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선출하고 대표자에게는 그만큼의 ‘권력’이 주어진다. 선출된 대표자들이 그 권력을 전횡해도 시민‧대중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롯이 투표 뿐, 인간의 선의에 기댄다면 가장 효율적인 의사결정구조이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표자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때, 시민‧대중은 거리로,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다. 발전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집회의 시위의 자유를 보장해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선출된 대표자는 민의의 분출에 대해 ‘불법’, ‘소요’, ‘폭동’의 딱지를 붙인다.

물론 시민‧대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고 해서 그들의 주장이 오롯이 정치에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정책에 대한 큰 틀에서 집회‧시위에 나온 대중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더라도 각론은 다를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수차례 민중혁명의 역사가 생겼지만 선출된 권력자의 얼굴만 달라진 경우가 많다.

따라서 다양한 민의를 일상적으로 수용할 장치가 필요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광장’이 그 역할을 했지만 수용할 이해관계가 많아지고 복잡해진 현대에서 그와 같은 방식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하기엔 이르다. 기술의 발전은 민주주의도 발전시킬 수 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등장은 거리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대중을 연결했다. 웹이 광장을 대체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공간에서 구현될 직접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2.0’이라 칭했다. 조직된 대중을 기반으로 하던 각종 사회운동과 집회‧시위의 양상도 새로운 광장의 등장으로 그 형태가 많이 변했다.

   
▲ 2013년 8월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을 비판하는 촛불시위가 열렸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가령 2008년 미국산 소고기 반대 촛불집회는 각종 커뮤니티와 아고라가 광장의 역할을 대체했다. 비단 한국 뿐만은 아니다. 2010년 아랍의 봄은 트위터를 통해 확산됐고 2011년 ‘월가점령운동’ 역시, 온라인에서의 토론이 척박해진 민중의 삶의 분노를 표출할 공간으로 백악관이 아닌 월가를 택하게 만들었다.

변화는 시작됐다. 그리고 시민‧대중들은 스스로 합리적인 의사결정구조를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그리고 보다 나은 직접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기술의 진화가 시작했고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했다. 이달 7일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용재홀에서 열린 ‘시빅 테크(Civic-tech)로 혁신하다 99% 민주주의’ 세미나는 기술의 발전이 직접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구현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자리였다.

루미오(Loomio) – 공론의 플랫폼

2011년 월가점령시위 이후 뉴질랜드의 젊은이들이 토론 플랫폼을 만들었다. 의제를 설정하고 토론이 오간 뒤 투표를 통해 의사를 결정한다. ‘루미오(Loomio)’라는 이 플랫폼은 전 세세계 92개국에서 사용된다. 웹에서는 물론 모바일에서도 구현된다. 물론 한국어도 지원된다.(www.loomio.org)

벤 나이트는 루미오의 창업자다. 그는 이날 세미나에서 루미오의 등장에 대해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점점 우리의 지식은 늘고 기술도 발전하고 있지만, 왜 우리의 정치‧경제적 기관은 도전과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 루미오(Loomio) 홈페이지
 

벤은 시민‧대중들의 참여, 직접민주주의가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는 정치, 나아가 사회를 바꿀 것이라 주장했다. 벤은 “권력이 위에 집중된 탑다운 형태에 회의감이 들었다”며 “뉴질랜드의 월가 시위는 지역적이고 비폭력적이며 민주주의적으로 주체들이 수평적이었고, 이를 통해 느낀 점이 있다”고 말했다.

벤이 설명한 루미오의 3가지 정신은 ‘교차성’, ‘변화적’, ‘평등적’이다. 벤은 “제주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에서 시위(민중총궐기)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었는데 시위대가 다양한 주제를 얘기하고 있다는 점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언론의 문제일수도 있지만, 시위가 민의의 다양성을 충분히 교차해 보여주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벤은 “과거가 혁명적이었다면 이제는 변화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대체하고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세상의 변화에 우리도 일치돼야 한다”며 “평등한 세상을 원하면 우리도 평등해야 하고, 사회 역시 지속가능하고 평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사이드 마드리드(Decide Madrid) – 광장이 현실정치로 진입하다.

지난 6월, 스페인의 제 1,2도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포데모스라는 정당이 참여한 연합 정치세력이 시장직을 석권했다. 지난 2011년 긴축정책을 반대하며 광장으로 나온 스페인 시민들이 24년간 마드리드 시장을 점유한 집권 국민당(PP)을 몰아낸 것이다.

마드리드에서 시장이 바뀐 후, 마드리드는 미구엘 아라나 카타니아를 시 디지털전략 디렉터에 임명한다. 그는 디사이드 마드리드(http://decide.madrid.es)를 출시했다. 기본적인 플랫폼 형태는 루미오와 유사하다. 이 플랫폼에는 4개월여 만에 수천개의 시민들의 건의가 올라왔으며 마드리드 시민 2%가 적극 참여하고 있다.

   
▲ 디사이드 마드리드(Decide Madrid) 홈페이지
 

미구엘은 세미나에서 “스페인 사람들은 우리가 변화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면 ‘할 수 없다’는 단호한 대답을 하곤 했다”며 “스페인의 정치적인 시스템이 너무 복잡하고, 미디어가 너무 많은 힘을 가지고 있고, 두 정당의 권력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구엘은 “하지만 우리는 변화를 이뤄냈다”며 “의회와 정당이 우리 얘기를 듣지 않는 상황에서 공개적인 구조의 새 정당을 만들었고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부터 이런 새로운 행동을 시정에 반영해야 하는 도전과제가 있고 그래서 만든 것이 마드리드 디사이드”라고 소개했다.

미구엘은 “아무나 제안하고 웹에서 투표한다”며 “제안이 어떤 한계를 넘으면 국민투표를 진행하고 이것은 구속력 있는 투표가 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곳에서는 극단적 논쟁도 할 수 있지만 대부분 하고 싶은 말을 진행한다”며 “여기서 의제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오픈노스(Opennorth) – 정치 참여를 위한 백과사전

선거가 다가오면 집으로 배달된 공보물을 본다. 하지만 허언 같은 공약에 자화자찬으로 가득한 후보들의 공보물 만으로는 내가 어떤 사람에게 투표해야 하는지 불명확하다. 캐나다에서는 이럴 때 인터넷에 들어간다. 특정 사이트에는 그가 발의한 법안과 찬성표, 반대표를 던진 법안의 정보가 있고 궁금한 것은 후보에게 직접 묻고 답변을 들을 수 있다.

제임스 맥키니는 오픈노스(www.opennorth.ca) 설립자다. 이 사이트에서는 정치, 행정에 관계된 각종 통계가 수록됐다. 제임스는 “오픈노스는 네트워크 조직으로 그룹과 개인이 의사결정을 하는 돕는 조직”이라며 “우린 정치적 이슈에 대한 전문가들이 아니지만 개발자들이 도구를 제시해 전문가들이 일하게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임스는 “몇몇 비영리 조직들이 우리 제공하는 스프레드시트를 채우고 있다”며 “이 정보를 가지고 각종 이슈에 대한 대표자들의 입장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오픈 노스(Open North) 홈페이지
 

위 세 가지 플랫폼의 문제는 웹 접근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민의는 어떻게 반영하느냐에 있다. 이에 대해서는 확고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세 사람 모두 도구의 발전이 민주주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하다는 입장이다. 벤은 “우리가 일하는 바가 완벽하진 않고 모든 이슈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면서도 “직접 민주주의는 다양한 국가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고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도 가능할까? 벤은 “우리가 예상 못한 변화는 가능하다”며 “한국에서는 민주주의가 서로의 의견을 듣고 협력해야 하는 것이라 느끼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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