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이미 100회를 넘겼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이 기사는 스토리펀딩으로도 연재됩니다. [관련기사 : 516 쿠데타 마지막 생존자, 김종필]

“우스갯소리를 좀 하겠다. 인간이 어떻게 하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느냐, 미운 사람 죽는 것을 확인하고 죽을 때까지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숨 거두는 사람이 승자야. 그런데 졸수(90세)가 되고 보니 미워할 사람이 없어.” 

지난 2월23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JP·89)의 부인 故 박영옥 여사의 빈소에서 JP가 조문객들에게 한 말이다. 노회한 정치인이 덕담하듯 혹은 인생의 진리를 발견한 듯 내뱉은 말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정치9단’ JP의 말을 교훈처럼 받아들일 수는 없다. 

‘소이부답(笑而不答)’

정확히 일주일 뒤인 지난 3월2일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우스갯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중앙일보는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JP의 청구동 자택 1층에 걸려있는 글씨이기도 하다. ‘미소 지을 뿐 대답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의 ‘산중문답’에 나오는 구절이다. 

JP는 그동안 회고록 집필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미소로 답변을 대신했을 뿐이다. 그러던 그가 왜 지금 입을 열었을까? “미운 사람이 죽는 것을 다 확인”해서 였을까. 실제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권력을 함께 누렸던 사람 중에 JP 증언에 대해 반박할 수 있거나 실제로 JP와 경쟁관계에 있던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 

바꿔 말하면 JP가 역사를 왜곡하더라도 바로 잡기 어려운 상황이다. JP는 증언록 곳곳에서 자신과 다른 주장을 했던 이들의 말을 반박하기도 한다. 증언록에서도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지난 3월3일자 ‘소이부답’에서 JP는 목숨 걸고 ‘혁명(5·16쿠데타)공약’을 쓸 때 뇌리에 ‘역사는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해 나가는 것’이라는 말이 스쳤다고 했다. 

‘현대사 연출가’라는 그의 별명답게 그는 역사를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증언록만 읽으면 JP가 5·16을 주도했고, 5·16은 4·19와 같은 맥락의 혁명이며, 신군부의 쿠데타와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이해된다. “군부의 중심은 JP”라면서도 그는 1인자를 넘보지 않으며, 경제발전은 물론 베트남전 참전을 통해 안보를 지켰고, 북방외교를 위해 3당합당이 필요했다. 

전직 대통령 관련 평가도 흥미롭다. 지난 22일 세상을 떠난 김영삼 전 대통령(YS)에 대해 1992년 대선 이전부터 “YS가 차기 대권을 맡는 게 좋겠다”고 예견했다고 밝혔고, DJP연합을 통해 정권교체에 성공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를 이용했다”고 평가했다. 자신이 원했던 내각제가 물 건너가자 JP는 대인의 풍모로 권력을 양보한 것처럼 서술하기도 했다.  

   
▲ 1989년 김영삼 민주당 총재(오른쪽)와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골프회동 도중 대화하는 모습.
@연합뉴스
 

증언록은 JP 1인칭 화자가 말하는 형식인데 중앙일보 박보균, 한애란 등의 기자들과 전직 중앙일보 논설위원인 유광종 작가를 섭외해 JP의 증언을 재구성했다. JP가 한 말을 취재기자들이 녹취해 보완하고, 작가가 다듬은 것으로 보이는 증언록은 웹툰(JP무빙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이 만화 중간에는 실제 자료사진까지 첨부해 사실성을 더했다.

한 사람의 발언이 중앙일보를 거쳐 신빙성을 얻는 과정에서 증언록에 대한 역사적 책임은 분산된다. 증언록의 왜곡은 JP만의 책임도, 중앙일보만의 책임도, 작가만의 책임도 아닌 게 돼 버렸다. 증언록은 책으로도 나올 예정이고, 지난 5월 중앙일보는 JP의 사진집 ‘운정 김종필’을 출판하기도 했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3월10일 JP와 중앙일보의 ‘소이부답’ 연재에 대해 현대사를 왜곡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하는 기사에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5·16에 대한 그의 생각, 박정희와 박상희(JP의 장인, 박정희의 형)에 대한 평가, 황태성 사건과 한일회담에 대한 평가, 정치를 가리켜 ‘허업(虛業)’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 많은 재산을 축적했는지 등이다. 

이는 한국사회가 JP와 독재정권에 던지는 상식적인 물음이다. 미디어오늘은 JP와 중앙일보가 이런 질문에 얼마나 충실하게 답변을 했는지 살펴보고,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해 다시 질문하려고 한다. 또한 JP 증언의 맥락과 의미도 살펴보고, 그가 말하지 않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재조명하려고 한다. 

물론 100회가 넘게 연재되고 있는 증언록에는 의미 있는 발언도 있다. 북한 무역상(차관급) 출신 황태성이 공작금을 가지고 내려와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쓰였고, KBS 현대화 자금으로 쓰였다는 소문이 일부 사실로 밝혀지기도 했고, JP가 과거 주장해오던 것을 이번 증언록에서 뒤집기도 했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셋째 형이자 JP의 장인인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다. 

지난 23일 중앙일보 증언록 에서 JP는 “YS도 가고 이제 나 혼자 남았다”며 “조물주가 나를 이 세상에 남겨놓은 이유는 마무리를 하라는 뜻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승자다. 그의 증언은 역사가 될 것이다. 미화의 주된 대상은 당연히 JP 본인이다.  

JP, 군부 중심이자 5·16 설계자?

쿠데타 세력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 중 하나는 박정희의 좌익전력을 은폐하는 일이었다. 5·16쿠데타 직후 미국은 박정희 좌익전력에 대해 의심했고, 북한은 좌익세력의 쿠데타를 환영했다. 5·16의 성공을 위해 박정희의 좌익전력을 덮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고, 이후 박정희 정권의 안정을 위해 ‘반공’은 지속적으로 악용됐다. 

증언록 시작을 알리는 3월2일자 중앙일보 1면 기사의 제목은 <5·16 반공 국시, 내가 넣었다>이다. JP가 고민 끝에 만든 ‘5·16 혁명공약’ 제1항 반공국시가 박정희를 위한 공약이었다는 뜻이다. JP는 박정희에 대해서도 미화하지만 본인에게 이익이 될 만한 수준까지만 했다. 증언록 9회에서 “JP가 5·16을 기획하고 설계했다”고 했다. 

JP는 5·16과 관련한 기록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뒤집었다. 1963년 8월 쿠데타 세력이 발행한 책 ‘한국군사혁명사’에는 박정희와 육사 8기생이 1960년 11월9일 신당동 박정희 소장 집에 모여 “정군과 구국을 위한 혁명을 확인하고 거사를 위한 동지의 조직에 전력하기로 서로를 격려했다”고 나온다. 

JP는 이에 대해 “엉터리(지어낸 이야기)”라며 당시 박정희 소장 집 회동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한국군사혁명사’는 JP가 해외에 있을 때 작성됐는데,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5·16을 주도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실이 아닌 내용을 넣었다는 것이다. JP에 따르면 5·16의 중심은 박정희가 아니라 JP 본인이다. 

   
▲ 1962년 11월 한일 국교수립 등을 논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귀국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귀국 인사차 박정희 의장을 예방했다.
@연합뉴스
 

JP가 박정희를 허수아비처럼 묘사한 부분은 더 있다. 소이부답 1회 <“박정희 권력의지 약해 내가 장도영 체포”>에 따르면 “박정희가 18년간 집권했지만 대통령을 할 만하다고 생각한 것은 6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라고 했다. 이런 박정희를 대신해 장도영을 체포하는 등 군사정권을 이끈 장본인은 JP다. 

장도영 14대 육군참모총장은 1960년 5월16일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문의 명의자로 군정 최고 권력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초대 의장이다. 증언록에 따르면 박정희가 장도영을 5·16 간판으로 내세웠는데 그는 같은해 7월 ‘반혁명혐의’로 체포돼 숙청됐다. 결과적으로 장도영은 이용당한 셈인데, JP는 “장도영이 혁명을 파괴할 것 같아” 체포했다고 포장했다.  

5·16은 정군운동의 연장선인가?

‘한국군사혁명사’에 따르면 박정희 소장은 4·19 이전에도 쿠데타를 기획했고, 사실 한국군은 이미 1950년대 즉 이승만 정권 때부터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이 있는 집단으로 부상해있었다. 5·16 거사주체들은 부패한 군 내부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정군 운동(군 개혁)에 나섰지만 무능한 장면정부에 의해 좌절되자 불가피하게 ‘혁명’을 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홍석률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의 논문 ‘4월혁명 직후 정군운동과 5·16쿠데타’에 따르면 거사주체장교 중 일부가 정군운동으로 예편된 송요찬 11대 육군참모총장에게 이승만 사임직후(1960년 5월) 찾아가 군을 움직여 정권을 장악해달라고 했으나 송요찬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박정희가 바로 다음날 송요찬에게 사임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고 했다. 

비슷한 일은 최영희 12대 육군참모총장에게도 있었다. 조갑제의 저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1960년 6월경 JP가 최영희를 찾아 “나라가 혼란하고 좌익이 발호하고 있는데 군이 가만있을 수 있겠냐”는 이야기를 했다 거절당했다. JP와 15명의 장교는 최영희의 용퇴를 요구했다가(16인의 하극상 사건) 군법회의에 넘겨지기도 했다. 

박정희는 1960년 11월 이미 장도영에게 거사 계획을 말했다(장도영은 이를 부인). 군을 정화하겠다고 나선 정군파들은 왜 정군운동의 대상자들에게 쿠데타를 도와달라고 했을까? 육군참모총장을 내세운 것에 대해 홍석률 교수는 “(한국)내부적으로 장도영 총장을 내세우면 쿠데타가 소수 장교집단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전군의 지지를 받고 확실한 반공 쿠데타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조갑제의 위 저서에 따르면 실제 거사 때 동원된 핵심병력은 김포 해병여단, 6군단 포병대, 공수단이었는데 이 중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과 공수단장 박치옥은 육사 5기생으로 박정희보다는 장도영과 더 친밀한 관계였고, 장도영이 쿠데타를 주도하는 것으로 알고 여기에 참여했다고 했다. 육참총장을 끌어들이는 것은 쿠데타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시선도 중요했다. 친미주의자였던 장도영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유엔군사령관 매그루더와 친했다. 쿠데타 직후 미8군이 반발하자 JP는 자신이 미군을 설득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5·16 참가자로 최고회의 정보분과 위원이었던 방원철은 저서 ‘김종필 정체’에서 미군을 설득한 것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미 정보기관과 접촉해 성사시킨 사람은 전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였다는 설이 당시엔 기정사실처럼 돌아다녔다.

어찌됐건 미8군 사령관 매그루더에게 보내는 서한은 장도영 이름으로 전달됐고, 미군은 일단 쿠데타를 인정하기로 했다. JP는 쿠데타 보름만인 1960년 7월 초 장도영을 그냥 두면 혁명이 파괴될 우려가 있어 체포했다고 밝혔다. 쿠데타 주도세력에게 장도영은 미군 방탄용에 불과했고, 장도영은 순진했다.   

5·16은 혁명인가?

홍석률 교수는 “확실한 것은 군 쿠데타 모의는 정군운동이 완전히 좌절된 시점이 아니라 그것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병행해 전개됐다”고 주장했다. 5·16의 성공원인은 크게 2가지다. 박태균(서울대 교수), 김일영(성대 교수) 등은 주로 당시 장면 총리, 윤보선 대통령 등 한국 정치지도자의 소극적 대응을 원인으로 꼽고, 홍석률 교수는 한미관계에서 원인을 찾는다.

JP는 증언록 곳곳에서 부패한 군 수뇌부와 이를 개혁하지 못하는 장면 정부의 무능을 비판한다. 정군운동과 무관하게 군 내부에서 부패한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방원철의 저서 ‘김종필 정체’에 나온 김형욱(이후 중앙정보부장, 육사 8기)과 JP의 대화를 보면 5·16이 사적이익을 위한 쿠데타였다는 정황이 드러난다.

1960년 4월혁명 직후 JP는 “4·19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거사 명분이 사라졌다”며 “한발 빨리 거사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형욱은 “자네 그게 무슨 망발인가”라고 힐책하자 JP는 “그게 무슨 소린가, 망발이라니”라고 답했다. 전쟁이 끝나고 장교들의 승진이 밀려있던 답답한 상황을 뒤집을 쿠데타가 시민혁명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장면 총리는 쿠데타가 일어나자 몸을 숨겼고, 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구나”라고 했다. 쿠데타 세력이 작성한 ‘5·16 혁명실기’에 따르면 장면 정부는 4·19 1주기 시위진압을 위한 군사계획인 ‘비둘기 작전’을 구체화했고, 쿠데타세력은 이를 이용해 쿠데타를 성공했다. 장면정부는 민주적인 개혁을 하다 붕괴된 것이 아니라 민주적 요구를 배반하고 군대를 정치에 이용하다 당한 것이다. 쿠데타세력은 장면정부의 무능을 이용했을 뿐이다.  

쿠데타 세력들은 ‘군사혁명사’에 미군이 정군운동을 반대한 사실에 대해 비판하기는커녕 제대로 서술하지도 않았다. 또한 쿠데타 이후 정군운동 정신을 이어 군 개혁을 단행하거나 정군을 반대했던 미군의 내정간섭을 막기 위해 작전통제권을 회수하지 않았다. 오히려 권력 유지를 위해 반공을 내걸었고, 미국 요구에 맞춰 한일회담을 밀어붙이고 베트남전에 뛰어들었다. 

5·16이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21세기 위정자들조차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이 질문에 JP는 이렇게 답했다. “쿠데타면 어떻고 혁명이면 어떠냐.” 증언록은 모두 5·16을 혁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증언록 7회에는 역술인 백운학과 대화를 길게 실으며 그의 입에서 “혁명”이라는 단어가 나왔고, “(박정희가) 20년은 간다”고 한 사실이 나온다. 5·16은 혁명이고, 장기집권은 운명이라는 메시지를 주려던 의도였을까. 

5·16 주체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 중 한명인 JP라는 ‘승자’의 증언록은 곧 역사가 될 것이다. 회고록이란 ‘지나간 일을 돌이켜 기록한다’는 뜻이다. 회고의 과정에서 미화와 왜곡은 쉽게 따라붙는다. JP 증언록은 회고록인가, 자기변호인가.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지난 2월22일 오후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된 부인 故 박영옥 씨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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