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년 유머, 누군가에겐 아픈 상처가 됩니다
병신년 유머, 누군가에겐 아픈 상처가 됩니다
[기고] 장애인들은 참여할 수도, 함께 웃을 수도 없습니다

저는 5살 때 추락사고를 당했습니다. 왼팔이 부러지고 오른쪽 망막에 염증이 생겼는데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10살 신체검사 때야 그 염증으로 시력을 거의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는 두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게 어떤 느낌인지 모릅니다. 두 눈의 초점이 맞게 누군가를 바라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왼쪽 눈으로만 바라보는 것일 뿐이죠. 그래서 한창 한쪽 눈의 초점이 안맞던 시절, 사람들은 저를 조롱하고 모욕하고 놀려대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사시야. 병신아. 눈병신아.”

그래요 올해는 병신년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올해를 그렇게 부르길 거부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장애인과 여성을 비하하는 나아가 차별하는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으며 누군가는 자신의 아픈 기억들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보집단 혹은 어떤 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에 그런 표현을 가져와 합리화 하려고 들 때 저는 많이 무기력해집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들의 언어가 협소해진 것일까? 하고 슬픔에 잠깁니다. 올해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병신년 외에도 2016년, 원숭이의 해 등 다양합니다. 누군가 병신년이라는 표현에 상처 받았다면 그것을 표현한 의도와 맥락이 그렇게 중요할까 싶어집니다.

 

   
▲ 원숭이가 원숭이 성운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민중의소리
 

“미안해요. 그 표현은 안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내 표현의 자유가 통제 당했다고 억울해해야 하는 일일까요? 누군가 자신을 가르치려 들었다고 자존심 상해야 하는 일일까요?

“광신자들이 열성을 부리는 것도 수치스런 일이지만,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런 일이다.” 프랑스의 작가 볼테르를 인용해봅니다.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배척하고 공격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와 또 다른 누군가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맞는 일일까요?

“저들이 말하는 국민 중엔 너와 나는 간데 없고 저들의 계획 속엔 너와 나의 미랜 없지.” 제가 좋아하는 꽃다지의 주문이란 노래의 가사도 인용해봅니다. 우리들이 말하는 민중 중에 장애인과 여성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지금보다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미래에 여성이 여성으로 장애인이 장애인으로 온전하고 마땅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없다면 어떨까요?

저는 그런 고민의 시작이 매우 사소한 말 한마디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어요. 대수롭지 않은 비하의 언어. 이 말도 안되는 세상을 만들어놓은 누군가를 공격하고픈 욕망이 제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참아내고 또 다른 평등의 언어를 상상해보는 것이 더 희망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제 몸과 마음에 박혀있는 트라우마들을 건드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말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저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제 아픔의 기억들을 전시하면서까지 설득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러는 게 이제 정말 지겹거든요. 진절머리가 나거든요.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 글을 이렇게 다시금 쓰게되는 것은, 누군가는 다시금 생각해 주리라, 고민해 주리라 하는 그 한줌도 안되는 희망에 다시 기대를 걸어보기 때문입니다. 주장할 것이 있다면 각자의 언어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한해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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