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지면 언론 시장은 4대 신문사가 지배하고 있다. 한국과 달리 대만 신문은 비주얼을 강조한다. 사진의 비중이 한국보다 높고 더 자극적이다. 

한국의 3대 신문사 조선‧중앙‧동아는 30년간 종이 매체를 독점하고 있다. 그러나 대만 시장은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중앙일보’(中央日報), ‘연합보’(聯合報) 그리고 ‘중국시보’(中國時報)가 시장을 주도했다.

중앙일보는 국민당이 운영하는 당 기관지였다. 독재 시절에 국민당의 하위 조직 그리고 학교, 공기관에서 강제적으로 구독해야 했던 신문이다. 당 중앙의 정책과 그 체계가 중앙일보를 통해 전달됐기에 이 신문은 70년대 대만 제1대 신문사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 후 중앙일보는 고지식한 이데올로기(ideology)를 고수했다. 언론 자유화를 겪으며 시장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자연스레 경영이 악화됐다. 국민당은 신문의 적자에 부담을 느꼈고 2006년 폐간했다. 

   
▲ 1966년1월1일 출간된 국민당 기관지 중앙일보 1면이다. 당시 대만의 신문지 중 발매부수 1위였다. ⓒ양첸하오
 

‘연합보’와 ‘중국시보’는 문민신문(文人新聞)이지만 경영자 모두 국민당 중앙상무위원(당 최고위원)이었다. 다시 말하면 대만 신문사 대부분은 친국민당 인사가 주도했다. 초기 이 두 신문사는 반공주의를 표방했다. 연합보는 외성(外省) 세력 중심인 국민당을 더 옹호했다. 당내의 대만 본토파, 특히 1988년부터 집권한 리뎅휘이(李登輝) 총통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이었다. 

‘중국시보’는 비교적 개방적이었다. 한국의 동아일보처럼 엄혹했던 독재시절에도 국민당을 직접 비판했고 건설적인 담론을 내놨다. 국민당에 반발하는 세력과 운동권의 목소리를 주목했다. 또 탐사보도와 문화면에 힘을 쏟았기 때문에 중산층과 지식층 사이에서 ‘궈러티 페이퍼’(quality paper, 質報)란 호평을 받았다. 두 신문의 1980년대 연간 발매부수는 100만이었고 종이신문 시장 1위를 다퉜다.   

하지만 상황은 90년대 이후 바뀐다. 민주화 이전 지방신문이었던 ‘자유시보’(自由時報)는 은행과 부동산 재벌에게 인수한 뒤 전국종합지로 전환했다. 경영규모도 계속 확대됐다. 자유시보의 린렁산(林榮三) 창사회장은 국민당 중앙위원이었지만 본토파(本土派)인 당시 리뎅휘이 총통과 친분을 가졌다.

90년대 이후 자유시보는 린회장이 거액자금 1.6억웬(당시 43.2억원)을 투입했다. 그는 “신문을 구독하면 빌라, 황금, 벤츠 당첨권을 주겠다”며 대형 시장 전략을 세워 부수를 확대하기로 했다. 2000년 첫 정권 교체된 후 자유시보는 친 리뎅훼이 입장을 유지, 민진당과 첸쉐이뻰(陳水扁) 총통을 지지했다.

국민당 성향의 독자 시장에는 연합보, 중국시보와 중앙일보가 과점을 이뤘지만 친 민진당 신문은 자유시보 뿐이었다. 이는 독자들을 결집하는 효과를 일으켰다. 

기존 국민당이 장악한 언론구조에서 애를 많이 먹었던 민진당은 정부 지원을 통해 자유시보가 발매부수 1위 신문이 되는 데 역할을 했다. 선동적인 어휘와 대만 본토 민족주의를 표방해 대만판 ‘한겨레신문’으로 부를 수 있다.    

   
▲ 레이치잉 에이플데일리 창사회장. (사진-NEXT MAGAZINE 캡처)
 

2003년부터 홍콩에서 성장해온 홍콩 ‘에이플데일리’(蘋果日報)도 대만의 종이매체 시장에 들어온다. 의류사업 지오다노(Giordano)를 창시한 홍콩 거부 레이치잉(黎智英)이 직접 기획하고 주도한 신문이다. 사진과 같은 비주얼, 그리고 야한 콘텐츠, 폭력과 가십(gossip) 등을 전면에 내건 ‘타블로이드’(tabloid) 신문이다. 

이 신문은 기존 대만 신문의 엄숙함을 탈피, 타 신문사보다 연예와 스포츠판이 2~3배 정도 더 컸다. 그만큼 젊은 층에 어필했다. 수많은 대만 학생들이 등교 전에 에이플데일리를 구입해 친구들과 사회의 핫이슈과 연예계 소식을 토론할 정도로 열풍이 거셌다. 

에이플데일리 등장은 보수적인 중국시보와 연합보를 넘어 대만의 종이신문 산업에 큰 충격을 일으켰다. 정기 구독자를 제외하면 에이플데일리는 대만 신문시장에서 가장 높은 판매량을 자랑했고 편의점 가판대를 가장 빠르게 잠식한 신문이 됐다. 

레이 회장은 1989년 6·4 천안문 사태 당시 학생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인물이다. 이로 인해 그의 의류산업은 중국 정부의 타격 대상이 됐고 그후 레이 회장은 선명한 반공 입장을 가진다. 

하지만 레이 회장의 입장과 무관하게 에이플데일리는 대만에서 국민당과 민진당을 동시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다.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선정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에이플데일리는 입장이 다른 다양한 칼럼니스트를 영입했다. 개방적인 정치적 스탠스를 지녔다는 평가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2008년 ‘궈러티 뉴스페이퍼’였던 중국시보에 재정난이 생긴다. 이 때문에 중국시보는 중국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는 대만의 재벌 차이옌민(蔡衍明) 왕왕(旺旺) 회장에게 인수됐다. 이때부터 중국시보 입장은 점차 중국 공산당과 가까워졌다. 친중성향인 국민당 뿐만 아니라 중국정부에 대한 비판 강도도 낮아졌다. 그들을 찬양하고 옹호하는 기사가 등장했다. 기존 엘리트층 독자의 지지가 사라졌고 간판 기자와 칼럼니스트도 신문을 떠났다. 현재 발매부수는 4대 신문사 가운데 꼴찌다.

   
▲ 에이플데일리 한 여기자는 2011년 안마방 도우미로 변장한 뒤 성희롱을 당해 기사를 작성했다. 이 기사는 단독으로 1면에 게재돼 큰 화제가 됐다.ⓒ양첸하오
 

에이플데일리가 대만 진출한 뒤 다른 신문사도 에이플데일리를 흉내냈다. 자극적인 비주얼을 강조하는 취향이 대세가 됐다. 에이플데일리는 각종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면서 인터넷 뉴스팀을 편성해 주도적인 지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온라인 뉴스 시장에서의 과열 경쟁으로 대만 신문사는 취재, 조사 그리고 심층 분석 기사 등을 포기했다. 4대 신문은 서로가 서로를 표절하고 있다. 인터넷 가십이 보도 중심이 됐다. 어떤 사람이 페이스북에서 말 한 마디를 하면 몇 초 뒤 기사가 된다. 팩트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허위 소식도 신문에 대량적으로 실리고 있다. 대만의 종이신문 신뢰도가 바닥을 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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