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수영 시인의 시 ‘김일성 만세’(1960년 作)를 옮겨 적은 대자보가 경희대 학내에서 논란에 휩싸이며 수거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스스로 경찰이라고 밝힌 인사가 학교에 전화를 걸어 “학생 신변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등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경희대학교 경영학과 학생 A씨는 지난달 30일 김수영 시인의 시 ‘김일성 만세’를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청운관 게시판과 페이스북 페이지(‘멈춰, 봅시다’)에 게시했다. A씨는 학교나 직장에 시를 붙이는 커뮤니티 ‘멈춰, 봅시다’에 참여하고 있으며, 친구들과 함께 지난 9월부터 여러 시를 게시해왔다. 

A씨가 게시한 김수영의 ‘김일성 만세’는 “‘김일성 만세’/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시인이 우겨대니//나는 잠이 올 수밖에 (하략)”라고 시작한다. 

   
▲ 고(故) 김수영 시인의 시 ‘김일성 만세’를 옮겨 적은 대자보가 경희대 학내에서 논란에 휩싸이며 수거되는 사태가 지난 1일 발생했다. 스스로 경찰이라고 밝힌 인사가 학교에 전화를 걸어 “학생 신변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등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 ‘멈춰, 봅시다’
 

해당 시는 김수영 시인(1921~1968)의 유작으로 시인 조지훈과 장면의 검열찬성론을 비판했다. 언론과 정치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도리어 자유를 억압하는 당대 세태를 직격하는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대자보는 지난 1일 오후께 사라졌다. 확인 결과, 청운관 게시판을 관리하는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행정실 측에서 대자보를 수거해간 것이다. 앞서 30일 대자보가 게시되자 이날 오후 4시 30분 극우 성향의 사이트 일간베스트에 대자보 사진이 공유됐다. 페이스북 페이지에도 ‘빨갱이 XX’와 같은 댓글이 달렸다.

후마니타스 칼리지 행정실 측은 3일 “1일 오후 ‘김일성 만세’ 시에 대해 외부에서 우려스러운 문의가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즉시 게시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본 사항을 전달하려 했으나 연락처가 적시되지 않아 연락할 수 없었다”는 내용의 경위문을 게시했다.  

행정실 측은 경위문을 통해 “게시자가 경희대 구성원인지 외부 단체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우선 게시물을 수거, 보관 후 게시자를 기다려보기로 하고 게시물을 수거했다”며 “다음날 게시자가 행정실을 방문했고 행정실은 게시자가 본교 학생임을 확인한 후 게시물을 돌려주고 경위를 설명했다”고 해명했다. 

   
▲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행정실 측은 3일 “1일 오후 ‘김일성 만세’ 시에 대해 외부에서 우려스러운 문의가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는 내용을 담은 경위문을 게시했다.
 

후마니타스가 경위문에서 언급한 ‘외부 전화’를 처음 받은 곳은 경희대 학생지원처였다. 대자보와 관련해 김수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이 쓴 시로 오인하는 등 교내 안팎에서 논란과 항의성 전화가 있었다. ‘김일성 만세’라는 제목만 보고 이념적이라고 판단한 탓이다. 

자신을 경찰이라고 소개하며 학교에 전화한 인사도 있었다. 학생지원처에 따르면, 해당 인사는 ‘다양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민감한 제목을 달아 (대자보를) 게시한 학생들의 신변이 위험할 것 같아 우려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경찰의 학생 사찰 혹은 외압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이 전화를 직접 받은 학생지원처 관계자는 7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스스로 경찰이라고는 했지만 소속을 밝히지 않아 진짜 경찰인지 여부가 확인된 것은 아니”라며 “당시 여러 (항의성) 전화를 받았을 때에는 게시한 사람이 누군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게시판을 관리하는 후마니타스 행정실에 알린 것”이라고 말했다. 

   
▲ 시인 김수영.
 

경희대 학생 A씨는 “학내 문제에 대한 경찰의 간섭이 있었고, 그 강도가 교직원으로 하여금 연재물을 수거하게 할 정도로 유의미한 간섭”이라면서도 “경찰 연락 내용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교직원의 과잉 해석이었을 수도 있으니 사실관계를 더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난달에도 경찰이 서울 마포구에서 가구공방을 운영하는 황아무개씨에게 공방 창문에 붙여놓은 ‘독재자의 딸’이라고 적힌 게시물을 뗄 것을 요구하는 등 공권력이 나서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사건이 있었다. <관련기사 : “박 대통령이 독재자의 딸이라는 근거를 대라”>

관할서인 동대문 경찰서 정보과 관계자는 “사실 관계를 파악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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