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3년차인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는 박정희 전 대통령 3년차인 1965년 6월22일 한일협정과 닮았다. 국민 특히 피해자의 목소리가 무시됐고, 일본 정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며, 공동의 합의문을 만들지 않아 각국 정부와 언론의 입맛대로 해석할 여지를 남겼다. 해당 합의로 문제를 덮는 효과도 비슷하다. 

지난 28일 양국의 합의내용은 △‘위안부’ 문제에 일본정부가 책임을 통감한다 △아베 총리 사과 표명 △한국정부가 설립하는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단에 일본정부가 자금을 내고 이후 양국이 협력해 사업을 한다는 것 등 세 가지다.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한국과 일본 간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부속 협정 4가지)과 비교해보자.  

국민·피해자 목소리 외면 “최종적으로 해결”

1961년부터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진행한 한일협상 내용이 알려지자 1964년부터 국내에서는 한일회담반대운동이 시작됐다. 당시 김 전 부장은 “제2의 이완용”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끝내 3억달러를 받으며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 문제를 끝냈다. 지난 28일 외교장관회담 결과가 나오자 비판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9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이번 합의는 1965년 합일협정과 사실상 똑같다”고 말했다. 지난 28일 한일 외교장관은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을 확인한다”고 발표했다. 1965년 한국이 발표한 합의문에서 양국이 피해자 청구권 문제에 대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한다”고 한 것과 닮았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는데 “최종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묵살하겠다는 뜻이다. 김 연구원은 “그동안 피해자할머니들과 시민단체가 요구했던 것은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을 묻고 교육사업, 즉 위안부 문제를 삭제했던 일본 교과서에 이를 다시 실어서 가르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일 합의문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일본정부의 심기 건드리지 않기 “배상 아니다”

김 연구원은 “합의문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더라도 (민간이 아닌) 국가 간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것도 전적으로 일본 쪽 의견을 들어준 것”이라며 “명백하게 책임을 묻지 못하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일 외교장관은 “(양국) 정부는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이번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한다”고 발표했다.

   
▲ 1962년 10월 오히라 일본외상과 회담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
 

박정희 정권은 1965년 한일협정에도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1960년 일본 극비문서에는 회담 이전부터 과거에 대한 보상없이 경제기술협력으로 해결하겠다는 전략이 담겨있다. 일본은 결국 ‘독립축하금’ 3억달러를 한국 정부에 지급했다. 일본 정부의 불법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위해서는 ‘보상’이 아닌 ‘배상’을 해야 한다.

지난 28일 기시다 일본 외상은 “배상이 아니”라며 “도의적 책임이라는데 변함이 없으며 법적 책임은 (65년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이 끝났다는 점도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 대법원은 “(일제에 의한) 피해자문제, 반인도적 범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판결했는데 박근혜 정부가 이를 뒤집으며 일본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1965년 당시 피해자에 대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일본정부가 한국에 3억달러를 주면 국내에서 개인 피해자가 발생했을 때 해결하겠다고 합의했다. 하지만 일본은 1993년 강제징용 피해자 관련 기록을 한국에 보내 60년대 당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번 위안부 문제 해결방식도 비슷하다. 

합의문에 따르면 일본이 10억엔을 내면 한국이 재단을 만들어 위안부 피해자 해결을 위해 쓰겠다는 것이다. 김민철 연구원은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며 “이미 1995년 아시아여성기금 창설했을 때도 피해자들이 돈을 원하는 게 아니라서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일본은 시민모금 6억엔, 정부 자금 48억엔을 냈지만 피해자들은 거부했다. 

공동합의문 없어 제멋대로 해석 

1965년 한일협정은 공동합의문이 없었고 한일정부가 각각 기자회견을 통해 각 국민에게 소식을 전했다. 한국정부는 당시 강제징용피해자의 미지불임금, 사망자 부상자에 대한 보상에 대해 앞으로 이를 더 이상 청구할 수 없다는 항목(청구권 8항목)을 빠뜨린 채 발표했다. 일본은 현재까지 이 항목을 근거로 개인청구권을 부정하고 있다. 

   
▲ 윤병세(왼쪽)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위무상이 28일 오후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지난 28일 역시 공동합의문 없이 각 외교장관이 기자회견을 통해 합의문을 전했다. 일본 외무상은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 여성에게 상처를 입힌 문제”라고 애매한 표현을 사용했고 이를 조양호 국립외교원 교수는 “일본 국고에서 나온 10억엔으로 피해자 지원이 이뤄지는 건 사실상 법적 책임을 수용했다”고 해석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소녀상’ 철거 문제는 일본 측 발표에는 없고,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발표에만 등장한다. 한국 측 합의문에는 “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 및 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한다”며 “관련단체와 협의해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김민철 연구원은 “이는 한국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해 ‘소녀상’을 철거하겠다는 것”이라고 봤다. 이미 협상전인 지난 26일 일본 요미우리 신문이 한국 정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한국정부가 소녀상을 이전하도록 관련 시민단체를 설득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그러자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은 “터무니없는 언론플레이”라고 해명했지만 실제 합의문에는 ‘소녀상’ 철거가 언급돼 있다. 한국 정부가 언론플레이를 한 셈이다. 

경제발전을 위한 한일협정, 군사협력을 위한 위안부협상  

1965년 한일협정과 2015년 위안부문제 협상은 모두 양국 정부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1962년 7월 주일 미대사관에 발송한 미국무성 전문을 보면 “한국정부 최고위층을 접촉해 청구권 문제를 청구권을 강조하지 않고 하나의 패키지(일괄타결)로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하라”며 “추가적인 압력이 필요하다면 미국의 개발차관 공여가 협상타결과 관련됐다고 말하라”고 돼 있다. 

해당 문서에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한일협정이 필요하고 금액의 성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액수가 중요한 것이라는 미국의 뜻이 담겨있다. 실제 박정희 정권은 이 자금 중 7370만달러로 1973년 포항제철, 280만 달러로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다. 

이번 위안부 문제 합의도 미국의 뜻이 반영된 결과다. 김민철 연구원은 “위안부 자체의 문제보다 한일군사보호협정 등 군사동맹 강화가 급물살을 탈 것”이라며 “미국 입장에서는 한미일 삼각동맹 안으로 한국이 들어와야 하는데 위안부 문제가 계속 걸림돌이었으니까 ‘불편하다’, ‘빨리 해결해라’ 이런 요구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사진=포커스뉴스
 

지난 2012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은 체결 직전까지 갔다가 여론의 반발로 유보됐다. 일본측이 제기한 군사정보보호협정과 상호군수지원협정 논의가 막히자 지난해 12월 국방부는  국회 동의가 필요 없는 ‘한미일 군사정보 공유 약정’을 추진했다. 한일 군사동맹 강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다.   

미국의 개입, 주도권은 누구에게

29일 중앙일보는 “박 대통령 사실상 협상 지휘, 미국 끌어들여 아베 압박”이란 기사에서 정부 관계자의 말을 통해 “평소 정책 하나하나 꼼꼼히 챙기는 스타일을 감안하면 협상을 박 대통령이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미국 정부 인사들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라고 일본을 압박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민철 연구원은 “한국이 미국을 동원했는지 미국에게 압력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개입돼 있다는 것”이라며 “협상 다음단계가 미국 주도하의 삼각동맹을 탄탄하게 만드는 것이 국제정치적 논리일 것”이라고 말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28일 특별성명을 통해 “한일 양국 위안부 문제 합의에 환영한다”는 뜻을 전했다. 

외교적 합의는 쉽게 깨기 어려운 약속이며 주변국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효과까지 있다. 1965년 한일협정은 족쇄가 됐다. 1990년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65년)한일협정보다 나은 조건으로 북한과 협상하지 말라”고 요구했고, 결국 2002년 김정일-고이즈미 북일정상은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명시했지만 위안부 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못한 ‘반쪽’짜리 공동선언을 가져왔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