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어제 김영삼 선배님의 ‘국가장’이 거행되었습니다. 기온이 갑자기 영하로 떨어진 탓인지 국회의사당 광장의 영결식장에는 예상보다 훨씬 적은 7천여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특히 외교사절들이 보기에 국가장이 썰렁해 보였을 것입니다. 전직 대통령들의 영결식에는 어김없이 현직 대통령이 참석했는데 이번에 박근혜 대통령은 서울대병원의 장례식장에서 유족을 위로한 뒤 운구행렬을 지켜보고는 영결식장에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감기 증상이 심해서 그랬다”는 것이 청와대의 ‘해명’이었습니다. 김영삼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영삼: 곧 해외순방을 떠날 예정이라서 그랬다니 뭐라고 탓하겠습니까? 특히 영결식의 당사자인 제가 말입니다. 그러나 이번 일 말고도 박 대통령이 ‘속이 좁다’는 비평을 받을 만한 사례들이 많았지요.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어 새누리당 원내대표 자리에서 쫓아낸 유승민 의원이 얼마 전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아예 조화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11월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의 모친상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12년 대선 때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으로 박근혜 후보를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대통령 취임 뒤에 날카로운 비판자로 변했기 때문일까요? 옛적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척을 진 사람이라도 고인이 되면 문상을 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여겨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박 대통령의 처신이 몹시 눈에 거슬리는군요.

김대중: 2013년 12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흑인인권운동가이던 넬슨 만델라의 영결식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지도자들이 거의 다 참석했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불참했지요. 그런데 지난 3월 싱가포르 전 총리 리콴유의 장례식에는 참석해서 “리콴유 전 총리는 우리 시대의 기념비적인 지도자”로서 “그의 이름은 세계사 페이지에 영원히 각인될 것이고, 한국인은 리 전 총리를 잃은 슬픔을 싱가포르의 모든 국민과 함께 할 것”이라고 조문록에 적었습니다. 백인 정권의 야만적 탄압에 신음하던 흑인들을 위해 싸우다 무기형을 받고 27년이 넘게 복역한 ‘세계 인권운동의 상징적 존재’인 만델라의 죽음은 외면하고 박정희와 함께 아시아의 냉혈적 독재자라고 불리던 리콴유의 장례식에 가서는 ‘한국인’의 이름으로 애도의 뜻을 전한 것입니다.

노무현: 지난 11월 22일 김영삼 선배님께서 작고하신 바로 이튿날 저희가 ‘천상 좌담회’를 가졌습니다. 돌아가신 다음날 선배님을 갑자기 모신 것이 결례였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로부터 닷새 뒤에 다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까닭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벌이고 있는 ‘주권자들과의 전쟁’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박 대통령은 김영삼 선배님에 대한 국가장 기간인 지난 24일 국무회의에서 그야말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폭탄 발언’을 했습니다. 지난 11월 14일 노동자, 농민, 빈민, 청년학생 등 13만여명이 참여한 ‘민중총궐기 대회’는 이슬람국가(IS)가 저지른 테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12월 5일로 예정된 2차 대회도 ‘법치를 부정하고 정부를 무력화하는 행위’라고 단정하면서 ‘복면금지법’과 테러 관련 법안을 국회가 조속히 통과시키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박 대통령은 경찰의 물대포 조준 발사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 농민과 가족에 대한 사과는 단 한 마디도 않은 채 13분에 걸쳐 “테러단체들이 불법시위에 섞여 국민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요. 그는 국회에 대해 한중 FTA를 조속히 처리하라고 촉구하면서 “맨날 앉아서 립서비스만 하고, 경제 걱정만 하고, 민생이 어렵다고 하고, 자기 할 일은 안 하고, 이건 말이 안 된다, 위선이라고 생각한다”고 거칠게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말이 고스란히 박 대통령에게 되돌아야 할 것 같은데요. 김영삼 선배님은 국가장의 실질적 ‘상주’가 되어야 할 박 대통령이 이런 언행을 보인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왼쪽부터)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 연합뉴스
 

 

[ 관련기사 : 미디어오늘 /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천상 좌담회 (11월24일)]

김영삼: 제가 지난번 좌담회에서 “2012년 대선 기간에 박근혜 후보를 ‘칠푼이’라고 부른 것은 이제 생각하니 좀 심했다”고 반성했는데 그 말을 취소해야겠습니다.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어떻게 평화적 집회를 열고 시위를 벌인 13만여명의 주권자들을 IS 같은 테러분자들이라고 몰아붙일 수 있습니까? 그들 가운데 극소수가 경찰에 위해를 끼칠 수 있는 행위를 저질렀다면 그 사람들만을 사법처리하면 됩니다. 소수의 일탈을 구실로 절대 다수를 ‘반국가행위자’로 매도하는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주 쓰던 수법입니다.

김대중: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복면금지법’ 제정을 촉구한 바로 이튿날 새누리당 의원 32명이 잽싸게 ‘복면 착용 금지’를 뼈대로 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더군요. 이것이야말로 헌법이 보장한 집회와 표현의 자유를 유린하겠다는 기도입니다. 헌법재판소는 2003년 10월 “주최자는 집회의 대상, 목적, 장소 및 시간에 관하여, 참가자는 참가의 형태와 정도, 복장을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다”고 구체화했는데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그것을 휴지조각으로 만들려 들고 있습니다. 저는 ‘복면’을 어떻게  규정할지조차 전혀 짐작할 수 없습니다. 머리끝부터 목까지 가린 것일까요, 아니면 이마 아래 눈부터 턱까지를 가린 것일까요? 추운 날씨에 목도리로 얼굴을 감싸면 그것도 복면이 될까요? 평화적인 시위대의 앞장에 서서 탈춤을 추는 춤패들이 쓴 탈도 복면일까요? 군대에서 위장을 할 때처럼 얼굴에 숯검정을 바르는 것도 복면을 쓰는 행위가 될까요? ‘복면금지법’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판사들이 ‘복면’의 법적 규정을 둘러싸고 골머리를 앓게 될 것입니다. 박 대통령이 왜 이렇게 몰지각한 입법을 강요하려 드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헌법을 유린한 채 ‘대통령 특별선언’이라는 것을 근거로 ‘10월 유신’이라는 헌정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하고 종신집권의 길을 트려고 한 ‘선례’를 모방하는 것일까요?

노무현: 화제를 바꾸어 보겠습니다. 11월 14일의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물대포를 맞고 지금 뇌사 직전에 이른 백남기 농민의 사돈, 곧 둘째 딸 백민주화 씨의 시아버지인 네덜란드인 해롤드 모넌 씨가 지난 25일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경찰에게 총을 겨눴거나, 벽돌을 던지거나, 때리거나 하는 위험한 상황에서는 경찰의 생명을 방어하기 위해 물대포를 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경찰이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쏘는 것이지, 상대를 죽이기 위해 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광장 한가운데 혼자 서 있었다. 경찰의 생명을 위협할 만한 그 어떤 것도 들고 있지 않았는데, 그 사람을 향해서 직격으로 물대포를 쐈다. 그것은 범죄행위이고 살인이다.” 그분은 박근혜 대통령이 시위대를 IS에 비유한 말에 대해서는 “유럽에서는 탄핵까지 가능한 발언”이라고 단정했지요. <한겨레>의 허재현 기자는 트위터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대통령을 비판하려고 집회에 나온 국민을 테러리스트로 여긴다면 더 이상 국민도 당신을 대통령이 아닌 맞서 싸워야 할 적으로 여길 겁니다. 대통령은 국민 모두를 품고 가려 노력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당신은 대통령 자격이 없습니다.”

김영삼: 1979년의 ‘부마항쟁’ 때가 생각납니다. 그 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0월 4일 박정희 대통령의 거수기이던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은 제가 반국가적 행위를 했다는 트집을 잡아 국회의원직을 박탈했습니다. 그것이 10월 15일 저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터진 항쟁의 한 동인이 되었지요. 18일과 19일에는 마산과 창원으로 항쟁이 확산되었습니다. 부산 시위 현장에서 반유신독재를 외치는 민중의 열기를 확인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하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처럼 1백만이나 2백만 명을 죽여 버리면 소요가 가라앉을 것이라고 주장했지요. 박 대통령은 머리를 끄덕였다고 합니다. 결국 김 부장은 박 대통령을 제거하지 않으면 대학살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판단했고, 그것이 10월 26일의 ‘청와대 안가 대통령 살해 사건’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모든 독재자는 결국 비참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이 점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김대중: 그렇습니다. 김영삼 동지는 박정희 정권 시기에 초산 테러를 당했고, 전두환 군사정권 때인 1983년에는 민주화를 외치며 23일 동안 목숨을 걸고 단식을 하셨습니다. 저는 1973년 8월 박 정권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를 당해 죽음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전두환 정권이 조작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극적으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박 정권도 전 정권도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항쟁에 밀려 파탄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텐데 지금의 언동을 보면 불안하기 짝이 없군요. 침묵하는 듯이 보이는 주권자들이 분노해서 대대적 항쟁을 일으킬 때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부마항쟁과 6월항쟁이 여실히 보여준 바 있습니다.

노무현: 제동장치도 없는 자전거를 타고 비탈길을 내려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박근혜 정권의 폭주를 저지해야 할 야권, 특히 새정치민주연합이 보이고 있는 무기력함이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저의 법조계 후배이자 동지인 문재인 대표는 정직하고 성실한 인물이지만 당내에서 확고한 지도력을 확보하지 못한 처지이고 국민들에 대해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조건에 놓여 있습니다. 제2야당인 정의당은 최근 몇 개 정파와 합세해서 새 출발을 했지만 지지율 5% 남짓으로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밖에 천정배 의원 중심의 신당추진세력까지 독자적으로 움직인다면 내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압승을 거두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라는 역사쿠데타가 진보는 물론이고 보수 진영 다수의 반대에 부닥쳐 있다는 현실을 무릅쓰고 극우적 프레임으로 콘크리트 지지층을 결합시키면서 내년 총선 압승을 통한 장기집권을 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것을 막고 총선 승리와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 지난 14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에서 경찰이 캡사이신이 들어간 물대포를 쏘자 시위대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김대중: 지난 11월 14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범시민대회에서 민주주의국민행동 상임대표 함세웅 신부가 “1987년 6월항쟁 시기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같은 범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해서 시민단체들과 야권의 대연합을 이루자”고 제안하셨다고 합니다. 범국민운동의 구심점이 없는 상태에서 시민단체들이 결합해서 야권의 정당들과 제휴하는 조직을 만든다면 총선 승리와 정권교체의 전망이 밝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특히 새정치민주연합 안에서 공천권을 둘러싸고 잡음을 일으키는 의원들이나 문재인 대표에 대해 무조건 부정적 태도로 일관하는 정치인의 끈질긴 반대를 어떻게 극복하는지가 가장 큰 과제가 되겠지요. 저 자신은 이제 호남이나 김대중을 파는 ‘정치적 광고문안’은 확실히 배격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생시에 한결같이 주장했듯이 지역 간의 화합, 나아가서 국민 통합 없이는 민주화와 통일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영삼: 이번에 저의 죽음을 계기로 민주화투쟁의 중요성과 독재정권의 문제가 새삼스럽게 부각된 것 같습니다.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의 비민주적 행태, 유신독재로의 회귀와 저의 정치적 행적을 비교하는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제가 한 점 부끄럼 없이 정치를 해온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파괴적이고 편집증적인 정권의 행태는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도 한 사람의 주권자에 불과합니다. 부디 다수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옳은 일이면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정치적, 인간적 파멸을 피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노무현: 저도 두 선배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이승을 떠나고 보니 인생이 얼마나 짧고 욕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정의로운 권력이 평화와 통일로 가는 정치를 하면서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체제를 이룩하면 좋겠지만 특정 개인의 권력욕이나 탐욕을 충족시키려는 책동은 반드시 파탄에 빠진다는 것을 박근혜 대통령이 명심하라고 권고하겠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두 분 선배님과 저는 여기서 언제나 조국을 지켜보며 진정한 민주화와 통일의 날이 오기를 기원하고 있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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