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여자친구(A씨‧20대 중반)가 자신이 쓴 글의 상당 부분이 허위였다고 밝힌다면 소송 취하도 고려할 수 있다. 이번 소송의 목적은 A씨를 벌주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진실규명이다.”

‘데이트 폭행’ 논란에 휩싸인 진보논객 한윤형 씨(33)가 입을 열었다. 지난 6월 ‘전 여자친구를 지속적으로 폭행했다’는 파문이 인 후 그가 언론과 공식적으로 인터뷰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씨를 만난 날은 지난 26일이었다. 두툼한 검은색 패딩에 뿔테 안경을 쓴 한씨는 앳된 모습의 대학생 같았다. 이날 오후 7시30분께 서울 상수동의 한 식당에서 한씨와 3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그의 폭행을 폭로한 A씨에 대해 감정 표현은 최대한 자제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데이트 폭행’ 자체에 대해선 “더 나은 인간이 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반복하듯 A씨의 주장에 대해선 반박했다. 핵심들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정확하게 3차례 A씨를 폭행했다. 먼저 때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상대가 먼저 가격했고, 이에 감정적 대응 또는 방어적 차원에서 때렸다. 기물파손 행위 등을 포함한 A씨의 평소 폭력은 상상 이상이다. 그러나 A씨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상습적인 폭행’은 없었다.”

   
한윤형씨.
 

“매일처럼 팼다” VS “상습적 폭행 없었다”

한씨는 지난 7월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전 여자친구 A씨를 검찰에 형사 고소했다. A씨가 지난 6월 자신의 블로그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트위터에 잇따라 게시한 폭로 글에 대한 법적 대응인 셈이다.

한씨와 A씨는 중간에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지만 2008년 말부터 2012년 초까지 만 3년 정도 사귀었다. A씨가 올린 폭로글 중에 다음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30대 대표 진보논객’ 한씨를 묘사한 것이라 믿기 힘들었다.

“한윤형은 매일처럼 술을 마시고 매일처럼 한화 야구를 보면서 매일처럼 (나를) 팼다.” 한씨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으나 ‘멍들 정도의 폭행’을 묘사한 폭로도 있다. “짧은 언쟁 끝에 한윤형씨는 저를 한윤형씨 자취방 행거에 밀친 뒤 제 몸을 발로 여러 차례 가격했습니다.”

폭로가 흔히 그렇듯 A씨의 글은 한씨의 사생활에 드리워진 장막을 벗겨냈다. 돋보이는 진보 논객에서 말(글)과 행동이 다르고 여성을 패는 파렴치범으로 전락했다.

한씨는 고교시절 서울대와 조선일보가 공동주최한 ‘고교생 논술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나 조선일보 인터뷰를 거부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 그는 온라인 중심으로 전개된 ‘안티조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2000년대 초 본격적인 인터넷 시대를 맞아 활성화된 정치 사이트 게시판에서 그의 글은 늘 주목을 받았다. ‘진중권(현 동양대학교 교수) 키드’라는 별칭이 붙었다. 진 교수는 당시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 등과 함께 안티조선 활동의 기수(旗手)로 평가된다.

한씨는 20대 중반부터 경향신문과 씨네21 등 주요 언론사에 칼럼을 썼고, 그간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포함해 단독 저서 4권‧공동 저서 10권을 썼다. 2008년 11월부터 2012년 2월까지 미디어전문 온라인매체 ‘미디어스’ 기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진보 논객으로서 그의 이력은 데이트 폭력 파문으로 바스러졌다. 보수 언론은 그에게만 화살을 날리지 않았다. ‘전체 진보’로 타깃을 확대해 이중성을 힐난했다. 진보 언론 대부분은 데이트 폭력을 공론화하는 보도를 했다. 한씨 입장에서는 “전국적으로 공격을 받는 느낌”이었다.

한씨도 A씨의 폭로 직후인 지난 6월2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해명 및 사과글을 올렸다. 폭행 사실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A씨의 폭로 내용에 대해 전반적으로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이때도 한씨는 A씨 주장의 핵심인 ‘주기적 폭행’을 부인했다.

하지만 A씨의 글은 직접 겪지 않으면 쓸 수 없을 정도로 ‘디테일’했다. 이를테면 다음 내용. “당시 그(한씨)와 함께 살고 있던 그의 여동생이 저를 자기 방에 가서 재우며, ‘오빠(한씨)는 엄마가 맞았던 걸 기억하고 자기도 맞았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평했지요.”

한씨의 친한 동료조차 A씨 말을 더 믿는 분위기였다. 한씨의 해명글은 ‘데이트 폭행 가해자의 전형적인 변명’이라는 시선까지 추가시켰다. 여론은 악화됐다. 한씨는 지난 6월22일에 다시 한 번 사과글을 올리고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한겨레21 등에 쓰는 칼럼을 모두 접기로 한 것이다. 그의 활동 중단은 A씨의 주장을 인정하는 모양새로 굳어졌다.

한씨는 왜 이제와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을까.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 전인 지난 11월13일 한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입장문(링크)’를 페이스북에 올렸다.

한씨의 뒤늦은 해명과 달리 A씨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최근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는 것과 대조된다. 오히려 A씨는 폭로글을 올린 자신의 블로그를 폐쇄한 상태다.

“내 말을 믿지 않아 초기 대응할 수 없었다.”

- A씨를 상대로 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잘못한 부분(3차례 상호 폭력 등)이 있었기 때문에 A씨의 폭로 직후 사과를 했다. 하지만 그 결과 A씨 주장 중 내가 인정하지 않은 부분이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진실’로 인정받게 됐다. 당시 당원으로 속해있던 노동당이 곧 조사에 나설 것으로 판단했다. 조사를 통해 내가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무엇인지 드러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서로 진술이 많이 엇갈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분명히 조사를 제안할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런 절차는 없었다. 절차적인 조사가 없다면 사람들이 한쪽 말만 믿지는 않을 것이란 예상도 빗나갔다. 대부분 A씨 말을 믿었다. 폭로자인 A씨를 소환해서 서로의 진술에 대한 개연성을 비교할 절차는 소송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의 법적 대응을 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알고 보니 한윤형이 피해자’라는 시선과 ‘보복 대응에 나섰다’는 시선이 엇갈리고 부딪힌다.  

- 꼭 소송을 해야 했나?

“소송을 하기 전 노동당에 스스로를 제소한다든가, 여성단체의 가해자 상담 프로그램을 찾는다든가 고민을 했다. 다만 운동세력에 속한 지인들조차 ‘소송까지 고려하고 있다면 소송만 하는 것이 맞다’라고 조언했다.”

- A씨의 폭로 직후 ‘저에 대한 비난은 온당하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런데 사건 발생 5개월 정도 지난 이달 초 페이스북 등에 소송 사실을 밝히면서 A씨의 ‘주기적 폭행 주장’을 전면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사건 초기에는 왜 그렇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나.

“정치인이 논란에 휩싸일 때 흔히 기자들에게 잘 기억이 안 난다고 한다. 난 그 말이 변명인 줄 알았는데 이번 일을 겪고 보니 사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A씨의 폭로 이후 정말로 세세한 부분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내가 가장 심하게 맞았던 몇 건이야 당연히 기억이 났지만 평소에도 맞고 살았다는 얘기는 여동생과 지인들의 증언을 듣고서야 기억이 돌아왔다. 오래 전 일이었고, 나는 남자였는지라 그런 일이 대수롭지 않았던 모양이다. 5년 이상 된 기억을 더듬는 과정이 필요했던 만큼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 앞서 말했듯 노동당 조사를 통해 허위 사실이 바로 잡힐 것이라 기대했지만 조사는 없었다. 참고로 나는 지난 9월 노동당을 탈당했다.“

- 당신 주장이 맞다면 오해를 자초한 측면도 있다.

“초기 대응에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나 후회도 들지만, 설사 그랬었다고 해도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여론과 언론 등을 보면 전국적으로 나를 비난하는 분위기였다. 맞불 대응을 했으면 ‘진실 게임’ 양상으로 가는 게 아니라 나에 대한 비난 여론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됐을 것이다. 사람들은 ‘전형’이란 표현을 썼다. 내 대응이 성폭력 가해자의 전형이란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따져보자. 폭로 당시 내가 짧게 사과만 했다면, ‘전형’이 아니라고 칭찬했을까? 내가 A씨 주장을 다 인정했다면 ‘데이트폭력 사건의 전형’을 증명했다고 했을 거다. 내가 A씨의 비행을 쓰거나 그 사람의 주장을 심하게 논박하지 않고 쓴 첫 번째 사과문에 대해선 ‘변명의 전형’이라 했다. 이제 와서 좀더 솔직하게 쓰니 이제는 ‘대응의 전형’이라고들 한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전형을 벗어날 수 있는가. 내가 보기엔 상대방의 행동을 무조건 ‘전형’이라 몰아붙이는 것이 이런 사건의 ‘전형’이다.“

- 1차 재판 결과는 언제쯤 나오는가?

“경찰조사가 현재 진행 중이고 검찰로 넘어가면 이후 재판이 시작된다. 내년 상반기에는 끝났으면 좋겠다.”

- 경찰 조사에는 언제 응했는가?

“지난 8월 말 경이다. 입장문에 했던 얘기들을 주로 했다.”

- A씨도 경찰 조사에 응했는가?

“지난 20일에 응한 것으로 안다. 정확하게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모른다.”

- 앞으로 민사 소송 가능성은?

“일단 형사부터 시작했고 그 이후 결과를 봐서 민사 소송도 검토할 생각이다. 나는 상대방을 처벌하는 것보다 ‘허위사실’임을 밝혀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말을 했더니 변호사 측에서 그렇게 할 것(형사 재판 후 민사 검토)을 제안했다.”

"A씨, 사기그릇으로 내 머리를 쳤다“

데이트 폭력을 둘러싼 한씨의 구체적인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한씨는 광의의 폭력, 즉 비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한 건 맞다. 휴대전화를 집어던지는 등 위협적인 행동도 했다.

그러나 상대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 건 3차례다. 이 3차례 모두 상호 폭력이었다. 반면 A씨는 ‘주기적‧일방적 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씨는 A씨와의 연애기간 중 상당 기간을 자신과 함께 살았던 자신의 친동생이 나서줬으면 했지만 그도 쉽지 않았다고 했다.

또 A씨의 폭로글 중 여동생이 나온 부분은 모두 허위라고 했다. 한씨는 “동생에게 인터넷에서 싸워달라고 하는 건 무리였다. 동생은 법정에서 증언만 해줄 수 있다고 했다”며 “그게 소송을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한씨가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페이스북에 올린 ‘입장문’ 중 한 문단을 가져온다.

“폭로자(A씨)의 주요 주장은 제가 1) 구타를, 2) 상습적으로, 3) 행거에 머리를 박을 정도의, 그 결과 멍이 들 정도의 강도로 4) 매번 그에 대해 사과하면서도 했다는 것입니다. 추가적으로 5) 매일처럼 술을 마시고 매일처럼 한화 야구를 보면서 매일처럼 팼다는 외설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이 주장들은 1%의 진실도 없는 전적인 허위임을 알려드립니다.”

- A씨의 폭력은 대응해야 할 정도로 위협적인 수준이었나.

“입장문에서도 썼지만 2010년 5월 어느 날이다. A씨는 내 부정을 알아냈다는 이유로 친구와 함께 있던 술집에 찾아왔다. 그는 사기그릇을 들고 내 머리를 가격했다. 사기그릇이 정확히 둘로 깨지고 한쪽 조각이 귀를 스치고 지나가 내 귀에서 피가 흘렀다. 이때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 체험을 했다. 여성이 나보다 신체적인 능력이 약하다고 해서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폭력이 아니었다.”

- 당신이 해명글에서 ‘A씨가 식칼을 들까 겁났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에 대해 ‘오버한다’는 비난도 있었다.

“내가 A씨 때문에 이사를 가야겠다고 결심한 사건이 있다. 새벽에 취한 A씨가 집 문을 깨고 우리 집에 들어와 난동을 부린 사건이다. 당시 우리 집 문은 알루미늄 샤시에 유리창이 결합된 형태다. 유리문을 깨면 문을 어떻게든 열 수 있다. A씨는 문을 열라고 난리를 칠 때부터 방문을 닫고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어떻게 깼는지는 모르겠다. 방문을 열고 나와 보니 부엌 앞에 서 있어서 질겁을 하고 A씨를 밀어뜨리고 넘어뜨렸다. 이게 내가 첫 번째 해명문에 쓴 ‘식칼 상황’의 전말이다.“

그러나 상호 폭행도 어찌됐든 폭행이다. 남성과 여성 간 신체적인 격차도 있다. 솜방망이로 치는 것과 야구방망이로 치는 것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3차례 폭행 ‘수위’에 대해 물었을 때 한씨는 잠깐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상황을 설명했다

“사기그릇으로 때린 이후에는 욱해서 때린 게 맞다. 수위는 내 방안에서 끌어내고 발로 엉덩이를 걷어찬 정도였다. 상대방이 비명을 질렀다. 문을 깨고 들어왔을 때 대처한 건 거의 정당방위였다는 생각이 든다. 밀어서 넘어뜨리고 위치를 바꾸었을 뿐이다. 이에 대해서도 비판한다면 감수할 수 있다. 길거리에서 뺨을 맞았을 때 맞서 대응한 적이 있다는 얘기까지 입장문에 솔직하게 썼다. 잊었는데 그런 기억이 돌아오더라.“

- 얘기가 맞다면 A씨에게 원한을 산 건 같다.
“결국 헤어지긴 했는데 이별 후에도 가끔 안부를 주고받을 정도로 좋은 사이를 유지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원한 감정이 나에게 집중됐다. 진영(진보 쪽)에서 나를 안 좋게 보는 사람과 어울려 다니며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를 만났을 때 A씨는 미성년자였다. 고등학교도 그만둔 상태다. 나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헤어졌을 때 배신감도 컸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돈 없고 우울한 나를 만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헤어진 후에도 갖고 있었다."

- A씨의 폭로 직후 그와 접촉한 적 있는가.

“없다.”

- 화해 가능성은 있는가. 이를테면 소송 취하라든가.

“자신이 쓴 폭로글의 상당 부분이 허위였다고 말해줄 수만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불가피하게 소송을 결정했지만, 화해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다. 하지만 A씨가 자신의 진술을 고수한다면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쪽에선 나에 대한 폭로를 공익적인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주장을 철회할 여지가 적어 보인다. 안타까운 일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한씨는 ‘입장문’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 “저는 폭로자(A씨)가 ‘기억의 왜곡’이 있었던 게 아니라 ‘악의적인 거짓말’을 했다는 강력한 심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악의적 의도를 갖고 사실을 조작해 폭로글을 올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씨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도, 그가 가한 ‘광의의 폭력’은 여론(또는 주변)의 이해를 얻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법리적 해석 등을 통해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과 대중에게 이해를 구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처음엔 나 자신의 미숙함만 반성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A씨의 주장대로 나를 여성 상습 구타범으로 믿어버리니 그게 쉽지 않더라. 그 다음부터는 나를 반성하기 시작했는데 다른 부분이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터무니없는 말들을 쉽게 믿어버리는지를 반성했다. 술 마시면서 소리 질렀던 일, 남들과 다퉜던 일들이 떠올랐다. SNS에서 괜히 성질을 부렸던 일들도 반성했다. 그럼에도 남는 나 자신의 미숙함은 지난 세월 동안 고치려고 많이 노력했다. 당연히 앞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한씨가 이번 소송을 제기한 배경에는 ‘현실’이 깔려 있다. 그는 재기에 대한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데이트 폭행 파문 이후 기고‧출판 일을 접어 그의 표현을 빌리면 “생계가 경각에 달했다”고 한다.

- 지인과 부모에게 손을 벌려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는데.

“(나 같은) 프리랜서에게 생계는 절박한 문제다. 과거 허지웅(영화평론가)이 밥벌이를 위해 종합편성채널(종편)에 출연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배반했다’며 비난했다. 나는 종편의 출연 제의를 거부했지만, 허지웅의 선택을 이해하는 쪽이었다. 그런 취지로 토론회에서 발언하기도 했다. 일단 먹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이 마련돼야 글도 쓸 수 있다. 글 이외에 다른 무엇을 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글은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고 이외에 딱히 할 줄 아는 게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른 나이에 ‘논객’으로 데뷔해 글쟁이로 쭉 살았다. 내가 삶을 개척했던 부분 보다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다 보니 이 길(글쟁이)에 들어서 있었다. 갑자기 바꿀 수 없는 노릇이다.“

“재기 하면, 글쓰기 타깃층 확대될 것”

한씨는 10대 시절부터 진보 진영 필자 중 두각을 나타냈다. 칼럼니스트 겸 소설가인 고종석은 2007년 5월 영화잡지 ‘씨네21’에 쓴 글에서 “고교생이 썼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한씨의) 글이 (여러 의미에서) 어른스러웠다”고 평했다.

- 10~20대 때 한마디로 잘 나갔다.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진보 논객으로 이름을 알리다 보니 ‘진영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인생을 충분히 경험한 후 이념이나 진영을 선택해도 되는데 어린 시절을 너무 일찍 주목을 받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내놓다보니 진보 논객 딱지가 붙었다. 이 때문에 자유로운 글쓰기에 제한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 당신을 포함해 진보 쪽 필자 글 대부분에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까. 솔직히 말하면 글이 너무 피상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가령 나는 산업부 기자로서 삼성을 출입하고 있다. 그런데 대다수 진보 매체에서 쓰는 삼성 기사를 보면 ‘사정을 많이 모르고 쓰는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진보 매체가 쓰는 비판 기사를 삼성은 그리 아파하지 않는다.
 
“그런 부분은 대체로 공감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의 경우 자의반 타의반으로 진영에 일찍 너무 몸담다 보니 글쓰기에 제한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예전과 생각이 다소 바뀌었다. 글쟁이는 궁극적으로 모든 이를 대상으로 한 글쓰기를 지향해야 한다. 좌파 매체 기자도 ‘우파적인 특종’을 써야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삼성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는 사실 삼성에 대해 ‘한국 사회에서 가장 근대적인 기업’이라고 평한 적도 있다. 이번 사건이 마무리되고 만약 복귀한다면 글쓰기에 자연스러운 변화가 일 것 같다. 진영 논리에서 해방되지 않을까. 나 역시 이번 사건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 소속됐던 진영과 결별하게 됐다. 노동당도 탈당했고. 말하자면 반드시 우리 편을 위한 글을 쓸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글쓰기 타깃층이 넓어질 것이다.“

- 미안한 얘기지만 글쓰기에도 ‘위기’는 있는 듯하다. 20대의 눈부신 성장에 비해 30대에 와서 성장이 정체돼 있다는 얘기가 있다.

“20대 때 글을 보면 더 반짝반짝하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출판 산업 관계자들이라면 지금의 글을 더 선호할 것이다. 대중도서 필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점점 더 많아졌고 그걸 맞춰가는 과정에 있다. 그러면서 평범한 필자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또 미디어스 시절 기자와 전문가 사이에서 글을 썼다. 쉬운 글을 지향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문 독자를 겨냥한 글도 아니었다. 이제 확실하게 한 분야를 파고들 필요성을 느낀다. 만약 재기를 한다면 단행본에 염두에 둔 글을 쓸 생각이다. 칼럼니스트 활동은 자제할 생각이다.”

한씨는 예상 보다 일찍 귀가해 ‘여자친구’가 좋아할 것이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씨는 “지금 나 보고 재기 불능 상태에 빠졌다고 말한 사람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재기하고 싶다”고 말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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