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을 때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을 만나면 갈등이 생긴다. 빨간불에 길을 건너면 ‘무단횡단’이라는 범법행위다. 하지만 차가 하나도 안 보이는 텅 빈 길을 건넌다고 누구에게 피해가 생기지는 않는다. 우리는 다만 배운대로 신호를 기다릴 뿐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자동차사고 사망자는 1893년, 런던에서 나왔다. 최고 속도가 시속 7킬로미터가 못되는 차로 어떻게 사람을 칠 수 있었을까 싶지만, 사고를 당한 브리짓 드리스콜이라는 여성은 길을 건너던 중 난생 처음 보는 물체가 다가오자 당황해서 꼼짝도 못하고 길에 서 있었고, 운전자도 당황해서 서지 못했다고 한다.

운전자와 보행자 사이의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20년 대까지 미국에서만 25만 명이 차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차가 보행자를 치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동차 운전자를 끌어내 폭행하는 일이 흔했다. 지금처럼 차도 많지 않았는데 사고가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급속한 기술진보로 자동차의 속도는 하루가 다르게 빨라졌지만, 도로체계는 마차시대와 차이가 없어 보행자와 자동차가 길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대책이 필요했다.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가져오는 모든 신기술들이 그렇듯 자동차도 그저 새로운 지평을 열어두기만 했을 뿐, 그 위에 지도를 그리고 구획을 정하는 작업은 사회의 몫이었다. 그런 작업은 대개 복잡하고, 시끄럽고, 시행착오로 가득하다. 보행자와 운전자는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다퉜다. 보행자들은 자동차 속도가 시속 40킬로미터를 넘으면 엔진을 정지시키는 가버너(governor)라는 장치를 의무화하려고 했고, 자동차업계는 공공도로를 자동차 전용도로로 만들기 위한 로비에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어느 쪽이 승리했는지는 어휘의 변화만 봐도 알 수 있다. 원래는 'jay driver(무단운전자)'라는 단어가 더 많이 쓰였지만 지금은 사라졌고, 'jaywalker(무단횡단자)'이라는 말이 일반화되었다. 두 집단이 공유하던 공간을 어느 한 쪽이 독점하고 싶으면 다른 쪽을 '무단 행위자'로 만들면 된다. 자동차를 만들어 파는 기업과 힘없는 보행자들 중 어느 쪽이 의회에 더 큰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지는 굳이 얘기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아무리 논쟁이 많은 사안이었다 해도 법으로 통과되면 도덕(道德)화 과정을 밟는다. 차가 한 대도 없는 길을 건널 때 죄책감이 드는 이유는 우리가 어릴 때 부터 받은 공중도덕 교육 때문이다. 법이 통과된 후 미국의 AAA (트리플A: American Automobile Association)은 각급학교에서 무단횡단의 위험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후원하면서 아이들에게 ‘무단횡단은 나쁜 일’임을 가르쳤고, 경찰은 무단횡단자들을 잡아 목에 "무단횡단자"라는 팻말을 걸어 길거리에 세워놓았다. 우리나라에서도 6, 70년대에는 무단횡단자들을 잡아 길가에 세워두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일이 있었다.

법으로 금지된 내용은 그런 과정을 거쳐 도덕적으로도 나쁜 것이 된다.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권력의 입장에서는 그 둘을 동일시하는 것이 편리하다. 모든 시민이 무단횡단을 하면 경찰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시민들이 무단횡단을 도덕적으로 나쁜 것으로 인식하여 감시를 내재화하면 차 없는 횡단보도에서도 파란불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감옥형태를 이야기하면서 주장한 것 처럼 감시의 내재화는 권력을 효율적으로 강화한다. 시위대가 마스크를 쓰는 것을 테러집단인 IS에 비유한 것은 그렇게 도덕적 잣대를 가져다 대려는 어설픈 시도다. 미국의 보수신문인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자가 트위터에서 “Really(진담이냐)?”고 어이없어 한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을 모르는 박대통령의 무지 때문이지만, 한국정부는 ‘반정부’와 ‘부도덕’을 동일시하는 유교적 전통을 민주주의 보다 위에 두어왔다.

푸코가 언급한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의 형태는 그 자체로도 권력이다. 그 구조에서는 감시하는 사람(간수)이 감시당하는 사람(죄수)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드러나 있고, 상대방은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무방비상태가 된다.

헬멧과 안면보호대, 방패 뒤에 숨어서 핸디캠으로 촬영하는 경찰 앞에서 얼굴을 가리는 건 권력 앞에선 사람들의 최소한의 자기방어다. 시위대든 경찰이든 폭력을 행사한다면 도덕적 판단의 영역이 되지만, 얼굴을 가리는 것은 도덕적으로 나쁜 일이 아니다.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시위 중 마스크 착용금지는 권력 앞에서 시민들의 심리적 위축을 불러오고 시위대 전체를 잠재적 범법자로 취급하는 행위다.

찻길은 처음부터 찻길이 아니었고, 아무도 없는 찻길을 건널 때 드는 죄책감은 학습의 결과다. 이  사실을 망각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자유를 권력에게 내어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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