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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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국무총리(JP)는 “제2의 이완용”이라고도 불린다. JP는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한일 청구권 협상을 진행하면서 매국노, 제2의 이완용 같이 욕이란 욕은 다 들었다”며 “세상을 바꿔 가는 데는 고통이 따른다”고 했다. 가혹한 비판을 피할 수 없을 때는 ‘쿨’하게 인정하고 자신이 할 말을 해나가는 게 더 효과적이다.

JP는 왜 ‘매국노’라는 비판까지 받게 된 걸까? 지난 1965년 타결된 한일협정 때문이다. 1961년부터 한일회담을 주도한 JP가 굴욕적인 회담으로 돈 몇 푼에 식민지 피해를 ‘퉁’쳤다는 지적이다. 매주 수요일이면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수요집회’가 열리지만 한일협정은 위안부 문제 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한일협정이란 1965년 6월22일 체결(12월18일 성립·발효)된 한국과 일본 간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부속 협정 4가지(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재일교포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문화재·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를 가리킨다. 그 결과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차관 3억달러를 10년에 걸쳐 받았고, 식민지배의 피해를 받은 개인은 일본에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어렵게 됐다.  

박정희의 친일경력이 여전히 논란이 되는 가운데 “매국행위”라고 비판받는 한일회담에 대해 JP가 어떻게 해명했는지 관심을 끈다. ‘소이부답’에서 한일회담 내용은 24회(4월27일자)부터 시작된다. 24회에서 지난 2005년 도쿄에서 했던 연설 전문을 중앙일보 세 면(8~10면)씩이나 할애해 실은 것을 보면 JP가 이 연설을 꽤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5년 6월3일 도쿄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 초청강연’ 다시보기

JP의 연설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금년(2005년)은 1905년 일본이 한국과 보호조약을 맺은 지 100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지 60년,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지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보호조약’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일본은 을사조약에 대해 대외적으로 ‘우리나라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체결했다’고 했다. 일본의 관점이 녹아있는 ‘보호조약’이란 표현이 여과 없이 등장했다. 실제 을사조약은 한반도 식민화를 위한 예비수단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한 강제조약이었다. 체결당시 정식 명칭도 ‘한일협상조약’이다. 

   
▲ 김종필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연설 중에 한일교류의 중요성과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이 번갈아 등장했다. “최근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으로 비롯된 양국 갈등에도 지난 40년간 착실하게 성장한 양국 국민들 사이의 교류와 협력의 기반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한일교류의 시작인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자화자찬은 연설 곳곳에서 볼 수 있다. 

JP의 연설 중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의 지적을 인용해 일제 식민지배를 비판했다. 요지는 2005년 일본인들은 일·러전쟁 승리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데 일본이 당시 전쟁 승리에 취해 교만해져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섰다는 내용이다. 또한 JP는 정한론자인 사이고 다카모리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한일관계를 합리적으로 보는 정치인으로 보인다.    

JP가 연설을 통해 한일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일관계는 시혜니 종속이니 하는 일방적 낱말로 설명될 수 없는 양면성을 띠고, 결국 양국의 상호 이익으로 돌아오고 있다.” JP처럼 일제를 비판했던 정치인이 한일 협력을 강조한 것을 보면 JP를 ‘제2의 이완용’이라고 하긴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는 JP의 도쿄 연설을 증언록에 비중 있게 실은 이유라고 해석할 수 있다. 

JP는 과연 누굴 대표했나?  

한일협정 결과 한국이 받은 3억달러(무상)의 성격은 불분명하다. 한국은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전쟁배상)청구권’으로 해석하고 JP도 증언록에서 ‘청구권’이라고 했지만 일본은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협력자금’으로 부르고 있다. 

금액이 적다는 비판도 있다. 1960년대 당시 야당에서는 25억~30억달러를 주장했다. 일본에게 4년 지배당한 필리핀은 1955년에 무상지원 5억5000만달러로 합의했고, 역시 4년간 지배당한 인도네시아와 미얀마는 각각 2억2308만 달러, 2억 달러로 합의했다. 한국은 일본에게 약 36년간 지배당했다.

하지만 JP는 증언록에서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4억 달러였다”며 “패전국으로 전후 복구가 진행되고 있어 재정이 어려울 때였다”고 말했다. 전범국의 재정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JP는 피해자이자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한국의 관점이 아닌 범죄자이자 상대국인 일본의 관점에 서 있었다. 

노다니엘(일본학 박사, 월간중앙 객원편집위원)은 저서 ‘독도밀약’에서 다소 충격적인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한일 양국 지도자들이 외교상대를 ‘적’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우리’로 간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독도밀약’에 따르면 오노 반보쿠(자민당 부총재)가 JP(당시 36세)를 처음 만난 곳은 목욕탕이었다. JP는 오노가 초면임에도 “오, 선생님 물건 크네요”라고 했다. 노다니엘은 “한국 중앙정보부장이 일본 자민당 부총재를 만나서 하는 대화가 아니라 순진한 청년이 목욕탕에서 동네 선배를 만나서 하는 투의 말”이라고 평했다. 오노는 박정희 전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신과 박정희의 관계를 “부자관계”라고 하며 “아들의 경사를 보러왔다”고 했던 인물이다.

한일회담은 최선이었나?

JP는 증언록에서 상당 부분을 한일회담 당시 자신의 당당했던 태도를 회상하는 데 할애했다. JP는 1962년 11월 일본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 회담 중 오히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벌써 세 시간 정도 얘기를 하고 있는데 커피 한잔조차 내줄 생각이 없는 거요.” 오히라는 그때서야 커피를 내왔고 JP 앞에서 끙끙대기도 했다.  

JP는 오히라에게 일본 전국시대 이야기를 꺼내며 분위기를 풀었고, 그러자 오히라는 이에 감탄해 속내를 털어놨다고 했다. 이어 협상이 진행됐고 JP는 “협상을 네 시간 가까이 진행하면서 3000만 달러에서 시작된 ‘청구권’ 협상 금액이 6억달러+α까지 올라갔다”고 밝혔다. 증언록만 놓고 보면 JP라는 인물은 박정희가 요구했던 8억달러를 자신의 능력으로 돌파해 낸 훌륭한 외교관이다. 

   
▲ 1962년 10월 오히라 일본외상과 회담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연합뉴스
 

하지만 최근 공개된 미국 비밀문서에는 JP의 증언록과 배치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사무엘 버거 전 주한미국대사의 미 국무성 전문보고에는 “박정희는 배상요구보다는 원조를 포함한 ‘일괄 처리’에 관심이 있었으며 증거 자료가 없는 일부 청구권의 포기를 먼저 일본 측에 제안했다”고 돼 있다. 

이 말을 풀이하면 한국은 식민지배에 대한 증거자료를 최대한 수집해 (전쟁배상)청구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청구권, 경제협력 등을 묶어서 한 번에 처리하고 돈을 받는 데 초점을 뒀다는 뜻이다. 위 문서에서 버거는 “일본은 이 자금을 그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서 적절히 부를 수 있지만 한국은 그것을 청구권에 대한 배상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했다.  

협상타결 금액도 미국이 관심을 가진 흔적이 보인다. 1962년 9월26일자 주한미국대사관 비망록에 따르면 한 주한 미대사관 직원은 개인적인 견해로 무상공여 금액은 3억~4억달러 사이에서 결정될 것이라는 관점을 비춘 적이 있고, 이 범위는 합리적 관점에서 더욱 좁혀질 수 있는데 아마 그 범위는 3억~3억5000만 달러 사이라고 시사했다. 

미국은 한일회담에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1962년 7월13일 주일 미대사관에 발송한 미 국무성 전문은 “합리적인 협상을 통해 타결을 이루도록 한일 양측에 주재하는 대사관 인력과 영향력을 사용하라”며 “한국정부 최고위층을 접촉해 청구권 문제를 청구권을 강조하지 않고 하나의 패키지로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청구권 지불, 무상공여, 장기저리차관을 포함한 합리적인 수준의 타결방안을 생각해보도록 설득하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JP는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 셈이다. 그리고 협상 과정을 자신의 업적으로 미화했다.

JP가 얻은 것은 정치자금

한일협상은 애초 미국의 요구로 시작됐다. 1953년 7월16일 미국무성 정보보고서(No.6287)에 따르면 한일협상은 연합국 총사령관의 주선으로 시작됐다. 또한 한국이 확고한 협상자세를 갖는 이유는 미국에 군사, 경제원조를 받기 때문이고, 일본이 한일협상 타결의 필요성을 느끼는 이유는 미국이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서는 밝혔다. 

5·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미국 케네디 정부는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한일협상 타결을 적극 요구했고,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아가며 쿠데타 세력이 얻은 것은 정치자금이다. 1966년 3월18일자 미국 CIA 보고서 ‘한일관계의 미래’에는 “일본 기업들이 61년~65년까지 당시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다(6개 기업이 총 6600만달러 지원)”고 돼 있다. 한국이 일본에게 받은 금액 무상 3억달러의 약 5분의 1을 한일회담이 진행되던 중에 5·16 쿠데타 세력이 이미 뒷돈으로 받은 것이다.  

또한 이 보고서는 “공화당은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 기업으로부터도 지불을 받았는데 정부방출미 6만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과정에 개입한 8개 회사가 공화당에 11만5000달러를 지불했다”고 밝혔다. JP가 증언록에서 이런 기록에 대한 납득할만한 해명을 내놓지 않은 채 독도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남겼다. 

‘김종필·오히라 메모’ 엉뚱한 기록물?

JP와 오히라는 양국 정상에게 회담 내용을 보고하기 위해 합의안을 종이에 작성했다.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불리는 이 문서는 2005년 외교부가 공개했다. JP는 이 문서에 대해 “엉뚱한 기록물이 내가 쓴 메모인 것처럼 둔갑해 세상에 알려졌다”고 했다. 외교부 공개 문서는 메모가 일본어와 영어로 써 있는데 JP는 한글과 한자로 썼다는 것이다. 

JP는 “내가 작성한 메모가 장관을 통해 외무부에 전달되거나 보관하는 과정에서 분실됐을 것”이라 추측했다. 메모의 진위는 논란이 될 수 있지만 메모 내용은 “무상 3억불, 유상 2억불, 수출입은행에서 1억불+α”로 변하지 않았다. 확실한 건 한일회담이 대단히 비밀리에 진행됐다는 사실이다. 비밀은 불리한 정보는 숨기고 유리한 것만 밝힐 수 있다.

진짜 숨기고 싶은 사실, 독도 폭파론과 독도 밀약설 

‘김종필·오히라 메모’와 함께 왜곡됐다고 주장하는 사안은 ‘독도 폭파론’과 ‘독도 밀약설’이다. 중앙일보 증언록 5월4일자, 5월11일자 등 반복해서 이 신문과 JP는 ‘김종필·오히라 메모’와 함께 독도문제에 왜곡이 있다고 주장했다. JP는 한일 양국이 독도문제에 대해 ‘미해결의 해결(해결하지 않은 채 두는 것으로 해결하자)’로 마무리 짓고, 그 과정에서 JP가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해 독도가 방해가 되면 독도를 폭파하자고 했다”는 것에 대해 부인했다. 

증언록에 따르면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작성한 뒤 오히라가 뜬금없이 독도 얘기를 꺼냈는데 JP는 “회담 의제가 아니”라며 말을 잘랐다. JP는 “독도를 폭파하면 했지 당신들(일본)에게는 줄 수 없다”고 한 게 전부라고 주장했다. 독도밀약문서에 대해 JP는 밀약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JP가 이번에 한마디 말로 부인한 사실이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지 구체적으로 보자. 2007년 월간중앙은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인 1965년 1월11일 당시 일본 건설장관 고노 이치로의 특명을 받아 서울을 방문한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 국무총리를 만나 ‘미해결의 해결’ 대원칙 아래 모두 4개항으로 된 독도 부속조항에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 독도. 사진=외교부
 

1962년 10월29일자 미 외교문서에는 러스크 국무장관이 “독도가 어떤 섬인가”라고 묻자 JP가 “갈매기가 똥이나 싸는 장소”라며 “나는 일본에 독도를 폭파하자고 제안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일본도 1962년 9월3일 ‘독도 폭파론’을 제기했다. 이날 일본 외무성에서 열린 한·일 예비절충 4차 회의에서 이세키 유지로 국장은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라며 “크기가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파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는 사실 역시 미 외교문서에 나와 있다.  

2004년 연합뉴스가 보도한 미국 국무부 (기밀) 대화 비망록에 따르면 박정희도 “수교 협상에서 비록 작은 것이지만 화나게 하는(irritating problems) 문제 가운데 하나가 독도문제”라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도를 폭파시켜 없애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노다니엘 박사는 2007년 1월30일 JP의 셋째 형인 김종락(5·16 민간인 신분 가담)을 만나 밀약문서가 어디 있는지 물었고 김종락은 “내가 태웠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노다니엘에 따르면, 왜 문서를 태웠냐는 물음에 김종락이 “역사의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 두려웠다”고 답했다. 불태운 시점은 박정희가 암살당하고 신군부가 주도권을 잡아가던 때다. JP가 왜 지금에서야 김종락의 증언을 뒤집었을까? 김종락은 지난 2013년 세상을 떠났다. 

JP가 이 모든 것을 한마디의 말로 부인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독도문제에 대한 ‘미해결의 해결’ 상태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유지됐다. 2005년 3월21일 조선일보에 따르면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정문헌 의원은 일본 정부가 매년 3월 다케시마 영유권을 주장하는 구상서를 한국 정부에 보냈다고 밝혔다. 

정 의원에 따르면 구상서 내용은 이렇다. “주대한민국 일본국 대사관은 대한민국 외교부에 대해, 다케시마가 역사적, 법적으로 일본 고유의 영토임을 밝힌다. 대한민국이 다케시마에 대한 불법적인 영유를 중단할 것을 요청한다.” 한국 정부는 이를 문서대장에 기록·보관하고 반론하는 외교문서를 매년 발송한다. 

소위 ‘청구권’ 회담을 주도한 JP는 민족반역자로 비판받았다. 시인 김지하는 ‘시체여’에서 “썩고 있던 네 주검의 악취는 ‘사쿠라’의 향기가 되어… 민족적 자존심을 짓밟고 일본에의 노예화를 추진하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고 했다.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시위인 1964년 6·3사태는 일본정치가가 아닌 JP의 인형이 태워졌다. 

JP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2차 외유’를 떠났다. JP는 중앙일보 증언록에서 “(1964년)6월18일 아내와 함께 출국해 6개월 동안 세상을 구름처럼 돌아다녔다”고 표현했다. 정치적 책임을 무겁게 느끼며 쫓겨나듯 떠난 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그간 힘든 일을 하나 끝내고 휴가를 떠나는 모습에 더 가까워 보인다. JP는 ‘2차 외유’ 중 베트남전에 한국 장병을 보낼 계략을 꾸민다.

* <김종필에게 묻는다> 연재목차

1. 증언록 다시보는 이유와 5·16

2. 한일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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