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살인은 형제간에 벌어졌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고, 하나님은 카인에게 “아우 아벨이 어딨냐”고 물었다. 카인은 이렇게 반문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이 질문은 반복된다. 정부는 ‘형제’들을 내쳤다. 행정자치부는 지난달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법안소위에서 ‘형제복지원 특별법’은 “사회적비용이 많이 든다”고 반대했다. 

19대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지난 9일은 ‘형제복지원 특별법(내무부훈령에 의한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등 피해사건의 진상 및 국가책임 규명 등에 관한 법률안)’ 제정촉구를 요구하며 피해생존자 두 명(한종선, 최승우)이 단식한지 3일째 되는 날이다. 미디어오늘은 이날 국회 앞 농성장에서 하루 단식에 동참하며 최승우씨(47·남)를 인터뷰했다. 

‘밥 굶기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최씨는 “예전에 한번 열흘 굶어봐서 괜찮을 거예요. 종선이가 걱정이지”라고 답했다. 그는 왜 열흘이나 굶었을까? “저한테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동생뿐이었어요. 그런 동생이 죽었죠.” 최씨의 동생은 지난 2009년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 곡기를 끊고 죽을 생각이었다. 동생 역시 형제복지원 피해자다. 

“하루는 13소대에서 밥을 먹으러왔는데 동생이 보였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어요. 왜 동생까지 여기 끌려오게 만들었는지. 개인행동을 하지 못하니까 말은 못 걸었죠.” 1986년 10월30일 아버지가 찾으러 와서야 셋은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들 셋과 아버지 친구는 바로 부산 기장 바닷가에 가 회를 먹었다. 

   
▲ 형제복지원 전경. 사진=형제복지원사건진실규명을 위한대책위원회 제공
 

당시 바닷가에는 철조망이 쳐있었다. 최씨는 “사회도 감옥이구나 싶었다”며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었는데 무서웠다”고 말했다. 횟집에 도착했다. “회를 처음 먹어본 거죠. 비릿해서 입맛에 잘 안 맞았는데 아버지가 그러더라고요. ‘와 이 좋은 걸 안 쳐묵노.’ 그 말이 싫었어요.” 형제복지원에서 나왔을 당시 그의 몸무게는 42kg이었다. 비위도 약했다. 구타와 욕설로 멍든 최씨에게는 따뜻한 말이 필요했다. 

최씨는 집을 나왔다. 형제복지원에서 꿈꾸던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할머니가 2만원 준 걸 잔돈으로 바꿔 오락실을 전전했어요. 벽돌깨기, 갤러그 이런 거 하다가 친구를 만났죠. (부산)서면 떠돌이 생활이 시작됐죠. 처음 만났던 친구는 소매치기로 돈을 벌었어요. 저는 할 수 없었어요. 훔치면 형제복지원 또 끌려갈까봐…” 

최씨가 중학교를 한 달 다녔을 무렵인 1982년 4월(당시 14살) 한 순경이 갑자기 그를 부르더니 가방을 뒤졌다. 급식으로 받았던 빵이 있었는데 순경은 “어디서 훔쳤냐”고 물었다. 순경은 막무가내로 몰아세우다 형제복지원으로 넘겼다. 이후 4년6개월간 그는 형제복지원에 갇혀있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좀 귀엽게 생겼었죠. 소대장에게 성폭행 당하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소대장의 폭력이 괴로워 중대장에게 얘기했다. 잠시 근신소대로 옮겨갔던 소대장은 다시 복귀했다. 중대장은 최씨의 머리에도 상처를 남겼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라고 했다. 두피를 울퉁불퉁했고, 두피 안에서 머리가 솟아나고 있었다. 

“어느날 짜장면이 나왔죠. 맛있는 게 가끔은 나오거든요. 많이 달라고 했죠. 가져와서 보니까 냄새가 너무 지독했어요. 못 먹고 있었더니 중대장이 와서 ‘쳐먹으라’며 머리를 때렸죠. 주변을 보니 다들 그 역한 걸 허겁지겁 먹고 있더라고요. 중대장이 식판으로 머리를 내려쳐 찢어졌고, 담배가루나 된장을 바르다가 피가 안 멈추니까 두 바늘 꼬맸어요.”

그는 지금도 짜장면을 먹지 않는다. “한번은 종선이랑 같이 짜장면집에 갔어요. 트라우마를 극복하자고. 짜장면을 먹었더니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거예요. 아마 그때 기억이 되살아나서 거부하는 거 같아요.” 

   
▲ 지난 9일 국회 앞에서 농성중 쌀포대를 입고 있는 최승우씨(위쪽), 한종선씨와 정의당 관계자. 사진=시민 흑표범 제공
 

형제복지원보다 편했던 교도소 

괴로웠던 형제복지원의 기억을 피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유흥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는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뿐이었다. “힘든 일을 계속 못하겠더라고요. 술집을 차렸죠. 저처럼 집 없이 떠도는 친구들과 같이 일했죠. 형제복지원에서 나와 떠도는 친구들도 있었고. 미성년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어요.” 

이후 그는 감옥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마산구치소, 부산구치소, 김해교도소. 죄목은 아동복지법, 윤락행위등방지법, 식품위생법 등 다양해요. 경찰한테 잡혀갔다는 트라우마 때문인지 술만 먹으면 경찰을 폭행하기도 했고, 교도소 안에서는 못된 짓 하는 교도관도 때렸죠. 교도관도 공무원이잖아요.” 그렇게 4~5년을 철창 안에서 보냈다. 

“솔직히 구치소가 형제복지원보다 더 편하더라고요. 마음껏 먹을 수 있고. 때리지도 않고.” 그랬던 그가 칼바람을 맞으며 밥을 굶고 있다. 이야기 중간 중간 그는 말을 멈추고 괴로워했다. “당이 떨어져서요.” 그는 당뇨, 허리디스크, 심장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 

2009년 동생의 죽음이 그가 목격한 첫 죽음은 아니었다. 1991년 최씨는 첫사랑을 만났다.

“그 순간에는 정신차리고 살았어요. 성실하게 장사해서 먹고 살았죠. 처음으로 정말 많이 사랑했고 아이도 임신했죠. 하지만 장모님인가요, 저를 끝까지 반대하더라고요. 머리를 다 밀어서 집에 가두고 제가 찾아가도 만나게 하지 않았죠. 결국 태어난 아기는 입양을 보냈고, 첫 사랑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최씨는 한국이 싫고, 무서웠다. 외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수산회사에 찾아갔다. 월급을 떼이기도 하고 두 시간씩 자며 고기를 잡기도 했다. 그러던 중 아프리카 가나에 가서 돈도 많이 벌었다. 잠시 최씨가 다쳐 배를 타지 않았을 때 바다로 떠난 배가 침몰하는 사건도 있었다. 최씨는 죽음을 늘 목격해 온 사람이다.

“형제복지원 안에서는 맞아 죽는 거 많이 봤죠. 첫 사랑 죽고 나서 동생이 참 위안을 많이 줬거든요. 그랬던 동생마저 떠나니까 세상을 탓하게 되더라고요. 왜 나는 이렇게 불행한가.” 최씨는 6번 목을 매달았고, 모두 실패했다. 

최씨가 삶의 태도를 바꾼 것은 김해교도소에서였다. “거기 주임이 한분 계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저를 바꿔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네요. 현명하게 살아보자고 했어요. 당장 책을 읽으며 공부할 수는 없지만 스님들이 오면 얘기라도 잘 들어보라고.” 

동생의 죽음으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됐다. “너무 맞는 말만 하더라고요. 인생 빈손으로 와 빈손으로 가는데 무엇이 그렇게 힘드냐고 하는데. 그때 긍정, 배려, 이해 이런 걸 처음 알았죠.” 김해교도소에서 2012년 출소했고, 2014년 인터넷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이 기사로 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 지난 9일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최승우씨가 단식 중이다. 사진=장슬기 기자.
 

최씨에게 형지복지원은 평생 지고 갈 짐이다. “가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태어나는 건 고통이다. 원래 고공농성을 하려고 부산에 있는 전광판 4군데 다 알아봤다. 그런데 고공농성은 밑에서 도와줄 사람들이 필요한데 지금 우리(피해자)는 그럴 여력이 없더라.” 그에겐 선택지도 없었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특별법 통과를 외칠 수 있다. 

현재 형제복지원 특별법은 국회 안전행정위 법안심사소위에 머물러있다. 인터뷰가 진행된 지난 9일 19대 정기국회가 끝났고, 10일 임시국회가 소집됐지만 여야는 의사일정도 합의하지 못했다. 지난달 법안심사에서 거절당해 다시 심사에 올라올지도 의문이다. 최씨가 밥을 굶다 쓰러지면 단식을 이어갈 다른 피해생존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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