 편다”고 지적했다. 르노삼성의 경우 피해자 본인이 성희롱예방 담당자였지만 유명무실한 자리였고, 노동조합도 없어 피해자 혼자 싸워야 했다.  

대법도 인정하면 성희롱 사용자책임 강화될 전망

피해자를 도운 건 한국여성민우회 등 시민사회계와 2심 판결을 이끌어낸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이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2심에서도 아쉬운 점이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 류형림 활동가는 6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고법 판결도 사용자 책임에 대해 자세히 다뤄 의미 있지만 피해자·가해자에 대한 부당징계도 총체적으로 봐야 하는데 재판부에서는 별건으로 봐 불리한 조치로 인정되지 않은 건 아쉽다”며 “이 부분에 대해 피해자도 대법에서 다퉈볼 의지가 있다고 밝혔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31일 사측은 2심에 불복하며 대법원에 상고했다. 이에 대해 미디어오늘은 르노삼성 측 구체적인 의견을 물었지만 7일 현재 답변을 받지 못했다.

르노삼성 성희롱 사건의 대법 판결 결과는 한국 사회가 성희롱 사건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기준이 될 것이다. 가해자 책임만 인정할 경우 남성 상사와 여성 부하직원 간의 개인적 일탈로 보는 것이지만 사용자 책임을 함께 인정하게 되면 직장 위계에서 오는 권력 문제로 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1998년 서울대 신 교수 사건 판결이후 20여년 만에 대법에 올라온 성희롱 사건에 관심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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